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이제부터는 이 슬픈 광경(光景)에서 눈을 돌려, 보배로운 죽음을 바라다보기로 하자.
그렇게도 곧은 성격(性格)과 그 고귀(高貴)한 진실성(眞實性)으로 선왕의 총애 愛)를 받았던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결연히 형장(刑場)으로 걸어 나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經驗)이 적어서 그의 머리를 단번에 자르지는 못하였다. 최필공(崔必恭) 토마스는 손을 자기의 상처(傷處)에 갖다 댔다가,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떼어 주의(注意) 깊게 들여다보며 외쳤다.
ꡒ보배로운 피!ꡓ
과연 보배로운 피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당(天堂)의 값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칼질은 그에게 천당문(天堂門)을 바로 열어주었다.
⑥ 다음에는 열성(熱性)있는 회장(會長)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차례가 왔다. 포도청(捕盜廳)에서 신문(訊問)을 당하는 중에 그는 잠깐 마음이 약하여졌으나, 하느님이 도우러 오셔서 은총(恩寵)이 곧 다시 우세(優勢)해졌다.
금부(禁府)에 이르자마자 그는 용감(勇敢)하게 자기의 모호한 말을 취소(取消)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결안(結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이 이상의 일을 하였다. 그때 그는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호교론(護敎論)을 써서 관리(官吏)들에게 제출(提出)하기까지 하였고, 이튿날은 자기의 피로 그것을 봉인(封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⑦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꼬 사베리오는 64세였다. 그의 최후(最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관리(官吏) 자신들이 그의 결안(結案)에 아래와 같은 말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의 끈기에 대한 훌륭한 찬사(讚辭)를 한 셈이다.
「그는 뻔뻔스럽게도 그의 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감히 말한다. 그의 고집은 목석보다도 더 강하였다. 그에게는 모든 형벌이 너무 경하다.」
⑧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몇 해 전에 공공연하게 또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교(天主敎)를 배반(背反)하였으므로, 금부(禁府)에서는 그를 살려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귀양의 판결(判決)을 받았고, 관례(慣例)에 따라 우선 다리에 심한 매질을 당하였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이 고문(拷問)을 당하는 동안에 신덕(信德)과 통회(痛悔)와 용감(勇敢)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되살아나, 그는 머리를 들고 관리(官吏)들에게 말하였다.
ꡒ제가 지난날에 한 모든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또 매질을 당하고 망신을 당하니,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부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용감하게 죽고자 합니다. 제가 섬기는 천주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만물의 주재자 이십니다. 이보(利寶)(중국의 사도(使徒) 마테오 리치(Ricci)神父의 조선 이름)와 다른 선교사들을 우러러볼 만한 도리와 성덕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천주를 위하여 죽고, 그렇게 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의 진리를 증거(證據)하고자 합니다.ꡓ
재판(裁判)을 주재(主宰)하던 정승(政丞)들은 이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의 말에 격노(激怒)하고 경악(驚愕)하였으며, 거기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웅성거렸다. 곧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어 방금 일어난 일을 아뢰니,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몹시 노하여 홍락민(洪樂敏)루가에게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가하라는 명을 보냈다.
그의 몸은 매질로 으스러졌다. 옥으로 다시 끌려간 그는 상처(傷處)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ꡒ이제 나는 행복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ꡓ고 말하였다.
그의 결안에 의하면,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죽음을 자기의 이전 배교(背敎)에 대한 벌(罰)로 기꺼이 당한다고도 말하였다 한다. 그가 형장(刑場)에 가기 위하여 수레에 올랐을 때, 그의 얼굴은 기쁨으로 빛났다. 그는 이렇게 하여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그 시대(時代)의 저자(著者)는 다음과 같은 매우 주의(注意) 할만한 말을 덧붙였다.
