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정해박해(丁亥迫害) ― (Ⅱ)
1827년의 박해 : 대구(大邱)와 단양(丹陽)의 증거자
김(金)호연 바오로의 순교 ― 황석지(黃石之) 베드로의 순교 ― 개요(槪要)
1. 1827년의 박해(迫害)
① 비록 박해(迫害)가 전라도(全羅道)에서 맹위(猛威)를 떨쳤으나, 2개월 이상은 이 도(道)에 집중(集中)되어 있는 셈이어서, 다른 지방(地方)의 교회(敎會)는 그해 4 월 22일까지는 무사(無事)하였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무렵에 전주(全州)의 포졸(捕卒)들이, 경상도(慶尙道) 지경(地境)을 넘어 상주(尙州)고을로 들어가서, 신태보(申太甫) 베드로를 체포(逮 捕)하였고, 2일 후에는 또 다른 포졸(捕卒)들이 같은 고을의 앵무당이라는 마을 에 가서, 밀고(密告)를 당한 다른 신자(信者)들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신태보 (申太甫) 베드로가 잡혔다는 소문(所聞)이 쫙 퍼진 뒤라, 신자(信者)들이 모두 도 망친 까닭에 그날은 아무도 잡지를 못하였다.
그때의 상주(尙州)의 사정(事情)이 어떠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으나, 일 이 진행된 사실을 이렇게 공식적(公式的)으로 알게 되고, 또 아마 전라도(全羅 道)의 관헌(官憲)들이 큰일을 하는데 자극(刺戟)을 받아서, 자기들도 예수 그리 스도의 제자들을 괴롭히는 공을 세우고자 한 것 같다.
② 어찌되었든 4월 말 경에 신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 너 댓 군데가 포졸(捕 卒)들의 엄습(掩襲)을 받았다. 신입교우 중에서 날쌘 사람들과, 약은 사람들은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집과 길에서 붙잡혀, 상주(尙州)
감옥(監獄)에 갇혔다.
여기에서도 많은 배교자(背敎者)가 생긴 것을 원통(冤痛)하게 생각하지만, 그 래도 용감(勇敢)한 증거자(證據者)와 웅변의 호교자(護敎者)를 몇 명은 발견할 수가 있다.
2. 대구(大邱)의 증거자들
1) 박보록(朴甫祿) 바오로와 아들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① 도항이라는 관명(冠名)으로 불리기도 하는 박(朴)「경화」보록(甫祿) 바오로 홍 주(洪州) 지방 양반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제법 많은 재산(財産)이 있었고, 같은 고을 사람들로부터 존경(尊敬)을 받고 있었는데, 1792년경에 천주교에 입 교(入敎)했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얼마 되지 않아 1794년의 박해(迫害)중에, 아직 예비신자(豫備信者)였던 그는, 마음이 약하여 배교(背敎)한다는 말을 하고서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 음이 참으로 곧았기 때문에, 이 실패(失敗)는 그에게 있어서 열심을 배가(倍加) 시키는 기회(機會)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뉘우치는 마음으로 본분(本分)을 더욱 철저하게 지키기 시작하였고, 또 고향(故鄕)에 있으니까 천주를 섬기는 데에 많은 지장(支障)을 받게 되었으므로, 재산(財産)과 일가친지(一家親知)를 버리고, 산중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거기에서 는 자기의 태생(胎生)을 숨기고 주인 행세를 하며, 세속(世俗)의 근심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기 영혼(靈魂)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沒頭)하였다.
②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자, 그에게서 성세(聖洗)를 받고, 그날부터 새사람이 되었다. 그는 즐겨 그윽한 곳을 찾아가 정한 시간에 기도(祈禱)와 묵상 (黙想)에 몰두(沒頭)하며, 나머지 시간에는 성경(聖經)을 읽어, 자신의 지식(知識) 을 넓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천주교의 진리(眞理)를 설명(說明)하여 주려고 하였 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참으로 자기를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하며, 그의 말을 경청(敬聽)하러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자녀(子女)들을 가르치는 데에 가장 큰 정성(精誠)을 기울여 기도(祈禱) 하는 것을, 신자(信者)로서는 모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라고 이르 며, 덕을 닦으라고 끊임없이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의 모범(模範)은 이런 충고 (忠告)를 더욱 효과(效果) 있게 하였다.
③ 1827년 전라도(全羅道)에 박해(迫害)의 선풍이 몰아치는 것을 보고, 박보록(朴甫 祿) 바오로는 힘써 교우들을 위로(慰勞)하고 안심시키며, 천주의 성의(聖意)에 완전히 맡기라고 이르며, 마음으로는 각기 순교(殉敎)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육 신(肉身)을 위해서는 할 수 있으면 피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賢明)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자기 자신은 죽음을 준비(準備)할 생각밖에 없었으나, 가끔 병으로 누워 있을 때에, 아들과 집안 식구들을 안심시키고, 걱정을 아주 없애주려고,
?염려 마시오. 당신들 앞에서 죽지는 않을 터이니.?
하고 말하였는데, 아무도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9년 동안 살던 단양(丹陽)고을 산골의 가마기를 떠 나, 가족을 데리고 상주(尙州)고을 멍에목으로 이사(移徙)하여 사는지가 몇 주일 밖에 안 되었었는데, 4월 그믐 예수 승천대축일(昇天大祝日)에 그의 가족과 이웃 신자들이 모여 첨례(瞻禮)를 보고 있을 즈음에, 배신자(背信者) 하나가 포졸(捕 卒)들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거의 다 체포(逮捕)했다.
