㉦ 8일 동안을 무척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서,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目的地)에 도착하였
다. 그러나 거기에는 새로운 곤란(困難)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 집이 있나, 아는 사람
이 있나!
우리는 오막살이를 하나 빌어 일행을 들게 하였는데, 말 다섯 필이 거추장스러워, 내
말을 이내 팔아 양식(糧食)을 장만하고, 겨우 다리를 뻗을만한 초가(草家)도 한 채 샀
다. 우리는 빌려온 두 필의 말을 모두 돌려보내야 할 것이지만, 돈이 없어 그러지를 못
하고, 1 개월 동안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는데, 먹이가 거의 한 필 값이나 들어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 말들을 돌려보낼 수가 있게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뒤에 낙오(落伍)
되었던 나머지 가족들도 데려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농사철은 지나가고 겨울이 닥쳐와, 길이란 길은 모두 눈
에 파묻혀버렸다. 근처에는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 없고, 이웃과도 내왕(來往)을 할
수가 없는지라, 40명 이상이나 되는 우리는 굶어죽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우리에게 남
아있던 말 한 필은 굉장히 큰 나무구유를 갉아서 거의 다 먹어버렸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달라고 끊임없이 울고, 어른들조차도 불안(不安)하고 초조(焦燥)
하게 되었다. 양식(糧食)이 거의 다 떨어져 오는 날, 하루하루가 암담(暗澹)한 미래를
약속하니, 우리는 원망(怨望)스러운 유혹(誘惑), 이렇게 무서운 고통(苦痛)의 원인(原
因)이 된 우리의 신앙(信仰)을 증오(憎惡)하고, 천주를 왜 믿었나 하며, 우리 자신을 저
주(咀呪)하는 유혹(誘惑)에 빠지곤 하였다.
㉧ 마침내 천주의 인자하신 이적(異蹟)으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 겨울이 지나고 눈이 녹자, 통행(通行)도 하고 산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약 70리 떨어진 곳에 최 초시(最初試)라는 부자(富者)가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서 이틀을 묵으며, 우리 집안들이 당하는 곤궁(困窮)의 참상(慘
狀)을 설명하여, 그의 주선으로 벼 열섬을 얻을 수가 있었다. 운반비를 덜기위하여, 그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벼를 찧어 달라고 청하니, 쾌히 승낙(勝諾)을 하였다. 그런 다음,
쌀을 일부분은 팔고, 나머지는 2, 3일동안에 운반(運搬)해 오게 하였다. 이 곡식(穀食)
은 모두정한 기한(期限)에 갚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이렇게 처리(處理)하고 나서, 우리 집안 식구들을 다시금 위로(慰勞)하니, 그
제야 내 말을 들었고, 기쁨과 우애(友愛)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꾸어 쓴 돈이 벌써 백량(百兩)이 더되었지만, 그런 이야기는 비
칠 용기(勇氣)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신을 차리고 양식(糧食)을 아껴먹어야 한다
는 말을 내가하기만 했다가는, 모든 이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근심스러워지기 때문이었
다.』
④ 산과 숲을 찾아 피난(避難)해 갔던 신자(信者)들은 거의가 이러한 처지(處地)에 놓여있
었고, 나라의 동북(東北)쪽으로 간 사람들은 특히 고생(苦生)이 더하였다. 똑같은 피로
와 똑같은 곤궁(困窮)을 겪었으나, 곧 덧붙여 말해야 될 것은 똑같이 하느님의 보호(保
護)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귀양을 간 사람들의 처지(處地)는 더욱 참혹(慘酷)하였으니, 그들은 자유(自由)를 박
탈(剝奪)당하였고, 의심(疑心) 많은 관헌(官憲)의 감시(監視)를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때에는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좀 덜어주려고, 그들을 따라왔던 일가친척(一哥親
戚)들과도 무지막지하게 이별을 강요(强要)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攝理)는 이 귀양살이 하는 신자(信者)들과, 피난(避難)간 신자
들을, 아마 그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도자(傳導者)가 되게 하였다. 그들의
집들이 한 마을을 이루고, 그들의 가족(家族)이 많고 활발한 신자집단(信者集團)을 이
루어, 조선(朝鮮)에서 가장 궁벽(窮僻)한 구석에까지 복음(福音)을 알렸던 것이다.
