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간의 기도 여정 <첫 주> ※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 예수께서 기도하셨고 기도를 가르치셨고 기도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예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며 그리스도인이란 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과 가르침, 행적을 통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분의 얼굴을 알게 해주시고 하느님과의 친교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의 삶 속에 기도가 차지하는 부분은 상당합니다. • 사실, 예수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대화, 친교 속에 사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요한 8, 28)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요한 14, 10) • 하지만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 “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고…….” (마르1, 35) “ …산에 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다.” (루가 6, 12) “ …기도하러 산으로…….” (루가 9, 28)
2.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기도해야하고(마르 14, 38) 기도하지 않고서는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마르 9, 29참조)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느님께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마태 7, 7-11)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명하셨다면 이것은 기도가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3.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마태 6, 6)
이 가르침에서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첫째로 기도는 아버지와의 대화라고 말씀하십니다. • 인격적 대상이 있는 ‘나-너’의 만남입니다. • 애정이 깃들어 있고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와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무엇보다도 인격적이고 애정적인 만남의 체험입니다. 이 만남을 우리는 친교, 나눔, 두 현존, 관계맺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생존) 욕구들 가운데 하나가 이 친교입니다. 친교가 단절되면 살맛을 잃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 교도소 형벌로 독방생활을 들 수 있고 심지어는 자살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려합니다.(자살 사이트) 친교가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필요성)로 자리하는 까닭은 우리가 친교의 하느님에게서 친교를 위해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친교의 뿌리는, 그 완성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모두(비 신앙인까지도)의 마음속에는 기도의 자리, 하느님과 만나는 자리, 하느님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시편작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시편62)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영혼의 안식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다른 것으로 대치시키면 목마름은 심해지고 안식은 없습니다. 반면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면 다른 모든 관계 맺음(친교)은 제자리를 찾고 맛을 얻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 말은 친교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는 믿어야할 교리라기보다 참여하고 체험해야할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삼위가 하나가 될 만큼 깊은 친교의 상태에 계시는 하느님을, 그 현존을 마주대하고 만나는 것, 이 삼위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내 삶의 현실을 이탈하여 천상적 현실에 들어가 편안함과 황홀함을 맛보고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나면 삶을 나눕니다. 삶 속에서 겪은 좋은 일, 궂은 일…… 그에 따른 기분이나 생각, 계획, 바램을 나누고 특히 최근에 겪은 일들 중에 마음에 남아있는 것을 나눕니다. 만남이 깊으면 나눔도 깊고 나눔이 깊어질수록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남남이 만난 부부이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면 서로 닮습니다. 취향은 물론 외모까지도……. 친한 친구끼리는 자매 같다는 표현을 듣게 됩니다. 같은 수도회 회원들끼리 서로 닮습니다. 같은 행동양식을 갖습니다. 기도한다는 것도 이와 같이 나의 삶을 하느님께 보여드리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 즉,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단절된 추상적인 느낌, 기분만 따르는 기도는 헛된 것이며 거짓된 기도입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7, 21)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면 새 역사(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성서는 바로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의 기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삶 안에 개입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를, 하느님의 현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가져가야할 두 권의 책은 ‘나의 삶’이란 책과 하느님을 만난 인간과 하느님을 찾아 만나게 해주는 성서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백성의 삶과 예수의 삶을 읽고 듣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삶을 위한 빛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잘 살기 위해서, 성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를 위한 실제적인 조언 -. 하루 중 가장 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 기도에 도움이 되는 자세를 취하십시오. 기도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 하루생활 중 무엇이 가장 마음에 남아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하느님과 대화해 보십시오.