ꡒ처음에는 굳세다가 마지막에 가서 굴복하는 자가 많다. 죄를 지은 뒤에 다시 일어나고, 배교(背敎)하였다가 순교자(殉敎者)가 되는 것은 보통일도 아니고 쉬운 일도 아니다. 사람들이 단언하는 바에 의하면, 홍락민(洪樂敏) 루가는 매일 묵주신공(黙珠神功)을 드렸다고 한다. 공무(公務)를 집행(執行)하는 중에도, 그의 집에 찾아오는 많은 손님과 친구들 가운데서도, 그는 묵주신공을 한 번도 궐(闕)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신심실천(信心實踐)이 그에게 그렇게도 비상한 은총(恩寵)을 받게 해 주었을 것이다.ꡓ
신입교우(新入敎友)의 글에서 이런 감격스러운 생각을 발견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眞實)한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은, 말하자면 본능적(本能的)으로 천주성모(天主聖母) 마리아의 지극히 능하신 전구(轉求)에 대하여, 똑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證據)이다.
⑨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의 최후(最後)는 그의 일생(一生)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형장(刑場)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은 아주 빛났다. 도중에 수레 끄는 사람을 불러 목이 마르다고 하였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나무라자 그는,
ꡒ내가 물을 청한 것은 나의 위대하신 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함이오.ꡓ
하고 대답하였다.
옥중(獄中)에서도 법정(法廷)에서도 지치지 않고 전도(傳導)를 한 그는. 그의 순교장소(殉敎場所)도 매우 웅변적(雄辯的)으로 만들었다. 형구(形具) 앞에 앉아 그는 그것을 행복스럽게 들여다보고 나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높여 외쳤다.
ꡒ스스로 존재(存在)하시고 무한히 흠숭(欽崇)하올 천만물의 대주재자(對主宰者)이신 이가 당신들을 창조(創造)하셨고 보존(保存)하십니다. 당신들은 모두 회개(悔改)하여, 당신들의 근본(根本)으로 돌아와야 하오. 그 근본(根本)을 어리석게 멸시(蔑視)와 조소(嘲笑)거리로 삼지 마시오. 당신들이 수치(羞恥)와 모욕(侮辱)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거리가 될 것입니다.ꡓ
형리(刑吏)들이 그의 말을 중단(中斷)시키고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대라고 하니, 그는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머리를 누이면서,
ꡒ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는 하늘을 처다 보면서 죽는 것이 더 낫다.ꡓ
고 말하였다. 망나니는 벌벌 떨면서 감히 목을 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감탄(感歎)보다는 징벌(懲罰)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자신 없는 손으로 첫 번 칼을 내리쳤다.
목은 절반 밖에 끊어지지 않았고,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일어나, 보라는 듯이 크게 십자성호(十字聖號)를 긋고 조용히 다시 첫 번의 자세(姿勢)로 돌아가 치명적(致命的)인 일격을 받았다.
천주교(天主敎)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有名)한 인물(人物) 중의 하나이며, 가장 위대(偉大)한 순교자(殉敎者) 중의 하나인 사람이 42세의 나이로 이렇게 죽었다. 그의 시신(屍身)은 정성스럽게 거두어져서 그 가족(家族)이 살고 있던 읍내로 옮겨가 장례(葬禮)를 지내게 하였다. 그의 친척(親戚)과 인척(姻戚)들은, 외교인(外敎人)이건 천주교인(天主敎人)이건 그의 무덤에서 여러 사람이 기적적(奇蹟的)으로 병이 나았다고 단언한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는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반역죄(反逆罪)로 기소(起訴)되었었다. 따라서 그의 재산(財産)은 모두 정부(正副)의 특별명령(特別命令)으로 몰수(沒收)되었다. 그의 적(敵)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집안이 복권(復權)되는 것을 영구히 막아, 복수(復讐)를 할 수 없도록 만들고자 한 것 같다.
⑩ 같은 날, 즉 2월 26일 또 하나의 사형선고(死刑宣告)가 내려졌으니, 그것은 내포(內浦) 지방의 사도(使徒) 이「단원」존창(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에게 내린 것이었다.
그는 1791년 배교(背敎)한 뒤에 진실히 뉘우쳐 다시 열심히 교회(敎會)의 본분(本分)을 시작하였었다. 그는 주문모(周汶謨) 신부를 볼 수 있었고, 얼마 동안 그의 곁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신부(神父)는 그에게 자주 이러한 말을 하였다.
