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의 평화 신학 유정원(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머리말
한스 큉(Hans Kung)은 1928년 스위스 수르세에서 태어나 1948-1955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5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5년 파리 소르본느 대학과 가톨릭 대학에서 공부하고 1957년 가톨릭 대학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2년에는 요한 23세가 공의회 신학 자문 위원으로 지명하여 활약하였고, 1963년 이래로는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과 교회 일치 신학 교수 겸 일치운동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다. 그는 다양하고 복잡해져 버린 이 땅에 일치와 평화를 위한 실천과 신학이 절실하고도 시급하게 요청됨을 절감하여 이를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다.
오늘의 복잡하고 바쁜 현실은 현대 과학 기술 문명에서 비롯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 시대는 점점 더 그물처럼 복잡하게 연결되고 얽혀서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중심적인 세계가 되었다. 우리는 자기가 속하지 않은 사회와 교류하고 색다른 문화를 접하며,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살고 있다. 한스 큉은 이런 세계에 걸맞는 질서가 당연히 필요하다고 보고 이에 토대가 될 새로운 윤리를 구상한다. 아래의 6가지 새로운 질서는 한스 큉이 말하는 평화 신학의 토대를 이룬다.
첫째, 사회적인 세계 질서이다. 한스 큉은 '자유만이 아니라 정의도'라고 말하면서, 현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서로 연대하여 공존 공생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자고 가다.
둘째, 다원적인 세계 질서이다. '동등성만이 아니라 다원성도'라는 표어에서 드러나듯이 현재 우리들은 세계의 전통과 민족 문화 간의 화해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기와 다른 전통과 문화를 인정하는 노력, 즉 다원성을 끌어안는 길을 함께 찾자고 한다.
셋째, 동반자적인 세계 질서이다. '형제애만이 아니라 자매애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억눌려 왔던 여성을 존중하고 여성들의 자리를 찾아 줌으로써, 교회와 사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새롭게 쇄신하여 참다운 공동체를 이루자고 제안한다.
넷째, 평화를 증진시키는 세계 질서이다. '공존만이 아니라 평화'가 이 땅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끊일 새 없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내 민족이 잘사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 함께 손잡고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지구촌의 공동체를 이루자고 한다.
다섯째, 자연을 보호하는 세계 질서이다. 경제 제일주의에 도취하여 살아온 현대인들은 '생산성만이 아니라 환경과의 연대성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창조물과 인간이 더불어 사이 좋게 공동체를 건설하는 길을 찾자는 것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는 인간만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이 존중되어야 한다.
여섯째, 일치를 이루는 세계 질서이다. '관용만이 아니라 일치도'생각해서 서로에게 사랑과 자비로 다가서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신 예수의 복음과 다름없다. 부단한 용서와 자기 쇄신을 통해 온 마음으로 하느님 바라기를 하는 공동체를 이루자고 한다.
이처럼 평화와 일치는 오늘날의 다원 현상을 넓은 시야와 열린 가슴으로 끌어안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한스 큉은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인이 이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복음화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땅의 소리, 삶의 진솔한 외침을 듣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 다른 종교에 앞선 그리스도
한스 큉이 다원 세계에 어울리는 신학을 구상하면서 가장 먼저 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그리스도는 비판적 촉매로써, 그리고 세계 종교들의 종교적, 윤리적, 명상적, 금욕적, 미학적 가치의 구체적 정점으로써, 용납과 거절의 변증법적 일치 안에서 세계 종교들에게 봉사해야 한다.... 배타적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포용적인 보편주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분명하게 독특함을 선언하게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목적이며 모든 신앙인들의 결정적인 모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의 신학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규범과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는, 다른 종교가 오로지 비판적인 촉매제로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근대의 기술 세계'에 적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2000년 이래 그리스도교의 원천으로 인정받아 온 신약성서의 모든 진술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는 전체 신약성서를 위해 규범적이고 결정적이다. 예수만이 하느님의 그리스도이고-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략한 신약 성서의 신앙고백-예수만이 '길,진리,생명'이다."
