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南洙주교(수원교구장)특별기고 / [상주데레사와 나] <下>
1)주교의 설립 신청서 2)단체 구성의 역사 3)설립자의 이력서 4)수도자의 수, 양성, 평판 5)재정 사정 6)기도서 7)주교들의 동의서 8)회헌 7벌 등을 제출해야 하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단체 구성의 역사였다. 黃 데레사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로 단체가 구성되었고 데레사 사건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徐 주교님의 금지 공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관계자는 "상관없으니 데레사 사건도 함께 함께 포함시켜서 단체 구성의 역사를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나의 동의요청 편지 내용과 徐 주교님의 동의를 보면 이미 徐 주교님도 수도원 설립을 동의하셨으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반대를 받았더라도 무슨 초자연적 동기가 있었어야 수도회가 제대로 발전하는 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로마의 요구대로 단체구성의 역사를 2장 정도로 작성하면서 "오래지 아나하여 성직자들이 독신제도의 위기를 당할 것이니 성직자들의 성화를
위하여 보속하며 기도한 수도회를 설립하라" 는 데레사의 묵시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1951년에는 대구 崔 주교님이 상주에 수도원을 세우라 하시고 1961년에는 徐 주교님이 鄭 신부를 동촌본당 신부로 임명하시고 수도원 설립을 허락하셨고, 1971년에는 안동본당에서 수도원 설립 준비를 하였던 것과 번번이 鄭 신부가 병환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옮겨 다니다 가 1976년도 부터 수원교구에 와서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첨부하였다. 그리로 주교님들께 보낸 나의 편지와 鄭 신부의 편지, 그리고 12명 주교의 동의서 5명 주교님의 회답없음을 보고하였다. 이런 사정을 다 알고 로마에서 수도회 설립을 인가하였지만 여러 교구에서 데레사 사건을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데레사에게는 많은 제재를 가하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러나 최근에 徐 주교님의 공문이 공개되고 미리내 수도회에 상처가 입혀지는 상황 속에서 이 사실을 공개 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법해석 원칙상 이로운 것은 넓게 해석하고 불리한 것은 좁게 해석한다는 원칙에 따라 수도회 창설과 같은 로마의 인준을 받는 행위는 전교회에 걸치는 것이지만 금명이나 처벌과 같은 불리한 조치는 처벌자의 관할권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따라소 소재나 대재와 같이 금하는 법은 지역적 제한을 받는다. 데레사에 관한 대구교구의 금명은 대구교구에서만 유효한 것이었고 다른 교구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가 처벌을 받고 부산에 가서 부산 주교의 특권을 받음으로써 나는 대구교구의 모든 제재에서 이미 면제되었던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徐 주교님이 鄭 신부에게 수도원 설립을 허락하신 1961년에 이미 데레사에 관한 금명은 취소된 것이고, 아니라면 적어도 鄭 신부의 데레사가 대구 대교구의 경제를 넘어 부산으로 갔을 때 이미 그 금명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黃 데레사가 받은 묵시를 중심으로 성경의 계시 중에서 묵시와 관련되는 내용들을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회헌과 데레사를 만들어진 회현과 데레사를 통해서 주어진 기도문들이 지도서에 다 포함되어 로마의 인준을 받은 것이다. 개인 묵시는 성경의 공적 계시와 부합되는 한 유익한 것이다. 개인 묵시는 성경의 공적 계시에 예속되는 것이지 위배되거나 새로운 것이 보태져서는 안된다. 한편 남자 수도회는 인원 관계로 더욱 늦어져서 1991년에 정식 수도회로 출범하였다. 수녀들은 벌써 12교구에서 사목자들을 도와드리고 있으며 남자 수도회는 미리내에 본원을 두고 대구, 부산, 대전교구에 분원을 두고 있다. 이제 막 자라고 있는 이 남녀 수도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기도와 성원을 바라는 바이다.
金南洙주교(수원교구장)특별기고 / [상주데레사와 나] <中>
며칠 뒤에 왜관 참사회가 열리고 "김남수 신부가 두았으니 교장직을 쉬게 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이 주교님은 나를 성주의 한 공소에 가서 쉬라고 하셨다. 나는 주교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공소에 가 있으면 상주패들이 소 잡고 돼지 잡고 나를 방문할 터이니 아주 멀찍이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주교님도 일리 있다고 판단하시고 그 날로 그곳에 다녀 오시더니 부산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1957년 성탄 전에 부산으로 가서 양정이란 신설본당 주임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일단 데레사와의 접촉을 끊고 9년 동안 보람찬 사목생활에 전념했다.