ꡒ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자격도 없이 성사를 행하고,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을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한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할 것이오.ꡓ
그래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는 끊임없이 순교(殉敎)를 준비(準備)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감사(監司)의 명령으로 1795년 말경에 체포(逮捕)되어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당하였으나 굽히지 않았고, 자기의 고향(故鄕)인 천안(天安)으로 송환(送還)되어, 매를 때리는 형리(刑吏)의 일을 하게 되었다. 조선(朝鮮)에는 흔히 있는 이 징벌(懲罰)은 양민(良民)의 신분(身分)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군수(郡守)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에게 이런 천한 직분(職分)을 시키지는 않고, 어떤 개인 집에 보석(保釋)하여 두는 것으로 만족(滿足)하였다. 그는 1801년 재판(裁判)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약 6년 동안 관헌(官憲)의 감시(監視)를 받으며 이렇게 지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그를 신문(訊問)하라는 명령(命令)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전(衙前)들은 그들의 존경(尊敬)을 얻고, 또한 그들의 자식(子息)들에게 헌신적(獻身的)으로 글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을 과히 괴롭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존창(李存昌) 루도비꼬는 이 오랜 시련(試鍊)중에도 꿋꿋한 태도(態度)를 보였다. 그는 꾸준히 모든 사람들이 알게 종교(宗敎)의 본분(本分)을 다하였고, 말과 모범(模範)으로 그 지방(地方)에 큰 이익(利益)을 가져다주었다.
하루는 여사울에 있는 자기 가족(家族)을 보러 갈 허락(許諾)을 받아, 거기에 가서 천주교(天主敎)의 현황(現況)을 알아봤다. 그때 그는 교우(敎友)들이 무서움에 못 이겨 그들의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모두 동네광장에 모아놓고 불살랐다는 말을 들었다. 이 소식(消息)을 듣고 그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고, 마음이 몹시 아파, 한권이라도 불태움을 모면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어떤 교우(敎友)가 몰래 감추어두었던 두 권을 그에게 갖다 주었다.
王이 승하(昇遐)한 후 박해(迫害)가 더 가혹(苛酷)해졌을 때, 이존창(李存昌)루도비꼬는 먼저 청주(淸州)로 이감(移監)되어 신문(訊問)을 받았고, 다음에는 서울로 옮겨져 거기에서 최창현(崔昌顯) 요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띠노 및 그 동료(同僚)들과 함께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던 것이다.
주민(住民)들을 무섭게 하기 위하여, 정부(政府)는 그가 오랫동안 복음(福音)을 전하였던 충청도(忠淸道)의 감영(監營)이 있는 공주(公州)에서, 그의 사형(死刑)을 집행(執行)하라는 명령(命令)을 내렸다. 거기에서 그는 서울의 순교자(殉敎者)들보다 이틀 후인 2월 28일(1801년 4월 10일) 참수(斬首)되었다.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고 한다.
그의 친척(親戚) 중 몇 사람이 사형집행(死刑執行) 현장(現場)에 있었지만, 며칠이 지난 뒤에야 그 귀중(貴重)한 유해(遺骸)를 거두어, 가족묘지(家族墓地)로 옮길 수 있었다. 그의 몸을 거둘 때,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희끄무레한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져 있는 외에 다른 흔적(痕迹)은 없었다고 한다.
李「단원」존창(存昌) 루도비꼬는 첫 번 박해(迫害) 때 나약(懦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朝鮮)에 있어서의 복음전파(福音傳播)에 가장 많이 활동(活動)한 이들 중 한 사람임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오늘의 우리 교우(敎友)들 대부분(大部分)이 그가 그때 입교(入校)시킨 사람들의 후손(後孫)들이다. 그러므로 내포(內浦)와 그 이웃 여러 고을에서는 그의 기억(記憶)을 우러르고 있다. 이상스런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이지만, 조선 최초(最初)의 신부(神父) 두 사람이 그의 집안이었으니,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神父)는 그의 조카딸의 손자 (孫子)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神父)는 그의 조카의 손자(孫子)였다. 그의 직계(職階)의 후손(後孫)은 지금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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