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의 재건운동(再建運動)의 전개
① 권(權)기인 요한
순교자 권철신(권철신) 암브로시오의 조카인 권(權)기인 요한은, 박해(迫害)중에는 몸
을 피했으나 서울을 떠나지는 않고, 자기 돈으로 옥에 갇힌 이들을 도와주고, 밤낮을 가
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일과 그들의 집안일을 보살펴주었다.
박해(박해)가 끝나자 그는 이쪽저쪽으로 다니며, 교우들을 격력(激勵)하고, 그들의
무관심(無關心)을 흔들어 깨우고, 공포심(恐怖心)을 덜어주며, 다시 신자의 본분(本分)
을 지키도록 이끄는 등 전력(全力)을 다해 전반적인 절망상태(絶望狀態)와 대항하여 싸
웠다.
② 최신덕 마오로
내포지방(內浦地方) 다래골 출신으로, 학식(學識)이 있고 열심하며, 마음이 단단한 사
람이었는데, 이 분은 이와 같은 애덕(愛德)의 길을 실행(實行)하였다.
여러 마을의 신자들 사이에 다시 내왕(來往)이 있도록 주선하는 일만으로는 만족하
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여 주려고, 자기 손으로 교회서적
(敎會書籍)을 많이 베껴,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신자집단(信者集團)을 재건(再建)하
는데 이바지하였다.
③ 이 재건운동(再建運動)에 활발히 참여한 사람들로서는, 이(李)여진 요한과 그의 사촌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홍락민(洪樂敏) 루카의 아들 홍우송, 정약용(丁若鏞) 요한을
들어야 하겠는데, 정약용(丁若鏞) 요한은 박해 중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背敎)했었으
나, 진실히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온 힘을 기울여 공동사업(共同事業)에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속죄(贖罪)하기에 힘썼다.
그들의 노력(努力)은 헛되지 않았다. 신자집단(信者集團)들이 다시 이루어지고, 매우
많은 수의 배교자(背敎者)들이 회개(悔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전파(福音傳
播)가 새로 힘차게 행해졌고, 외교인(外敎人)들의 입교(入敎)가 다시 시작되었으며, 새
로운 신자들이 박해(迫害)로 인하여 생겼던 공백(空白)을 오래지 않아 채우고도 남았
다.
④ 이렇게 첫 발을 내딛게 되자, 모든 신자들의 가장 큰 생각과 가장 중요한 소망(所望)은
북경에서 새 목자(牧者)를 모셔오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도 성사(聖事)를 받을 수
있었던 신자들은 영혼(靈魂)이 거기에서 얻는 힘과 거기에서 받는 위로(慰勞)를 기억하
고 있었다.
여기에 대하여 이 은혜(恩惠)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은, 거룩한 시새움의 충동(衝
動)을 받아, 자기들도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잔치에 참여(參與)하기를 간절히 원하
였다. 한마디로 모든 이가 성직자(聖職者)를 진실히 그리워하고, 신부(神父)가 오기를
진심으로 열망(熱望)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計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李)여진 요한은 자진하여 북경
왕래(北京往來)의 위험(危險)을 무릅쓰고, 여행할 것을 맡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양반
계급의 신분(身分)을 숨기고, 자기가 그로 인하여 갖은 모멸(侮蔑)과 박대(薄待)를 받
아야 할 것을 일면서도, 사신행차(使臣行次)를 따라가는 상인(商人)과 하인(下人)들 틈
에 섞여가기로 작정하였다.
⑤ 지난날에 당한 재난(災難)과 배반(背反)으로 인하여, 좀 더 신중(愼重)해진 모모한 교
우들은, 이런 새로운 계획(計劃)을 짠다는 것과 거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內容)을 대부
분의 신입교우들에게는 알리지 않도록 일을 꾸몄다.
그러나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이익(利益)이 많이 나올 가망(可
望)이 있는 어떤 장사 일에 밑천을 대서, 필요한 자금(資金)을 마련해보려고 하였다. 그
러나 이 장사일은 결국 실패(실패)로 끝나고 투자(投資)한 밑천도 건지지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서울과 지방 교우(敎友)들의 아량(雅量)에 호소(呼訴)하였다. 이리하여 연기
(延期)하고 또 연기하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811년경에, 북경주교(北京主敎)에게
편지(便紙)를 보낼 모든 준비(準備)가 갖추어졌다.
