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레지오 마리애의 당면 과제 : 變化와 刷新
(변 화) (쇄 신)
교육위원 손형도 안드레아
1. 序 : 변화에 대하여
이 세상 대부분의 동물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변화는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사람들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거래처를 정해놓고 때로는 불평하면서도 발길은 늘 가던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은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변화를 꾀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ērakleitos BC 540?∼?)는 ‘우리는 동일한 강물에 몸을 담글 수 없다 " 내 발, 내 몸을 스친 바로 그 물결은 이미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다’어제의 나는 이미 오늘의 내가 아닙니다.
성경말씀, 고린도 후서 3장 18절에는‘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주님을 향한 바로 그 순간부터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바로 주님과 같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오로지 변화되는 자만이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내면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현실의 매너리즘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필사적인 노력과 절대타자의 도움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우리들의 신앙에 뿌리내린 교회의 거대한 유기체(organism)입니다.
유기체인 레지오마리애는 그 자체로서 이미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으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2. 레지오 마리애의 정체성(Identity)
앞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레지오 마리애도 유기체로서 변화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 시피 레지오 마리애는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 마이러 하우스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에서도 너무도 멀리 떨어진 조그마한 섬나라이며, 당시로는 유럽의 최빈국(最貧國) 가운데 하나였던 아일랜드에서 평신도인 프랭크 더프에 의해서 창설된 레지오 마리애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 8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신도 신심단체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민족과 언어와 이념의 장벽을 넘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가 다양한 환경에 맞게 다르게 변질(deterioration)되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환경을 포용하며 적응시켜(adaptation)온 것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사람들의 생활속의 변화는 태초부터 직전까지의 변화보다도 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뿌리내린 것만 보더라도 참으로 놀라운 변화를 거듭해 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변했는데 레지오는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와 같은 레지오의 강한 생명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 만치서 빨리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레지오 마리애의 손길에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그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답은 레지오 마리애를 보다 정확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 교본상의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과 정신 : 小共同體로서의 역할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변화는 가장 교회답게 되는 것이며, 사제의 변화는 가장 사제답게 되는 것이고, 평신도 이면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인 우리들은 가장 평신도답게, 레지오 정신에 투철한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우리들의 정체성을 더듬어봐야 변화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교본 제2장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단원들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복음화 되어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라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먼저 변화되어서 세상 변화의 밑거름이 되자는 것입니다.
자신의 복음화 없이 이웃의 복음화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단원들이 성화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온전히 주님께 사로잡혀야 함 - 변화 -을 의미합니다. 그분께 온전히 나를 의탁함이 없이 우리들의 성화도 없으며, 이웃의 복음화도 힘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자신을 송두리째 사로잡힌 분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삶의 최고의 위치에 올려두고 그분의 모습을 닮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무늬 만 비슷하다고 다 크리스찬이 아니듯이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을 입으로 외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내용은 삶을 통해 실천하지 못하는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다음으로는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입니다.
교본 제3장에서는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으로 성모님의 10가지 덕행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산교구 최경용 신부님은 이를 설명하면서 여기에 창설자 프랭크 더프의 정신과 로마군단의 용기를 함께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본 전체를 통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의 설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지오 교육, 특히 직책 교육이나 의무교육을 통해서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거의 외우다시피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우리들의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레지오 교본이 어렵다고 하지만 실상 레지오의 모든 내용은 2장 과 3장에 너무도 쉽게 압축되어 다 들어있습니다.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나머지 내용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는 실천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책을 지어내신분이 아닙니다. 이론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묵묵히 성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몸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하신분이십니다. 간디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시는 예수님과 사랑을 입으로만 읊조리는 자칭 그리스도인에 대한 극명한 대비(對比)에서 나온 말임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교본에 나오는 성모님의 10가지 덕목 - 겸손, 순명, 온유 , 기도, 고행, 인내심, 순결, 지혜, 사랑, 믿음 - 은(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가 지은 ‘참된 성모신심“ 제 108항) 우리들의 정신적 지표이자 행동지침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겸손, 순명,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이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머리 속 깊은 곳에 관념적으로 저장해 두었던 이 실천 덕목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생명력을 불어 넣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목적과 정신을 지닌 레지오 마리애는 그 자체로서 이상적인 소공동체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또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小共同體는 문자 그대로 작은 집단의 사람들 모임입니다.
교회 내에서 소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성령께 의지하며 그분께로 더욱 가까이 가기위함을 원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지칭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교회에서 펼치고 있는 소공동체는 기초교회 공동체 혹은 초기교회 공동체로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이며, 너무 길어서 부르기가 어색하다면 교제, 친교의 의미로서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의 집단을 지칭하던 그리스어 코이노이아(κοινωνία)로 하는 것이 혼동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레지오의 쁘레시디움은 가장 작은 단위의 조직체이며, 꽃이요, 그 자체로 소공동체입니다. 나머지 모든 상급 평의회는 쁘레시디움이 보다 잘 역할을 수행하도록 도와주는 기관일 뿐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에 의해서 주창되고 전 세계로 번져나간 교회 내 신심단체로서 가입도 탈퇴도 자유입니다. 성모님의 정신으로 세상의 복음화를 앞당기는데 선봉을 서고자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어우러진 자발적 집단입니다.