1966년 초에 나를 돌았다고 부산으로 보내셨던 왜관 이 주교님이 피정의 집을 지어놓고 다시 오라고 하셨다. 며칠 후에 수원 윤공희 주교님이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나의 갈곳을 내가 정하지 않고 두분께 의논해서 조처하시라고 맡겨 드렸다. 윤 주교님이 결정하신대로 나는 1966년 여름부터 1973년 10월까지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있다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에서 1년간 미사경본 번역에 전념했다. 그후 1974년 11월 21일에 수원 주교로 서품되었다.
# 미리내 수도회 설립에 관하여
수원교구는 서울에 인접한 지역이라 성지가 많은 교구이다. 그중에서도 성 김대건 신부님의 무덤이 있는 미리내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한때 3천명까지 이르렀던 미리내인데 모두 도시로 이주하고 백여명 교우 밖에 남지 않았다. 윤 주교님 시기에 이미 안성 대천동 공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지 개발을 위해 부산 가르멜 수녀회에 분원 설치를 요청하였는데 부산서는 좋아했으나 로마 본부에서 아직 인원이 분리하기에 모자라니 지금은 안된다는 회답이 왔다. 그러는 동안에 상주에서 崔德弘 주교의 허락으로, 대구 동촌에서 서 대주교의 허락으로 부산 광안리에서 최재선 주교의 허락으로 수도회를 설립하려고 하던 정행만 신부님이 수도회를 수원교구에서 설립하고 싶다고 찾아왔기에 미리내가 어떠냐고 했더니 성남이 좋겠다면서 8백평 정도의 땅을 사겠다고 했다. 나는 미리내 개발을 위해 그곳을 권했으나 굳이 성남으로 가겠다기에 허락을 하면서 우선 수도회를 설립하려면 주교님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므로 좀 기다리라고 해 놓고 가장 먼저 서 대주교님을 찾아갔다.
서 대주교님과의 대화는 상당히 오래 계속되었다. 서 대주교님과 다른 주교님들의 동의를 구하는 나의 공한을 여기에 소개하면 미리내 수도회 설립의 취지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1976년 1월 24일부로 주교님들께 보낸 공한은 다음과 같다.
제위 주교님께
상주 데레사 사건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입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섭리인지 아닌지는 각기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하느님의 특별한 뜻이라고 믿는 정행만(프란치스꼬) 신부님이 병환 중에도 수도원을 창설할 뜻으로 27년전부터 준비를 하여 왔습니다. 현재 식구 40명(남자 10명, 여자 30명)이 모여 있으며 수도복 받아 입을 날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니다. 그들 중 10여명은 초기부터 젊음을 고스란히 새 수도생활을 바라는 마음에서 백발이 되도록 공동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의 소청이 별지에 첨부되어 있사오니 한번 읽어 보시고 조국의 복잡한 여러가지 문제가 하느님의 특은으로 잘 해결되기 위해서 이 착한 영혼들의 소청을 들어 주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어 감히 제위 주교님께 동의를 청하오니 별첨 용지에 서명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수원교구장 김남수
이 공한을 들고 서 대주교님과 대화를 시작하였다.
"나도 정 신부가 수도원을 설립하도록 동촌본당을 맡기고 과수원도 매입하도록 했으나 병 때문에 다시 상주로 가서 휴양하면서 그 과수원을 처분하고 상주에 임야를 제법 크게 준비했습니다. 그후 안동교구가 서립되면서 상주에서는 수도회를 못하게 하므로 부산으로 갔으나 거기서도 실패하였습니다. 김 주교가 도와주면 수도원은 될 것입니다. 수도원을 데레사가 좌지우지하는 것은 안됩니다. 데레사를 따르며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람들이 복음 정신에 다라 수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데레사가 원장이 되면 안됩니다. 주교님이 주동 역할을 해 주시면 수도원은 될 것입니다.
정 신부님은 정말 열심한 신부입니다. 건강이 좀 염려가 되지만 주교님이 개입하면 성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서 주교님의 말씀 내용이었다.
