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정해박해2-3

손드러 2010. 1. 19. 08:41

3) 안(安)군심 리카르도

①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본시 보령(保寧)고을 사람으로, 명랑한 얼굴에 성격이 겸 손(謙遜)하고 친절(親切)하였다. 청년시절에 천주교에 들어와서는 더욱 자유롭게 수계(守誡)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가 자녀들의 교육(敎育)을 정성들여 하는 것과, 남에게 대하여 너그러운 애덕(愛德)을 가지고 있음을 탄복(歎服)하였다. 기도(祈禱)와 묵 상(黙想)에 부지런 하여, 그것을 궐하는 일이 결코 없었으며, 보통 1주일에 세 번씩 대재(大齋)를 지켰다.

그는 자기 집안 식구들의 생계(生計)를 이어가기 위하여, 성교(聖敎)의 서적 (書籍)을 베끼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또 책의 내용(內容)을, 교우(敎 友)들은 물론, 외교인(外敎人)들에게까지 설명하여 주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 붙잡혔는데,

?네가 사술(邪術)을 행한다는 말이 참말이냐??

하고 관장(官長)이 묻는 말에,

?저는 절대로 사술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더 이상 묻지 않고 석방(釋放)시켰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런 말을 천주교에 대해 가끔 쓰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하도 부적당(不適當)하게 쓰이기 때문에, 안(安)군심 리카르도의 대답을 비난(非 難)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후,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자기가 더 명확(明確)한 답변(答辯)을 하지 못한 것과, 용기(勇氣)가 부족했던 것을 늘 후회 (後悔)하였다.

② 1827년에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자기 손으로 베낀 많은 책들로 인하여, 반드시 혐의(嫌疑)를 받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께서도 여러 번 적들을 피하 신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여, 얼마동안 숨어 있으며, 열심을 배가(倍加)하여, 싸울 준비(準備)를 하였다.

결국 상주포졸(尙州捕卒)들은 그를 찾아내어 읍내로 압송(押送)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

하고 묻는 말에,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참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보라!?

하는 말에,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될 수 있는 대로 명백(明白)하고 간단하게 천 주교에 대해 설명하였다.

?네가 말하는 것이 훌륭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국법을 범하는 것은 상감께 대한 충성을 궐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관장(官長)이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우리가 이미 다른 모든 순교자(殉敎者)들에 게서 들은 바 있는 대답(對答)을 똑같은 말로 답하였으니, 그것은 거의 모든 교 우(敎友)들이 줄줄 외우고 있는,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에 이 대답이 그대 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③ 안(安)군심 리카르도의 대답(對答)은 이러하였다.

?천주는 우주의 대왕이시요,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만물 위 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임금님과 관장님들과 부모님들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 야 합니다.?

?천주를 배반하고 네 동료들을 고발하라!?

안(安)군심 리카르도가 거절하니, 매질을 무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끈기있 게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다가,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이튿날과 그 뒤 여러 날 동안 관장(官長)은 다시 고문(拷問)을 시켰으나 소용 이 없었고, 이렇게 얼마동안 쓸데없는 노력(努力)을 하다가, 감사(監司)가 있는 대구(大邱)로 이송하였다.

대구(大邱)에 와서 안(安)군심 리카르도는 또다시 형벌(刑罰)을 당하여 그 몸 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나, 고통(苦痛)을 당할수록 천주께 대한 사랑의 열 정(熱情)은 더 열렬(熱烈)해 가기만 하였다. 마침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얼마 후, 이 4명의 증거자(證據者)가 갇혀 있는 대구감옥(大邱監獄)에, 그들 보다 결코 덜 용감(勇敢)하지 않은 또 다른 증거자(證據者) 2명이 들어왔으니, 이제 소개(紹介)하려고 하는 이(李) 안드레아와 김(金) 암브로시오였다.

4)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① 이(李)「종일」재행(在行) 안드레아는 홍주(洪州) 고을 출신으로, 성질이 꿋꿋하 고 바르며 관대(寬大)하여, 모든 이가 우러러 보고 존경(尊敬)하였다. 그는 20세 가 넘어서야 천주교를 배우게 되었으나, 그 입교(入敎)가 어떻게나 진실(眞實)하 고 완전(完全)하였던지, 본 고향에서는 자기가 발 가는 대로 자유롭게 천주교를 봉행(奉行)하지 못하겠음을 깨닫고, 집안과 재물(財物)과 이웃을 버리고 산골에 은거(隱居)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事情)으로, 여러 도(道)를 연달아 옮겨 다니게 되어, 오래지 않 아 가지고 떠났던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쓰고, 아무런 일이라도 하여 생계(生計) 를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난과 그에 따른 결핍(缺乏) 가운데에서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가 보여준 인종(忍從), 모든 이에게 대한 그의 박애심(博愛心), 욕을 참아 받는 인내심(忍耐 心), 모든 말에 있어서의 근신(勤愼), 가족을 가르치고 교육(敎育)하는데 보여준 정성(精誠), 그밖에 그에게서 빛을 발하는 여러 가지 덕으로 인하여, 모든 이의 탄복(歎服)하는바 되었다.

비록 가족(家族)을 먹여 살리는 데에 필요한 일 때문에 몹시 바쁜 몸이기는 하였으나, 기도(祈禱)와 거룩한 독서(讀書)에 대한 꾸준하고 부지런한 열심을 늦 추려 하지 않았다.

② 1827년 박해(迫害)가 일자, 그는 세속의 교제(交際)를 피하고, 열심을 더하여 순 교(殉敎)를 예비(豫備)하였다. 그는 집안사람들을 이렇게 격려(激勵)하였다.

