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종교(학)에 관하여

[스크랩] 칼 라너의 종교 신학

손드러 2010. 1. 21. 12:51

칼 라너의 종교 신학

 


이찬수(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초월론적 신학\'(transcendental theology)으로 하느님과 온 인류의 원천적인 연결성을 설명하고, 그 신학의 자연스런 산물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론으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의 관계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규명한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종교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라너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종교간 다원성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지 검토함으로써 현종교 상황에 대한 한 가지의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우주 중심적 세계\'(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중심적 세계\'(안셀모, 토마스 데 아퀴노)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로의 전환을 이룬 근대의 상황을 반추하면서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이 신학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에 선행하여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온 인류에게 자신을 이미 내주셨다는, 즉 은총을 베푸셨다는 선험적 진리를 인간의 주체성 안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전하면서도 조건 없이 자신을 인간에게 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실존론적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분, 종파에 관계없이 하느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디모 2,4) 하느님의 보편적 인간 구원 의지의 구체적 표현이다. 라너는 하느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 만일 이 구원 의지가 널리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전체 인류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여전히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느님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보통의 평균적인 인간에게도, 보기에 시야가 놀랄 만큼 좁고 인생을 고생스럽게 겨우 연명해 나가는 사람에게도, 고생스럽게 긴박한 생활고로 시달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 마당에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너는 묻는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아주 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수히 많은 형제들(고생물학은 이들의 지평을 계속 확대시키고 있다.)은 물론 현재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무수한 형제들의 무리가 원칙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충만한 삶으로부터 제외되고 영원히 무의미성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이 한시라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스스로를 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또 구조론적으로 아무런 차별 없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의 이와 같은 상태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했다. 그리스도교적이긴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이다.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묘사하려 들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 불려야 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시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
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과소평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오롯이 보전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형제적인 자세로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너는 생각한다.

3. 그리스도론

이와 같은 논의는 \'초월론적 신학\'의 자연스런 결론이다. 라너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칙적인 연결성,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밝히기 위해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주신다. 하느님을 받아 모신 인간은 신적인 본성으로 성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본성상 반드시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자 한다. 인간의 초월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역사적으로 중개된
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의 육화\'이다. 라너에게 \'육화\'란 말씀의 외적 표현이며,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주시는 수단이다. 이런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개들 가운데 라너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본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며 살고 있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이고도 논리적인 완성이며, 인간 존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의 실현이자, \"인간 실재의 본질이 전적으로 현실화한 유일하고도 최상인 예증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말씀의 육화의 전형을 예수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를 앞당겨 실현한, 결정적인 말씀의 육화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고, 그렇게 고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대립되지 않을 뿐더러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가능한 형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맏이이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궁극적이면서 명백한 완성\", 즉 예수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루어진 완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아우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시되고 예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고 라
너는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참사랑이자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근본적 단일성을 성립시켜 주는, 그러한 사랑의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예증이므로 라너에게 이 하느님 사랑, 예수 사랑, 인간 사랑은 동일한 뿌리를 가지면서 서로를 조건 짓는다.

4. 교회론

이런 인간 규정은 그의 교회론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속이고...우리 역사 내에서의 그의 영원한 가시적 현존이며.... 세계 안에서의 그의 계속적인 역사적 현존\"이다. 한마디로 교회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신비\'인 탓에 유형적 틀로 제한될 수 없고, \'구체화\'인 탓에 우리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다. 교회란 제도도 아니고,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가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공동체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으로 표현되는데, 건물 자체에 제한되지도 않고 제한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의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사실상 별의미가 없다. 교회의 안과 밖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교회의 범위도 정확히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교적상으로나 인습상으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종교 사회학적으로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두 부류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종교 사회학적인 우연한 요인에 있으며 신학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는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

이 마당에 가시적 교회 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뭐 그리 결정적이랴. 그보다는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bona fide)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일 수 있다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교회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도 타당하고,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5.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교회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성,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타종교인에게 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가? 이런 문제들을 두고 여러 학자들이 라너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한다. 가령 한스 큉(Hans Ku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폴 니터(Paul Knitter)나 존 힉(John Hick)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왜 신실한 타종교인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는 수구적 의미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런데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그리스도\',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서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등의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교회 안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시키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람들을 가시적, 유형적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될 뿐더러, 만일 그러고자 했다면 굳이 \'익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리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라너는 교회의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과제는 단순히 인간들의 \'그리스도인화\'에만 결부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의 교회의 여러 제도-이들이 아무리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밖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교회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아 파견된 바 있다고 해서 교회의 가견적 형태 밖에는 구원이란 없으며 세계의 점진적 구원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새로운 그리스도를 얻는 일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뜻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기보다 세계 도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인에게 뚜렷이 밝혀 주는 증인들을 얻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과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코 타종교인들을 가시적 교회 안으로 몰아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휩싸여 사는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모시고 사는 고귀한 존재임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바, 보다도 무한히 더 큰 존재임을, 가이없는 자유와 행복을 지니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인간임을\" 밝혀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불교에서 중생이 부처라는 선험적 원사실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세파에 휩쓸려 때에 찌든 중생이 그 자체로 부처라는 말씀을 두고 도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 미천한 것을 어떻게 거룩한 부처님과 동등하다 할 수 있느냐 따진다면, 그것은 온갖 분별지를 타파하는 불교적 진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라너도 이미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온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줌으로써, 종파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본래적 고귀함, 원천적 하느님의 자녀됨을 교회안에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범위를 줄여서 그리스도교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넓힘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려는 라너의 신학적 노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6. 종합적 반성

하느님의 은총은 특정 종파에 속한 의인에게만이 아닌, 절대적으로 모든 이의 구체적 실존에 현존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신적인 생명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바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 하느님 자신이 언제나 인간의 일상 안에, 인간의 깊은 자아 안에 머물러 계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구체적인 역사의 범주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일상사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무리 일상의 언어 안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는, 언제나 더 넓고 깊은 분이다. 하느님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비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에는 우리의 개념, 언어가 너무 짧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 하느님 체험을 표현할 때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는 저렇고\"내지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 역시\"와 같은 상호 보완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라너는 지적한다. 심지어는 대립적인 개념들마저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표현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
데는 언제나 긴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마당에 서술된 것보다 언제나 넓고 깊은 하느님과 그에 대한 표현을 혼동할 수 없으며, 또 표현 자체에 얽매일수도 없다. \'익명\'이란 말마디에, 라너가 선험적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말 자체에 매여,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서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불교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주는 예수는 대자 대비한 보살의 다른 표현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교인\'이라고 명명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건데 \'불자\'(佛者)라는 낱말 자체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생생하게 살려 내려는 것일 뿐 불자, 모슬렘, 힌두인이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수용해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야말로 종파에 관계없이 이미 신화(神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타종교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익명의 그리스도인(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나 가능한, 그리스도교에만 적용되는 표현이지,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일반 규정은 아니다. 비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신학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종교들을 깎아 내린다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며 라너에게 가한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종교를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전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을 뿐인 것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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