나는 서 대주교님께 감사드리며 "저는 미리내 성지 개발을 위해 가르멜 수녀원을 청했으나 인원부족으로 안된다기에 정 신부님이 미리내에서 수도원도 설립하고 성지도 개발하도록 맡기고 싶습니다. 수도회 회헌도 복음을 중심으로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오. 금지공문을 내리셨던 대주교님께서 동의해 주시면 다른 주교님들께서도 동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하였더니 "그 때는 교구 신부들이 떠들어서 금지 공문을 내렸었지만 수도원 설립은 나도 원했던 것입니다. 복음 정신에 투철한 방인 수도회가 설립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언제까지나 외국수도회만 끌어들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잘해 보십시오. 잘 될 것입니다." 그날 나는 거기서 점심 대접까지 받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 대주교님 댁을 나섰다.
나는 일일이 주교님들을 찾아뵙고 12명 주교님의 동의를 받았다. 주교님들의 동의서와 함께 수도회 설립인가 신청서를 로마에 제출하였다. 소식이 너무 오래 없기에 직접 로마에 가서 알아 보았더니, 우선 40명의 서원 수녀가 배출된 후라야 정식 수도회 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신심 단체(Pia Unio)로 시작하되 기성 수도회의 수녀님 한분이 수련선생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1년간 미사신부로 있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일찍이 수련선생 경험이 있는 이 아녜스 수녀님을 파견해 주셔서 수련을 시작하고 그동안 1976년 말부터 1983년까지 수없는 로마와의 연락이 오가다가 드디어 1984년 2월 2일자로 '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를 창립하였다. (계속)
金南洙주교(수원교구장)특별기고 / [상주데레사와 나] <上>
세간에 오랫동안 잠잠하던 상주 데레사 문제가 대중매체에 오르내리면서 신자들의 의혹이 제기될 뿐 아니라 성청의 인준을 받고 이제 막 자라고 있는 남녀 수도회의 명예마저도 훼손되는 현실을 보고 당사자인 나로서 자초지종을 해면해야 하겠다는 책임을 느껴 이 글을 쓴다. 우선 데레사와 나와의 관계와 수도회 창립 경위를 알림으로써 모처럼 방인 수도회로 발전하는 수도회를 보호해야 하겠다는 책임을 느낀다. 나는로마 유학을 마치고 1953년 4월에 귀국하여 나의 장상인 연길 교구장 서리이셨던 李聖道 디모테오 몬시뇰(베네딕도회)이 원장으로 계시는 왜관으로 돌아와 순심 중고교 윤리강사로 있다가 고교를 분리하여 교장으로 봉직하게 되었다. 또 한편 대구 효성여대 독일어, 종교 과목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나흘은 왜관에서 사흘은 대구 주교관에서 기거하였다. 주교관 식당에서처음으로 상주 데레사 얘기를 들었다. 대개가 반대 이론뿐이었다. 그러나 많은 교구들이 데레사에게 영신지도를 받고 있었고 사제들은 물론이고 신자들 사이에서도 찬반 다툼이 심각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구 교구장 최덕홍 주교님은 그리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견지하셨으며 이미 상주에서 수도원을 시작하라는 허가를 주신 상태였다. 하루는 최 주교님이 부르시더니 정행만 신부는 朱在用 교구장 서리 때 당가 신부로 있었던 관계로 주 신부님을 모두 반대하는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주 신부님께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데레사 일과 결부시켜서 정 신부 반대 세력이 데레사도 반대하는 모양이니 나더러 데레사를 책임지고 지도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나는 데레사의 일은 깊이 모르고 있었으나 교우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이 심하다는 신부님들의 말을 듣고 대구 성모당에서 성모의 밤 강론 중에 "데레사 문제로 좀 시끄럽다는 말을 들었는데 믿는 사람은 행복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우니 교우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배척하는 일은 성모님의 자녀된 도리가 아닙니다"하고 언급하였다.