그들이 읍내(邑內)로 끌려가는 동안,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우리가 오늘 가는 길에 대해서 천주께 감사를 드리자.?
고 말하며,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이것으로 포졸(捕卒)들은 그를 지도자(指導 者) 중의 하나로 알게 되었고, 형벌(刑罰)을 가할 때에도 이 죄상(罪狀)을 가중 (加重)하는 사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④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영장(營將)의 항례적(恒例的)인 질문에 대부분 대답을 못하게 되자, 고령(高齡)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고문(拷問)을 당하였다. 고문을
여러 번 되풀이하자,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내 육신은 관장의 손에 맡기고, 영혼은 천주의 손에 맡깁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옥으로 다시 끌려가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이내 교우(敎友) 들을 격려(激勵)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보살펴주기 시작했다.
다시 진영(鎭營)에 불려 나가서는 고문(拷問)을 당하는 중에, 첫 번과 같은 항 구심(恒久心)을 보여 주었다. 형리(刑吏)들은 그의 뺨을 치고, 수염을 잡아 뽑고 천만가지 욕설(辱說)을 퍼붓기를 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박보록(朴甫祿) 바오로 는
?이런 고통은 은혜이니 천주께 감사한다.?
고 말할 뿐이었다.
이렇게 몇 번 더 그의 결심(決心)을 흔들어 보려고 하다가 소용이 없게 되니,
영장(營將)은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를 대구감사(大邱監司)에게 보냈다. 감사(監 司)는
?이 수많은 죄수들이 너로 인해 현혹(眩惑)되었으니, 너는 마땅히 더 중한 형벌 을 받아야 한다.?
고 말하며, 훨씬 더 무거운 고문(拷問)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박보록(朴甫 祿) 바오로는 천주께 대한 사랑으로 지탱되어, 모든 것을 불평(不評)없이 참아 받았다.
연 3일 동안을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기막힌 형벌(刑罰)을 받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여도 그의 항구심을 꺾을 수가 없게 되자, 감사(監司)는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하고, 다시 옥에 가두게 하였다.
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의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붙잡혔는데, 그의 이름은 사심 안드레아라고 하였으며, 관명(冠名)은 사의(士儀)였다. 어려서부터 천주교 사상 (思想)에 젓고, 또 덕이 있는 아버지의 모범(模範)으로 교훈(敎訓)이 되어, 일찍 부터 신앙생활에 열중(熱中)하였으며,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뛰어난 신앙(信仰) 과 열심히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일상의 행동(行動)에 규율(規律)이 있고, 모든 이에게 친절(親切)하고 관대(寬大)하였지만, 특히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부모(父母)가 병이 들면 그들 곁을 떠나지 않았고, 또 부모가 식사(食事)를 한 뒤가 아니면 먹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억지로라도 음식을 좀 삼켜야만 했다.
아버지가 술을 조금씩 마시는 습관(習慣)이 있었으므로, 그는 집안 살림이 가 나한데도 불구하고, 술대접하기를 거르는 적이 절대로 없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만족(滿足)을 드리기 위하여, 그는 일을 더 하고, 여러 가지로 노력(努力)을 하였 다.
볼 일이 있어 출타(出他)할 때에도 돌아올 날짜와 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이런 때에는 바람도 비도 그의 길을 막지 못하였고, 어떤 때에는 예정(豫定)보다 늦게 돌아옴으로 부모(父母)에게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캄캄한 밤길을 재 촉하는 것도 두려워하지를 않았다. 부모의 조그만 눈짓, 조그만 의사표시(意思表 示)만 있어도, 그것이 곧 그에게는 명령(命令)이나 다름이 없었다.
⑥ 하루는 아버지가 그저 지나가는 말로
?우리 집이 너무 협소하단 말이야, 필요한 때에 몇 명의 교우를 거두어 주기 위 해서라도 방이 두 세 개 더 있으면 좋겠다.?
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명령으로 간주(看做)하였다. 그래서 그날 부터는 매일의 일과(日課)를 하는 한편, 외출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보나 석가래 를 두개씩 가지고 들어와, 얼마 후에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이루어 놓을 수가 있었다.
사방에서 신자(信者)들이 이 복 받은 집을 찾아 모여들었고, 또 박보록(朴甫 祿) 바오로는 비록 가난은 하면서도, 손님들에게 예의(禮儀)에 벗어나지 않게 대 접을 못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는 아버 지의 뜻을 살려, 자기와 가족(家族)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희생(犧牲)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비용(費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부유(富裕)한 신자(信者)들이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의 아버지께 대한 이 훌 륭한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하고, 또 그가 얼마나 곤궁(困窮)한 가운데 사는지 를 알고, 돈으로 좀 도와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박사의(朴士儀) 안드레 아는 그것을 받으려 하지를 않고,
?아버님과 가족을 봉양하기 위해 진 빚은 내가 혼자 일을 해서 갚는 것이 당연 하다.?
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扶助)를 돌려보낼 수 없는 경우에는, 그것을 사용(私用)에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가난한 몇몇 신자(信者)들에게 애 긍(哀矜)하는 것이었다.
이 열심한 신입교우가 이렇게 가지가지 덕을 닦으며 살아가던 중, 아버지와 같이 체포(逮捕)된 것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도 형 벌(刑罰) 중에 뛰어난 인내(忍耐)와 용기(勇氣)를 보여주었으며, 둘이 함께 상주 진영(尙州鎭營)에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移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