④ 우리는 박해(迫害)가 지난 후의 몇 해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事件)들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조정(朝廷)에서는 천주교가 이미 기운(氣運)이 다하였고, 피 속에 잠긴 이 새로
운 도당(徒黨)이 잠간 사이에 저절로 사라져 버리리라는 확신(確信)을 가졌으므로, 신
입교우들을 별로 귀찮게 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방(地方)에서는 몇몇 신자(信者)들이
붙잡혔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1804년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의 친척 조숙(趙숙)이 이천(利川)고을에서 체포(逮
捕)되었다. 1805년에는 또 다른 신자들이 해미진영(海美鎭營)에 갇혔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는 모르지만, 얼마 후에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나 조숙(趙숙)은 양근아문(楊根衙門)으로 이송(移送)되어 가서 사형선고(死刑宣
告)를 받았다. 형벌(刑罰)을 받는 동안 처음에는 마음이 약해져서 배교(背敎)를 하고,
방금 위에서 말한 바 있는 신태보(申太甫) 베드로의 사촌 이(李)여진을 밀고(密告)하였
다. 이 밀고로 인하여 이(李)여진 요한이 붙잡혔다. 그러나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염려
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가 서울로 달려가 청탁(請託)을 하고, 뇌물(賂物)도 적당히
쓰고 하여, 이(李)여진 요한이 석방(釋放)되게 하고야 말았다. 이것은 신자들의 큰 이익
(利益)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許諾)하신 일일 것이다.
이(李)여진 요한은 오래지 않아, 교우(敎友)들을 위하여 주요한 일을 하게 되었다. 옥
에서 나오기 전에 이(李)여진 요한은 조숙(趙숙)을 용서하고 그에게 자기의 죄를 아프
게 뉘우치게 하여, 그로 하여금 신앙(信仰)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용기(勇氣)를 다시 일
으키게 할 수 있게 하였다.
조숙(趙숙)이 형장(刑場)으로 끌려갈 때에 이(李)여진 요한이 길 옆에 서 있다가 눈
짓으로 하늘을 가리키니, 순교자(殉敎者)도 눈짓으로 알아들었노라고 대답하였다 한
다. 그는 양근(楊根)에서 참수(斬首)되었다.
⑤ 이러한 개별적인 처형(處刑)이 있은 후 다른 처형은 뒤따르지 않으니, 신자(信者)들은
차츰 얼이 빠진 상태에서 깨어나, 다시금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그들은 집회(集會)는 고사하고, 서로 말을 건넬 생각조차 못하였고, 마을
안에서나 한 길에서 만나면, 멀리서 서로 인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다시 상종(相從)을 하게 되고, 서로 찾고, 서로 수를 헤아리고, 서로 모이기 시작하였으
며, 죽었거나 귀양을 간 줄로 생각했던 교우를 한 사람 만나던지, 박해(迫害)의 재난(災
難) 가운데서 멀리 헤어졌던 친척(親戚)이나 지기(知己)들을 상봉(相逢)하게 되면, 무
슨 명절날처럼 즐거워들을 하였다.
그들은 서로 위로(慰勞)하고, 자기들이 목격(目擊)한했던 무서운 광경(光景)이나, 교
훈(敎訓)되는 행적(行蹟)을 이야기함으로써, 서로 도와가며 성경(聖經) 몇 권이나 성물
(聖物) 몇 가지를 찾아내고, 서로서로 격려(激勵)하여, 전에 지키던 신자의 본분(本分)
을 새로운 열심히 다시 지키게 되었다.
⑥ 모든 이가 그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주 아무것도 없는 형제(兄弟)들에게 무슨 도움을
베풀어 줄 줄을 알았고, 과부(寡婦)와 고아(孤兒)들을 거두어주니, 이 불행(不幸)한 시
절보다 우애(友愛)가 더 깊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목격한 노인(老人)들은, 그때에는 모든 재산(財産)이 정말 공동(共同)으로
쓰여졌었다고 말한다. 신입교우 중에서 남보다 학식(學識)이 많은 이들은, 자기 집안이
나 이웃에 있는 무식(無識)한 이들에게 기도문(祈禱文)과 천주교의 요리(要理)를 가르
치는 것을 본분(本分)으로 알았다.
끝으로, 더욱 헌신적(獻身的)인 몇몇 신자들은 자기들의 지식(知識)이나 성품(性品)
이나 명성(名聲)으로 얻었던 영향력을 이용(利用)하여, 하느님의 은총(恩寵)의 충동을
따라, 조선천주교회의 재조직(再組織)이라는 어려운 일에 온전히 자기들의 몸을 바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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