한스 큉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충실하고 최종적인 계시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규범이 되는 계시라고 말한다. '비판적 초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이 세상, 하느님과 그리스도교인들, 그리고 그뿐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까지도 사랑의 끈으로 맺어준 분이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가 얼마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 그 타당성을 판결하고 그들을 완성으로 이끌어 주는 마지막 규범이다. 비록, 다른 종교들이 나름대로 좋은 뜻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완전해진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스 큉은 이러한 맥락에서 "모든 것이 아드님께 굴복하게 되면 그 때는 아드님도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 몸소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고린 15,28)라는 성서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들의 어떤 구원자보다 그리스도가 앞서 있다는 주장을 하는 한스 큉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배타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종교 신학자인 폴 니터나 존 힉을 비판한다. 한스 큉은 그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닌 규범을 포기하고 마호메트, 고타마 붓다, 크리슈나, 공자 등을 예수와 동일한 의미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평가 절하시켰다고 본다. 예수를 '주 황제'나 '주 고타마'와 같다고 보아 신약성서가 요구하는 신앙의 확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폴 니터나 존 힉의 입장이 비그리스도교적이라고 한스 큉은 지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잣대임을 포기하라는 듯이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즉 마호메트, 고타마 붓다, 공자나 크리슈나를 예수와 똑같은 의미의 그리스도로 믿거나, 그들과 예수를 맞바꾼다면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진리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이것을 그가 1963년에 쓴 글인 "이교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모든 종교는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진리를 여러 가지로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길에서 구원받는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면 그만이다.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은 없다." 이 의견에 대해서, 우리 그리스도교인이 믿는 것은, 인간은 부처나 마호메트나 그 밖의 여러 예언자에 의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인만 구원받는다. 그리스도교 안에만 진리가 있다. 은총은 교회 안에만 있다."라는 말에 대해, 그리스도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다."
2.종교간의 대화
다른 종교의 구원자들에 앞서서, 그들을 재는 잣대이며 그들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종교와 만날 수 있다는 한스 큉의 그리스도론은 그의 대화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종교도 자기네의 특유한 진리 기준으로 다른 종교를 평가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한스 큉에게 있어서 대화란 단순히 자기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타인과 대화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비판하고 반성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러 나 이 비판은 우선 자기가 속한 종교를 위한 것이지 결코 다른 종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거나 포기한다면 이것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대화라고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메시지를 놓치고 무엇으로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스 큉은 종교 다원주의자들에게 묻는다. 다른 말로 만일 종교간의 대화에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성서를 포기한 채 다른 종교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과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면, 이것은 마치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자신의 경전에 의지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고 한스 큉은 지적한다. 이런 대화에서 진정 무엇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서 있는 곳,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제쳐놓고 만난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한스 큉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이 참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진리를 고수할 태세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참으로 이해하고 따를 때, 불자라면 부처의 뜻을 참으로 보고 실행할 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신이 믿는 진리라고 솔직하게 열어 보일 때, 참된 대화는 이루어진다. 또한 그리스도교인은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은 동시에 현대 다원 현상 안에서 자신의 진리 고백을 포기할 권리 역시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다른 종교를 거짓이라고 배척하고 매도해서는 안된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새롭게 이해하고 선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거나 게울리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가에 대해 그 어느때보다 더 열심히 밝혀야 한다. 그리스도교인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데서 벗어나, 다른 종교에게 최대한으로 자신을 열어보이고, 비판하도록 하는 것이 결코 자신의 고유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종교간의 대화에 참여하는 자에게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요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가지 한스 큉의 대화론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종교가 지니고 있는 규범적이고 결정적인 것을 포기할 때,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참된 대화는 경직된 자세를 떠나 자신과 상대방을 키우고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에 따라,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과제로부터 출발해서 끊임없이 고민함으로써 참된 그리스도교인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로부터 배워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교 전승 밖에서도 일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 역량은 평화 역량을 내포한다고 한스 큉은 말한다. 다른 종교 앞에 겸손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다가서서 대화해야 하는 것은 모든 종교 전통들이 각각 걸어온 실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다. 참 평화는 고뇌하는 인간의 숨결, 시행 착오를 거듭하면서도 새로워지는 공동체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3.평화 신학과 새로운 교회
참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한스 큉에게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를 구상하게 한다. 전통을 가장한 구습이라는 편안한 안식처에서 떠나지 못하고, 이 시대의 아픔과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신학과 교회는 더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전망하지 않는 종교는 더 이상 삶과 이웃을 향해 영감을 불어넣을 수 없다. 이러한 직관은 한스 큉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교회를 바라게 한다. 한스 큉은 창조적이고 구체적인 평화 신학을 다음과 같이 구상해 본 다.