다만, 레지오 마리애가 지향하는바 목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강력한 로마군단의 체제를 본 따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자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순명을 강조한다는 점은 이미 알려져 있으므로, 개인의 생각에 따라 참여 여부가 결정될 뿐입니다.
식물이라는 유기체는 씨앗을 심어놓으면 하늘로부터 물과 햇빛을 받아서 스스로 뿌리내리는 여건만 형성되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아도 잘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훌륭한 체제라도 토양이 맞지 않으면 옮겨심기가 어렵고 옮겨 심어놓더라도 제대로 자라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내의 어떤 소공동체도 유기체인 이상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어떤 소공동체가, 그것도 한 두 개도 아닌 수십 개에 이르는 공동체가 매주 빠짐없이 주회를 개최하며, 교회와 자신을 위해서 힘든 일을 마다않는 자발적인 작은 집단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교회 내에는 여러 작은 공동체들이 존재하지만 규칙적이고 적극적이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레지오 마리애야 말로 이상적인 소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2) 궁극적 목적 : 세상의 복음화
앞서 교본 제2장의 레지오의 목적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레지오 마리애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존재이유는 세상복음화에 있다고 했습니다.(제2장 레지오의 목적 <나>항)
복음화는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위반되는 모든 인간적인 판단 기준,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을 역전시켜 복음적 생활(예페 4,23-24, 골로 3,9-10)로 인도하는 활동까지를 폭넓게 의미 한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바로 복음화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는 쇄신으로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면서 이 세상을 복음화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현대 복음 선교’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10주년 기념으로 바오로6세 께서 발표하신 사도적 권고서입니다.
복음화의 구성요소는 첫째로 말씀의 선포, 즉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둘째로 생활을 증거 하는 일이며, 셋째로 이런 일을 하기위해서 제대로 된 성사생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래의 선교(Missionis)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던 복음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처럼 포괄적인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같은 길거리 막무가내 선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서 봉사와 섬김의 예수 삶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제대로 된 성사생활을 통하여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산교구 교구장님의 사목표어는 초기 3년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위해 성서를 읽고 쓰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이후 3년은 ‘봉사와 증거의 삶을 살자’로서 예수님을 알았으니 그분의 삶을 따라 살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결국 교구장님께서 우리 교구민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자신의 복음화’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화는 자신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나를 따르라) 으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을 잡아들이는 일에 앞장섰던 바오로는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런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음은 아직 우리들이 제대로 변화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하면 과한 것일까요?
3.당면과제 : 변화와 쇄신
오늘날에는 끊임없는 변화와 쇄신이 없이는 대마(大馬)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국가도, 기업도, 사회도, 교회도, 우리들의 마음 자세도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여 새로 거듭나야 합니다.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현실에 안주 해 버린다면,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속의 개구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개구리는 뜨거운 물 속에 집어넣으면 깜짝 놀라 튀어나오지만, 찬 물속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모르고 따뜻함을 즐기다 결국 삶겨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변화와 쇄신은 종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거듭나야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복음 3장 3절 이하.
이미 사람들의 머리 속에만 ‘머물러있는 율법’에서 벗어나 이웃 속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게 됨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와 쇄신의 근본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역시 교회안의 평신도 신심단체에 속하므로 예외일 수 가 없을 것입니다.
변화와 쇄신에서 쇄신(刷新)은 혁신(革新)과 같은 동의어입니다.
혁신(革新)이라는 말의 의미는 가죽이 찢겨지는 아픔을 이겨 내아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변화와 쇄신은 실행에 옮기기 어렵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레지오가 변화해야 한다니까 일부에서는 교본도 바뀌어야 하고, 형식과 체제도 바꾸어야 한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앞서 레지오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고 했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손질을 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할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성모님의 정신을 모태로 한 레지오의 근본적인 정신, 즉 창설자의 정신을 바꿀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서투른 목수가 연장 나무라는 격이 아니라면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인 우리 자신, 레지오의 이름 안에 함께 모여 있는 우리들이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체가 우리 자신에게 있음이 분명합니다.
1) 회개(悔改)의 삶을 살아야 : 자성(自省)의 삶을 살아야
회개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를 뜻하는 헤브라이어<šb>로 종래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생활 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를 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첫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1, 15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늘나라가 확보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 하늘나라를 담보 받겠다는 예수님시대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나의 삶의 모범으로 살아가고자 한 원의(願意)를 지닌 우리들은 평소 우리들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끝없는 유혹 속에 둘러싸여 알게 모르게 하느님께 거스르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자신을 지켜내어 하느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입니다.