위에 든 영향력(影響力)있는 신자들 외에도 이 일에 큰 몫을 차지한 사람으로는 귀양
살이하는 곳에서 이 일에 많은 기여를 한 조동진(趙東진) 유스티노와 내포(內浦)지방
면천(沔川)고을 사람으로 비교적 많은 물질적(物質的) 도움을 제공한 토마스를 꼽을 수
있다.
⑥ 이리하여 편지(便紙) 두장을 기초(起草)하였는데, 한 장은 지난 일을 소상히 밝힌 다음
조선의 신자들에게 신부(神父) 한 명을 보내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북경주교(北京主敎)
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교황(敎皇)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권(權) 요한이 교우들을 대표(代表)하여 이 편지들을 쓴 것으로 생각되는 바, 이 편지
에는ꡐ프란치스꼬와 다른 교우들…ꡑ이라는 서명(署名)이 적혀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편지(便紙)가 중도(中途)에서 혹시 압수(押收)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관헌(官憲)의 수사
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誘導)하기 위하여 가명(假名)을 쓴 것이리라.
⑦ 이 편지들을 지니고 이(李)여진 요한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또한 신자와 함께 사신
행차(使臣行次)를 따라 길을 떠나 무사히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디
에 가야 교우(敎友)를 만날 수 있을지를 몰랐고, 또 아무에게도 물어볼 생각을 못하였
다.
그러다가 담배 만드는 방법이 선교사(宣敎師)의 손으로 중국에 수입(輸入)되었었다
는 사실과, 처음에는 천주교인들이 담배장사를 하였다는 것을 상기(想起)하고, 담배장
사를 찾아 나섰다. 하느님의 섭리(攝理)로 그는 이러한 가게를 하나 찾아냈는데, 그 가
게 문에는 아무런 부적(符籍)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는 안심하고 들어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자, 이내 그 상인(商人)이 천주교인(天主
敎人)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李)여진 요한은 자기도 교우(敎友)라는 것을 밝히고, 주
교(主敎)에게 인도(引導)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⑧ 고베아(Govea) 주교는 이미 1808년 7월 6일에 별세(別世)한 뒤였다. 여러 해 전에 수자
․ 사라이봐(Souza-Saraiva) 요아킴 주교가 띠빠사(Tipasa) 명의주교(名義主敎)로 성성
(成聖)되어, 북경의 보좌주교(補佐主敎)로 임명되었었으나, 1805년에 박해(迫害)가 일
어나, 북경(北京)으로 들어올 허가(許可)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베아(Govea) 주교가 별세함으로 인하여 북경주교(북경주교)가 되었으면
서도, 자기의 주교좌(主敎座)가 있는 이 도시에 영영 들어오지를 못하고, 1818년 1월 6
일 마카오에서 별세(別世)하였다.
한편, 북경(北京)에서 전교하던 포루투갈 사람 라자지스트 회원(會員) 삐레스(Pires)
주교(主敎)는 고베아(Govea) 주교에게서 남경주교(南京主敎)로 성성(成聖)되었었는데,
이분도 박해(迫害) 때문에 남경주교좌(南京主敎座)로 끝내 가지 못하고, 말았다.
삐레스(Pires) 주교(主敎)는 그대로 북경(北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거기에서
주교직무(主敎職務)를 수행하였고, 또 수자 ․ 사라이봐(Souza-Saraiva) 요아킴 주교의
별세(別世) 후에는, 교황청(敎皇廳)으로부터 그 주교좌(主敎座)의 권한(權限)을 위임받
았다. 삐레스(Pires) 주교(主敎)는 1839년 11월 2일까지 사셨다.
이 이야기를 전개(展開)해 나가는 중에 가끔 북경주교(北京主敎)라는 명칭으로 불리
우는 성직자(聖職者)는 바로 이 삐레스(Pires) 주교(主敎)이다. 우리의 밀사(密使)는 이
주교(主敎)에게 인도(引導)되어 다음의 편지(便紙)를 올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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