?우리는 각각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천주의 뜻이 어떤지를 모 르는 만큼 할 수 있으면 박해자들을 피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가 순흥(順興)고을 곰직이(현재 봉화군(奉化郡) 물야면 (勿野面) 오전리(梧田里) ?)에 살고 있을 때에, 포졸(捕卒)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는 포졸(捕卒)들을 기꺼이 맞아들였고, 그들에게 끌려가 안동진영(安東鎭營)에 출두하였다. 관장(官長)은 물었다.

?네가 사교(邪敎)를 따른다는 것이 사실이냐??

이 말에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대답하였다.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신 이요, 만물을 다스리시는 대왕이시며, 모든 사람을 기 르시는 가장 높은 아버지이십니다. 선(善)을 상(賞)주고 악(惡)을 벌(罰)하시는 이도 천주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흠숭(欽崇)할 본분이 있으므로, 저는 그분을 흠숭하고 섬기는 것이며, 사교라고는 알지를 못합니다.?

?너의 대답이 매우 당돌하다. 곧 배교하라.?

관장(官長)은 이렇게 호통을 치며, 혹독(酷毒)한 매질을 시켰다.

③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조용한 얼굴과 꿋꿋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만만코 제 천주를 배반하지 못하겠사오니, 여기에 대해서는 더 묻지 말아주십 시오.?

관장(官長)은 성이 나서 여러 날 동안 계속하여 형벌(刑罰)을 가하였다. 그러나 천주의 사랑은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를 끝까지 지탱(支撐)해 주었다.

그 후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감사(監司)에게로 이송(되었는데, 감사는

?네가 배교를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말하며,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세 차례나 가하게 하였으나, 아무런 소 용이 없었다. 다음에는 꼬임수와 달콤한 말로 그의 마음을 사려 해보았으나, 모 든 방법(方法)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리하여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는 마침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다른 증거자(證據者)들과 함께 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

5)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① 김「군미」세박(世博) 암브로시오는 언우(冠名)라고도 불렀는데, 서울의 역관(譯 官) 가정에서 태어났고, 1785년에 순교(殉敎)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먼 일 가였다.

천주교가 조선(朝鮮)에 들어오자, 곧 전 심력(心力)을 기울여 받아들이고, 아내 와 아이들에게도 가르쳤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만가지로 귀찮게 굴어, 다시 우상숭배(偶像崇拜)로 돌아오게 하러들었다.

특히 그의 아내는 성질이 포악(暴惡)하고 앙칼져서, 그를 한 시도 가만 두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대소재(大小齋)를 지키지 못하게 하며, 큰소리로 천주교를 욕하였다.

②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하도 귀찮게 구는데 지쳐서, 집을 떠나기로 결심 (決心)하고, 1791년을 좀 지나 가족(家族)을 하직(下直)한 후, 지방(地方)의 교우 집들을 찾아가 이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며, 그의 말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성경(聖經)을 베껴 생계(生計)를 꾸려 나갔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보는 행운(幸運)을 가졌고, 얼마동안 그를 모 시고 있은 듯도 하며, 그동안에 신앙(信仰)과 덕을 굳게 하였다. 집이 없으므로 그는 가끔 산중으로 들어가, 더 조용한 가운데에서 신심(信心)의 수련을 쌓았다.

그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교리(敎理)를 가르치기를 즐기며, 그들을 각각 덕행 (德行)의 길로 가도록 격려(激勵)하여 마지않았는데, 말보다는 오히려 모범(模範) 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혹독(酷毒)하게 추운 겨울 동안에도, 매일 밤중에 일어나, 기도(祈禱)를 드렸다. 식생활에 극도의 절제(節制)를 지켜, 나오는 찬이 맛이 있건 없건, 엄격 (嚴格)한 한계(限界)를 정하여, 그것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

③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1801년과 1815년의 박해(迫害)를 모면하였었다. 1827년에는 그가 아는 신자들이 모두 도망(逃亡)을 하였는데, 매일 같이 그중 몇 사람이 잡히게 되자, 그가 피신(避身)하고 있던 집 주인은 어떤 외교인(外敎 人)의 집에 가서 숨게 되었다.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어디로 발길을 돌려 야 할지를 모르고, 또 아무리 해도 수색(搜索)을 피할 도리가 없음을 알자, 자수 (自首)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5월에 안동(安東)읍으로 가서, 지니고 있던 조그마한 보따리를 옥리 (獄吏)가 있는 곳에 내려놓고, 영장(營將)에게로 가려고 하였다. 진영(鎭營) 문지 기는 못 들어가게 말렸으나,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나는 천주교인이니 영장(營將)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다고 이르시오.?

하고 말하였다. 포졸(捕卒)은 그를 미친놈으로 돌리고서 저리 비키라고 하였으 나, 그는 큰소리로

?나는 미친놈이 아니고 천주교인이란 말이요.?

하고 외쳤다. 포졸(捕卒)은 할 수 없이 영장(營將)에게 가서 알리니, 영장(營將) 은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를 불러다가 몇 마디 물어보았다.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자기가 머무르던 곳과, 자기 책을 감추어 둔 곳 에 대해서는 대답하기를 거절하여, 다리에 한 차례 매질을 당한 후, 옥에 갇히었 다.

한 달 후에 대구(大邱)로 이송(移送)되어 가니, 거기에는 모두 절친(切親)한 친 구들과 다른 증거자(證據者)들이 갇혀 있었다. 감사(監司) 앞에서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곤장(棍杖)을 세 차례 무지막지하게 맞고, 여러 가지 고문(拷問)을 당하였으나,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인내심(忍耐心)으로 참아 받았다. 이리하여 결 국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그 선고의 윤허(允許)를 기다리며 옥에 갇혀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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