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신유박해의 종말 -6

손드러 2010. 1. 19. 07:56
  

3) 양근(楊根) 고을의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의 순교


  같은 날, 이미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가 흐른 양근(楊根)에서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가 순교하니, 그는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둘째 아들이요,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의 양자(養子)로 들어가서 그의 대를 잇게 되어 있었다.

    그의 가문(家門)과 재주와 좋은 자질(資質)로 인하여 그가 이미 얻었던 명망(名望)과, 천주교를 신봉(信奉)하는데 있어서의 그의 열성(熱性)은, 그의 추방(追放)의 원인(原因)이 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므로 그는 체포(逮捕)되어 우선 양근(楊根)옥에 갇혔는데, 거기에서 어떻게나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하였던지, 잠시 동안 마음이 흔들려 배교(背敎)한다는 말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서울 법정(法廷)으로 이송(移送)되어 와서는, 전에 한 말을 취소(取消)하고, 아낌없이 가해지는 고문(拷問)중에도 다시 천주교를 증거(證據)하였다. 한 10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고, 처형되기 위하여 다시 양근(楊根)으로 이송되었다. 12월 27일(1월 30일)에 그의 머리는 칼 아래 떨어졌는데, 그때 그의 나 이는 33세였다.


4) 충주(忠州)의 4명의 증거자(證據者)들


※ 위에서 본 것처럼, 포천(抱川)과 양근(楊根) 고을에서 증거자(證據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證據)한 날과 같은 날, 전에 충청도 감영(忠淸道監營)이 있었던 큰 읍내 충주(忠州)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信仰)은 또 새로운 증거자(證據者)들을 갖게 되었다.

    

① 첫째는 이기연(李箕延)이라는 양반이었는데, 그는 그 전해가 끝날 무렵에 배교(背敎)를

    한 후, 귀양을 갔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더 용감(勇敢)하게 새로운 신문(訊問)

    을 당하였고, 이번에는 다행히도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그는 63세에 참수(斬

   首)를 당하였다.


② 이기연(李箕延)이 입교시키고 교리를 가르쳐 주었던 다른 세 증거자(證據者)가 그와 함

    께 형장(刑場)으로 나아가니, 이부춘(李富春)과 이석중(李石中) 그리고 이아지연(李阿

    只連)이라는 여인(女人)이었다.


③ 그 읍내에서 아전(衙前)노릇을 하던 이부춘(李富春)은, 약간의 학식(學識)이 있고, 언

    변(言辯)이 매우 좋으며 인물(人物)이 잘 생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앙(信仰)에

    매우 집착하고, 교회의 본분(本分)을 지키는 데 충실(忠實)하였다.

       이석중(李石中)은 이부춘(李富春)의 아들로, 아버지와 같이 열심한 교우였다. 이석

    중(李石中)은 이 나라에서 양심상(良心上) 매우 위험(危險)한 직업인장사를 하고 있었

    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靈魂)의 이익(利益)을 위할 줄을 알아서, 없어질 재물(財

    物)을 모으기보다는 천국(天國)을 얻는 것에 더 마음을 썼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다른 시기에 체포(逮捕)되었으나, 형벌(刑罰) 중에 그들이 보

    여준 항구한 마음은 똑같았고, 하느님의 은총(恩寵)이 신자들 마음에 어떤 기적(奇蹟)

    을 행할 수 있는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외교인(外敎人)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은 함께 참수(斬首)를 당하였는데, 아버지의 나이는 68세였고, 아들의 나이는 29

    세였다.


④ 아전(衙前)의 딸인 이아지연(李阿只連)은 같은 계층의 남자와 결혼하였는데, 아들 둘을

    낳은 후 남편(男便)을 잃었다. 비록 두 아들은 천주교를 신봉(信奉)하기를 거절하였지

    만, 과부교우(寡婦敎友)는 그래도 자기의 본분(本分)을 충실(充實)히 함으로써, 모범이

    되었다.

       어떤 조가마한 냉담(冷淡)도, 조그마한 게으름도 그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녀의 고귀한 항구심(恒久心)을 상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

    녀가 천주교인으로 붙잡혀, 무서운 혹형(酷刑)가운데서, 그녀의 평온(平穩)과 용기(勇

    氣)로, 천주교의 영광(榮光)이 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녀는 위에서 소개한 다른 순교자

    (殉敎者)들과 함께 12월 27일(1월30일)에 참수(斬首)되었다

   

5) 경기도(京畿道) 광주(廣州)에서의 두 순교자(殉敎者)


① 첫 째는 우덕운(禹德運)인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극히 명백(明

    白)한 그의 결안(結案)을 보면, 그는 매우 결기(決起)있는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순교

    자(殉敎者)들을 장사지내는 일을 보살폈고, 또 배교자(背敎者)들에게는 그 비겁(卑怯)

    한 나약(懦弱)을 공공연하게 엄히 꾸짖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12월 28일(1월 31

    일)에 50세의 나이로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② 둘째는 한(韓)「덕원」토마스였다. 그는 경기도(京畿道) 수원(水原)고을 양반집에서 태

    어나, 광주(廣州) 지방으로 이사를 갔었다. 그는 근엄(謹嚴)하고 성실(誠實)하였으며,

    기도(祈禱)와 독서(讀書)를 부지런히 하였다.

      그는 교우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격려(激勵)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당시의 기록(記

    錄)을 보면, 그럴 경우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그가

    가장 힘쓰는 것은, 무슨 일에 있어서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변

    함없이 꾸준히 행하였다.

       1801년에 광주 포졸(廣州捕卒)들에게 붙잡혀 본관(本官) 앞에 불려나가니, 관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에게 다른 교우(敎友)들 밀고(密告)케 하려 했다. 그는 교우(敎友)  

    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대기를 거부(拒否)하고, 얼굴빛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거룩한

    기쁨으로 고문(拷問)을 참아 받았다.

      얼마 후에 다시 형벌(刑罰)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관장(官長)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ꡒ제가 대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겠다면 서슴지 않고 대겠습니다. 그러나 상

   을 주기는 고사하고 그 사람들을 잡아다가 목을 졸라 숨이 막힐 지경을 만들

   고, 잡혀오는 족족 목을 배실 것이니, 그 누구도 밀고할 수 없습니다.ꡓ

       그의 결안(結案)은 서울로 보내져, 왕의 이름으로 확정(確定)이 되었다. 그는 형장(刑

    場)으로 기꺼이 나아가서, 목을 괴는 나무토막을 손으로 붙들고 망나니를 똑바로 쳐다

    보면서,

   ꡒ단칼에 목을 베어주오ꡓ

     하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겁이 나서 벌벌 떨며 헛 칼질을 하여 세 번에야 목이 떨어졌

     다. 때는 12월 30일(2월 2일)이었고, 한(韓)「덕원」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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