첫째, 새로운 신학은 신학적 근본 연구에 대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신학이어야 한다. 신학적 근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처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메시지의 중심인 하느님 나라의 의미, 이웃의 의미, 사랑의 의미를 오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신학은 잘 정리된 사고와 행동 구조의 배후를 캐묻는 신학이어야 한다.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그저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묻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처신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신학이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신학은 종교 안에 그리고 종교들 사이에 내재하는 핵심적인 차이점을 파악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무조건 다르다고 배척하거나,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다는 식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넷째, 새로운 신학은 모든 측면에서 자아 비판과 자아 수정을 요구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자신이 믿는 진리만이 절대적이라는 사고 방식을 벗어나 오직 하느님만이 절대적인 분이고, 이 절대적이라는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임을 자각하는 데서 올바른 자아 비판과 자아 수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의 신학을 계속 세워 나가면서도 개방적 자세를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평화를 창조적으로 이끌고 구체적으로 드러내려면, 삶의 소리를 듣고 이에 답하기 위한 아주 필수적인 구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이 구상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살아나가는 교회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한스 큉은 새로운 교회를 통해 평화 신학을 실천해야 한다도 주장한다.
먼저, 새로운 교회는 새롭게 다가오는 정신적, 종교적 도전에 대해 교계 제도적, 관료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문제 의식에 가득차서 반응하는 교회이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악을 율법에 사로잡혀 있던 바리사이들처럼 제도적이고 관료적인 틀로 막으려 하기보다는, 그 현상 배후의 근본악을 직시하고 과감하게 뿌리뽑는 데 앞장섰던 예수를 닮은 교회이다. 둘째, 새로운 교회는 중앙 집권적으로 조직되는 교회가 아니라 다원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미 나누어질 대로 나누어진 사회와 인간 삶을 억지로 한 통속으로 묶어 놓고 명령 체계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하느님의 백성임을 밝히셨던 예수처럼 다원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이에 맞는 구조 속에서 이웃과 사랑의 의미를 밝혀 주는 교회이다. "바깥 사람에 관한 말씀"(마르 9,38-41)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하는 사람"(루가 9,49-50)이라는 말씀은 그 좋은 예이다. 교회 밖에서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예수가 인정했던 것은, 그들이 결코 자기에게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쓸데없는 간섭이라든가, 그들의 그릇된 사명감이라든가, 또는 그들의 명예심이나 지나친 열광적 정열 등으로 해서 제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임을 헤아리셨던 처신이라고 한스 큉은 해석한다. 셋째, 새로운 교회는 교의적이 아닌 대화적인 자세를 취하는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메시지를 제자들과 삶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대화하고 함께 사는 가운데 전해 준 것처럼, 오늘의 교회도 생생한 현장 체험 속에서 우러난 복음적 삶을 나누는 가운데 세워져야 한다. 넷째, 새로운 교회는 자만 자족하는 교회가 아닌 신앙의 모든 회의에도 불구하고 자아 비판적으로 그리고 개혁적으로 미래의 물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이다. 율법에 갇혀 그것을 지키는 것만이 전부인 양 처신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거스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몸소 보여 준 예수, 이로 말미암아 그 새대 기득권자들로부터 버림받아 죽어간 예수,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던 예수이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맺음말
종교는 참된 인간성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근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모든 종교가 실현해야 할 최소한의 요구이다. 참된 종교는 참된 인간성을 완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은 절대자 안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이종교와 인간의 삶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들은 이런 까닭에 자신의 조직과 교리에 연연하여 가장 중시해야 할 인간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종교 분쟁의 대부분은 자신의 종교조직을 양적으로 확대시키고 다른 종교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어리석은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인간 중심이 아닌 조직 중심의 종교 역사, 종교라는 이름하에 인간을 희생시켜 온 분쟁의 역사를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로써, 종교들간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참된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고 그 결과로 철저하게 변화해야 한다. 의식의 변화, 심리적 태도의 변화, 전체적인 정신 상태의 변화, 인격의 핵심, '마음'의 변화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변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메세지의 핵심을 이루는 회심이다. 아울러 사회의 변화, 구조의 변화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상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혼자 회심한 후 사랑으로 가득 차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사회라는 구조와 이웃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느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회가 부조리와 불화로 덮여 있는데, 혼자 깨끗하고 평화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해준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다른 신앙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고,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모두 풍요로워지는 대화는 종교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종교 평화는 곧 세계 평화를 위한 절대 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한다. 따라서 한스 큉은 "종교 대화 없이 종교 평화 없다.",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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