최덕홍 주교님의 분부대로 데레사를 상주에서 왜관으로 이사를 시키고 항상 몸이 편치 못해서 자주 미사에 나오지 못했으므로 아침마다 봉성체를 해 주며 그가 묵시받는 얘기도 듣고고통받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나에게 성소가 있으니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하며 성모님의 명이라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다. 나를 믿게 하려면 내가 믿을 수 있는 표를 청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주교님의 명을 받고 너를 지도하는 것이지 내가 네 지도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최 주교님의 명으로 데레사를 돌보고 있었으므로 내가 이상하게 여기는 사건들은 수시로 두 분 주교님께 보고하였다. 그때 보고드린 것들 가운데서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표를 달라고 성모님께 요청하라고 데레사에게 요구하였다. 나에게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한글로 '막냐 글로리아 에릿 인 꼬레아'='한국에 큰 영광이 있으리라'(Magna gloria erit in corea)라고 써주었다. 나는 즉시 이것이 라틴어인데 웬일일까 생각하면서도 데레사에게는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핀잔을 주교 이성도 디모테오 주교님께 보고를 하였다. 이 주교님은 "조심하시오. 마귀도 가끔 라틴어를 할 수 있지요" 하셨다. 나는 그대로 흘러버렸다. 둘째 표지는 성수가 포도주로 변한 것이었다.
예수 부활대축일 아침이었다. 전날밤에 축성된 성수를 병에 담아가지고 데레사에게 봉성체를 해 주러 갔었다. 데레사에게 성수를 뿌리고 성체를 영해 주고 성수병을 벽에 걸어 놓고 돌아왔다. 오후에 데레사를 간호하던 정 데레사가 찾아왔다. "아침에 벽에 걸어 놓고 가신 성수 색깔이 변했습니다" 하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헛소리 그만하고 그 성수를 가져 오라"고 하였다. 뛰어 가서 들고 온 병은 틀림없이 아침에 내가 가지고 갔던 병인데 속의 성수는 포도주색으로 변해 있었는데, 나는 정 데레사에게 "천정에서 무엇이 들어간 모양이지" 했더니 "병마개가 꼭 닫혀 있었는데요"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나는 "쓸데없이 또 사방팔방 선전하지 말고 잠잠하라"고 야단을 쳐서 내보내고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말간 물이 색깔만 포도주색으로 변해 있었다. 병이 투명해서 포도주 색깔을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나는 즉시 이 주교님께 드리면서 "이 성수를 한번 검사해 봅시다" 했더니 "한국에서는 조사하기가 힘들 터이니 스위스로 보내겠다"며 달라고 하시기에 주교님께 드리고 나왔다. 얼마 후에 물어 보았더니 "내버렸으니 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좀 원망스럽기는 하였으나 어른이 하신 일에 항의하지 않았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렀다. 대구의 최덕홍 주교님이 서거하시고 서정길 주교님이 부임해 오셨다. 대구 신부님들이 새 주교님께 청해서 데레사 문제를 심사하자고 건의한 모양이다. 새로 부임하신 서 주교님은 서 제브나르도 부주교에게 조사 위원 주선을 명하셨다. 나도 참고인으로 불리어 갔다. "데레사의 말 중에서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기에 "나는 고해 신부라서 깊은 얘기는 할 수 없지만 구호 물자를 팔아 먹지 말라는 말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로마에서 귀국해 보니 밀가루, 옥수수가루, 헌 옷 등이 구호 물자로 밀려오고 성당을 믿고 필요한 주민들에게 분배하라고 맡겨졌는데 신부님들이 팔아서 성당을 수리하고 공소를 짓고 하는데 이는 구호물자를 보낸 사람들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하엿더니 "누가 구호물자를 팔아 먹었단 말이냐?" 하기며 화를 내시기에 나는 "사실을 부정하는 심사관들 앞에서는 대답할 의무도 느끼지 못합니다"하고 물러나오고 말았다. 며칠 후에 "데레사 사건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는 서정길 주교님의 공문이 발표되었다. 서 주교님의 공문이 발표되자 나의 직속 장상이신 이 주교님이 나에게 데레사 지도를 금하셨고 데레사에게는 고해성사도 주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에 데레사가 고백소에 들어왔다. 나는 사죄권이 없으니 성사를 줄 수 없다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다른 신부님한테 고해를 해도 개운치 않아서 찾아왔으니 제 죄만 들어 주십시오. 제가 이 주교님한테 편지를 쓰겠습니다" 하엿다. 얼만 후에 이 주굔미이 나를 불러 "데레사에게 사죄경을 염해 주었느냐?"하고 물으시기에 "고해 비밀은 사죄경을 염했는지 안했는지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주교님도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는 것이 고해 비밀법입니다. 죄송하오나 저의 대답을 기해하지 마십시오"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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