8주간의 기도여정 (둘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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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천사비나 (작성일: 2006-10-18 오후 10:02:17 , 조회: 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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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주> ※골방에 들어가기1(침묵이라는 문턱)
지난 번 모임에서 기도란 첫째로, 아버지와의 대화, 인격적이고 애정적인 만남의 체험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기도하여라.……” 둘째로, 기도하려면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깊은 얘기, 진지한 대화는 분위기(환경)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외딴 곳’이나 ‘산’에서, ‘먼동이 트기 전’에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는 들려줍니다. 골방은 외부 인이 쉬이 접근할 수 없는 구석진 방으로 외부와의 단절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골방은 단순히 외적 환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영성가들은 이 골방을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 보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 내밀한 곳에서 아버지와 단 둘만의 만남을 권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그곳에는 아버지와의 친밀함이 존재하는 곳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 이야기 하나 : 빵장수 야곱.........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안은 더러움이 쌓이고 무질서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아,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마태 23, 25-27) ※어떻게 해야 골방에 들어가 아버지와 깊이 만날 수 있을까요? 먼저 빈말을 하지 말아야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 7) 언제 빈말을 합니까? 우리들의 대화에서 언제, 무엇을 빈말이라고 합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때입니다. 건성으로 경솔하게 말할 때입니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이사야 29, 13)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말(기도)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내 속생각과, 그 지향과 같아야합니다.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 역시 내 마음에서 되울려 듣지 않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활자에 불과합니다. 깊은 대화는 본래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이 대화 역시 마음(골방)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첫 깊이는 빈말을 하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의 골방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넘어서야할 문턱이 있습니다. 침묵입니다.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나의 일방적인 말만의 기도, 경솔한 빈말의 기도만 있을 뿐입니다. 침묵 그 자체만으로는 기도가 아니며 쓸데없는 풀만 무성히 자라날 수가 있는 빈 땅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의 현존으로 차있고 나도 온전히 현존할 때 침묵은 기도입니다.
※ 침묵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준비 침묵, 듣는 침묵, 사랑의 침묵입니다. 1. 준비 침묵 : 자신을 침착하게 가라앉힙니다. 자신의 일상사를 떠납니다. 모든 소음- 생각, 상상을 잠급니다. 이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이 있는 침묵, 기도에 들어서기 위해 넘어서야할 문턱입니다.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1열왕기 19, 11-13) 소음에 익숙해져있는 우리에게 침묵의 문턱을 넘어서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앞서 말한 대로 ‘골방’에 들어서서 우리 안의 무질서와 맞대면해야할 두려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두려움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 자녀라는 우리의 신원을 잃은 탓입니다. 아이들에게 정체성(자아의식)은 언제 생겨납니까?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언어로 여러 몸짓으로 표현된 사랑을 통해서 ‘내가 누구’라는 의식, 정체성이 생겨납니다. 외부에서 메시지를 받아야 자의식과 자존감은 생겨납니다. 예수께서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야 43, 4)라고 일찍이 고백해 오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는 사랑의 눈길이 필요한 줄 예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눈길에 따라(보이려고) 살면 위선(거짓)에 빠지게 되지만 하느님의 눈길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냅니다. 하느님의 눈길 아래 머무를수록 그분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확고해집니다. 지위나 지식이나 재물,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들로 자신을 치장하고 과시해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사랑을 조건 없이 베푸시는 아버지라고 믿을 수 있으면 감출 것은 없어집니다. • 이야기 둘 : 어릴 때 기억-사랑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20여 년 전, 40일간의 피정(사막) 때에 자신의 선함이나 악함이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히 깨닫게 된 어느 날이 있었습니다. 그 체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세례를 받아서……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4, 6) 이 하느님 사랑의 눈길과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골방으로 초대되었습니다. 기도를 위한 실제적 조언 -. 하루 중 가장 나은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성령을 간구하고 머무십시오.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자녀의 정으로 하루의 삶을 말씀드려 보십시오. 나의 삶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 애정을 담아 말씀을 듣는 듯이 읽으십시오. (그날 독서나 복음)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받으십시오. -. 기도 후에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결심을 하십시오. 그 결심에 대해 하느님의 도움을 간구하십시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