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죽음의 경계는 얼마일까?
3월 11일 일본을 휩쓸고간 강력한 지진과 쓰나미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운데 하나인 일본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잦은 강진으로 인하여 내진설계 강화가 체질화된 그네들의 보금자리를 흔적없이 휩쓸고 갔을 뿐만아니라 안전을 자랑하던 원전마저도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본의 지진은 작년 초에 진도 7 정도의 엄청난 지진이 발생하여 20만명이상이 사망하고 수백만명의 이재민을 낸 중미 아이티에 이어 엄청난 재앙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더욱 얇게 만드는 느낌이다.
센다이와 그밖의 지역을 시꺼먼 바닷물이 도시들을 삼키고 지나가는 참혹한 광경을 영상매체로 지켜보면서 게임이나 영화속의 장면을 보는 착각을 일으키게한다.
밀려오는 바닷물을 보면서 다급히 자동차를 몰아 달리는 모습, 미처 피할수 없어 몰던 차를 버리고 계단위를 달려가는 기자 - 이들 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시각적으로는 불과 5M안팎, 시간으로 치면 3초(?) 정도가 아닐까?
순식간에-졸지에- 예상치못한 사태로 삶의 경계너머로 건너간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은 그들이 만난만큼의 기억과 추억을 남긴채 타자의 세계로 사라져버렸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죽음은 와주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한 물질을 입고 있는 존재이며, 그래서 죽음이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고, 만약에 이것을 벗어난다면 이미 내가 아니므로 죽음은 타자의 형태로 엄습해오는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불의의 순간에 살기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의 행위이고, 이를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레비나스의 논리대로 내가 타자로 바뀜을 거부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번에 지진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90가까운 노인은 '내평생 이런 재앙은 처음이다'고 하면서 모든것을 앗아간 슬픔에 목이메인 모습에서, 인간은 살아가는 시간만큼 더욱 험한 모습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이전의 작은 일은 이번의 큰일과 비교가 되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것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의식하는 학습을 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어쩌면 Life and Death의 공간적 경계는 너무도 짦은'and' 한 단어의 길이에 불과 하다.
이 境界지역-경계적 시간안- 에서 인간은 늘 무엇에 警戒하며 치열하게 살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온몸으로 살다가 불의의 사태로 귀중한 목숨을 잃은 수만의 사망자와 실종자들의 명복을 내가믿는 신의 이름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아울러 이 엄청난 사태를 통하여 산자들의 국경을 초월한 온정과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살아있음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것에 또한 감사한다.
<2011.3.19 손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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