자기 성찰 없는 회개는 없으므로 성사생활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이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동안 했으며, 레지오 활동을 언제부터 해오고 있다는 등의 과거의 자신의 신앙의 경력이나 업적으로 현재의 자신의 나태함을 상쇄시키고자 하는 우리들의 이기심을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이곳에는 우리 자신을 나태하게 하거나 습관적 잘못에 관대해지는 요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나름대로 거의 매일 미사에서 영성체하고, 레지오도 거의 빠짐없이 열심히 참여하는데 무슨 회개 할 일이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람들일 수록 더욱더 자기 방식의 믿음의 기준을 정해놓고 생각은 앞서가고 행동은 남보다 더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보다는 지금 현재가 우리들에게 중요합니다.
현재 레지오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들이 나에게서 기인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문제의 발단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든 적당히 해치우고자 하는 안일하고 나태한 생각, 상급 지시에 마지못해 행하는 수동적인 우리들의 활동들, 각종 사안에 대해서 긍정적인 수용보다는 부정적인 비판에 익숙한 우리들의 사고, 이와 같은 요소들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성찰하고, 여기에서 돌아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잘못을 깨달아 고치는 것 - 회개(悔改)인 것입니다.
2) 증거(證據)의 삶을 살아야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처럼 살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모르는 우리의 이웃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고서 나도 그리스도를 믿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지역 사회를 복음화 시키고,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의 인격과 인품을 갖추는 것입니다.> - 금년도 교구장님 사목교서 중에서-
일상적인 회개의 삶으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 우리들은 이제 이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증거 하는 삶의 전제(前提)는 믿음입니다.
교구장님은 사목교서에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과 삶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 큽니다. 믿음에 힘이 실리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믿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참으로 미미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택합니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이 있다면 비로소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늘 맨 나중에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내 삶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삶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너무도 마음 아프게 다가옵니다.
예수님 보다는 나의 하찮은 자존심이, 나의 체면이, 나의 이익이 우선되는 생활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삶에서 증거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변화와 쇄신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그 분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전체의 이익을, 우리시대 눈앞의 손익계산보다는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의 복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현지인들에게 게으른 생활을 멀리했고, 누구에게도 빵을 거저 얻어먹지도 않았으며,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데살2. 3,2 이하)
‘형제 여러분, 나를 본 받으십시오’라고 필립비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적고 있습니다.(필립비 3,17) 사도 바오로는 얼마나 자기 관리가 철저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다른 신자들에 비해서 어쩌면 증거의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펼치는 활동들이 모두 증거의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자를 교리 반에 데려오는 일 외에도, 병원 방문을 통해서, 상가방문, 연도를 통해서, 독거노인 돌보기, 이웃 일손 돕기,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활동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과 향기를 전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들이 매사에 창의적이고, 적극적, 능동적으로 레지오 마리애 정신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성모님의 도우심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교본 4장 5항 ‘한평생 사도직 활동을 꾸준히 지속하는 것 자체가 바로 영웅적 행위이며, 그러한 경지는 끊임없는 영웅적 활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평생을 변함없이 사도직 활동에 몸 바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은총이며, 이 은총은 지속적인 활동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다.’우리 레지오 단원들에게는 이러한 활동거리가 아직도 많고, 이러한 장(場)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레지오의 봉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레지오 제4장 5항)
다만 우리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을 찾아서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4. 結 : 말보다는 실천을
무릇 모든 종교는 삶과 그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거의 실천종교일 수밖에 없지만 특히 그리스도교는 실천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요한 13,34)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협조단원을 제외하고 누구다 다 행동단원입니다.
우리 주변의 활동거리를 찾아서 우리들에게 위임된 복음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단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2007년 10월 현재 마산교구 레지오 마리애 간부 및 단원 의식조사 중
구체적 활동내용을 묻는 질문에서
쉬는 교우 회두 : 15.6%
비신자 입교권면 : 12.2%
어려움을 겪는 분 돌봄 : 14%
본당협조 : 53.4%
기타 : 4.8% 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가장 요구되는 활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서는
쉬는 교우 회두 : 45%
비신자 입교권면 : 31%
어려움을 겪는 분 돌봄 : 14.8%
본당협조 : 6.2%
기타 : 3% 순이었습니다.
위의 통계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단원들의 생각과 실제행동은 거의 반대 현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서 본당협조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 비중이 지나치게 높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레지오 단원들이 대체로 본당 간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실천의지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알고는 있는데 실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레지오 행동단원으로서 치명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이 변화 쇄신되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4절 이하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사랑과 복음화에 대한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레지오 마리애는 더 이상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레지오 마리애에서 어찌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평생의 선교 사업을 통해서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디모테오 4장7절)
(2008.11.29 마산교구 레지오 마리애 심포지엄 주제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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