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의 2차 배교(背敎)
① 싸움도 하기 전에 그렇게도 부끄럽게 물러난 李(承薰) 베드로는, 권일신(權日身)이 배교하고 죽었을 때(1876년), 그는 평택(平澤) 현감(縣監)으로 있었다. 그가 배교(背敎)한 것은 일반인이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홍락안(洪樂安)과 그의 일당들은 이승훈(李承薰)을 천주교인들의 두목으로 지적하는 상소(上疏)를 조정에 올렸는데, 그가 관사(官舍)에서 그 종파의 서적을 읽는 것을 보았다고 덧붙였다. 그들은 이승훈(李承薰)을 법정에 출두시켜 법대로 재판(裁判)을 받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그가 향교(鄕校)에 가서 관례적인 예배(禮拜)를 하지 않는다고 고발하였다. 그 사실들이 증명(證明)될 수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信仰)을 공공연하게 증거(證據)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무함(誣陷)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하여 자기변호(自己辯護)를 하기 위한 글을 발표하였다.
③ 李(承薰) 베드로에 대한 홍락안(洪樂安)의 상소문(上疏文)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라의 고관대작(高官大爵)과 가장 중요한 인사들 열명 중 7~8명이 이 도리(道理)를 받아들였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
이 말이 과장(誇張)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대에 천주교(天主敎)가 조선(朝鮮)에 널리 퍼져서, 우리의 원수(怨讐)들은 이 종교(宗敎)가 머지않아 온 나라에 침투(浸透)하는 것을 보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였음을 보여준다.
정부(政府)는 겁이 나서 어디든지 검색(檢索)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조판서(刑曹判書) 김상집(金尙集)의 제의를 따라 王은 20일 기간 안에 천주교서적(天主敎書籍)을 바치지 않는 자들은 법대로 엄하게 다스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④ 尹(持忠) 바오로와 權(尙然) 야고보가 순교(殉敎)하기 나흘 전인 11월 9일자로 된 하교(下敎)에는, 두 사촌형제의 재판에서는 장례(葬禮)가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두 양반(兩班)이 조상(祖上)들의 신주(神主)에 손을 댔기 때문에 판결(判決)을 받은 것이다. 그런 죄를 용인(容認)한다면, 무엇인들 용납(容納)하지 못하겠는가 하는 말이 있었다.
그런 다음 王은 그 불행이 일어났던 진산군(珍山郡)의 등급을 낮추어, 전라도(全羅道)의 다른 55개 郡 밑에 두라는 전교(傳敎)를 내렸다. 그 고을 군수(郡守)는 때맞추어 죄인(罪人)들을 벌함으로써 기선(機先)을 제하지 못했다고 하여 파직(罷職)해야 한다고 하였고, 전국의 선비들에게 고전(古典)의 진정한 원리(原理)들을 더 철저히 연구(硏究)하도록 종용(慫慂)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 도(道)에서 시행하게 될 과거(科擧)에서는 후보자(候補者)들을 더 양심적으로 선발하고, 수상한 자들은 조심해서 제외(除外)해야 한다고 하였다. 끝으로 관리(官吏)들은 열성(熱性)을 발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逮捕)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2. 최필공(崔必恭) 토마스와 有力한 교우들
① 우리는 앞에서, 길거리와 광장에서 신앙(信仰)을 설교(說敎)하기를 그치지 않은 저 용감한 사람, 최필공(最必恭) 토마스의 입교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p.26참조).
그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어서 모면할 수가 없었다. 형조(刑曹)에 끌려 나가 그의 종교(宗敎)에 대하여 질문(質問)을 받자, 그는 과감하게 대답하였다.
ꡒ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ꡓ
이 대답을 한 뒤 그에게 가하여진 형벌(刑罰)도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항상 한결같은 목소리로 같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되풀이하여 마지않았는데, 어떻게나 순진(純眞)하고 솔직(率直)하고 확신(確信)있게 말하였던지, 구경꾼들이 모두 감탄(感歎)할 지경이었다.
② 임금 자신도 그런 감정을 느끼어, 최필공(崔必恭)에게 대한 동정심이 생겨 그의 목숨을 보존(保存)하여 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王은 그를 달래어 몇 마디 굴복(屈伏)하는 말을 얻어내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하라고 명령하였다.
③ 간계(奸計), 달램, 재산(財産)의 약속 등 모든 것이 다 동원되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王의 명령으로 崔(必恭) 토마스의 늙은 아버지와 형이 불려와, 눈물과 간청으로 이 용감(勇敢)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하였다. 이때 崔(必恭) 토마스는 크게 감동되었고, 인성(人性)의 모든 감정(感情)이 그의 마음속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복(屈伏)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는 참 임금시오 참 아버지이신 天主를 배반(背反)할 결심을 할 수 없다고 되풀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④ 이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자, 이제는 법에 따른 준엄(俊嚴)한 판결(判決)을 선고 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에는 대신(臺臣) 자신도 동정심(同情心)이 일어, 최필공(崔必恭)이 시키는 대로 순종(順從)하였다고 왕에게 아뢰었고, 王은 좋은 분별력(分別力)과 순종(順從)을 매우 칭찬 하며 곧 그에게 역관(譯官)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주게 하였다. 또 다른 기회에 왕은 최필공(崔必恭)을 좋은 심지로 돌아오게 한 것을 다시 기뻐하였다.
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필공(崔必恭)이 실제로 두려움에 젖었는지, 또는 사람들이 그가 하였다고 거짓 꾸며대는 말들에 대하여 즉시 강력하게 항변(抗辯)하지 않는 심약(心弱)만을 가졌던 것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어떻든 그는 곧 자기 罪를 몹시 슬퍼하고 자기의 첫 번 열심을 되찾아, 그 어느 때보다도 도 열성적(熱誠的)으로 천주교신자의 모든 본분(本分)을 지켜 갔다. 언젠가 우리는 그의 이름을 순교자(殉敎者)의 명단(名單)에서 보게 될 것이다.
⑥ 같은 시기에 체포(逮捕)된 다른 천주교신자들도 많은 배교(背敎)로 박해를 모면 하였다. 그들 중 중요한 인물로는 최인철(崔仁喆), 정인혁(鄭仁赫), 손경윤(孫景允), 양덕윤(梁德潤), 최인길(崔仁吉), 최필제(崔必悌)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나중에 순교(殉敎)하는 행복(幸福)을 얻었다.
3. 지방(地方)의 박해와 배교자(背敎者)들
① 광주(廣州) 고을에는 최창주(崔昌周)마르첼리노와 함께 갇혔던 동료들의 배교(背敎)가 있었고, 홍주(洪州) 고을에서는「성화」집안의 배교가 있었으며, 당진(唐津)고을에서는 배(裵) 프란치스꼬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였다.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와 배(裵) 프란치스꼬는 나중에 자기의 피로 그 죄(罪)를 씻었다.
② 내포(內浦) 천주교신자들의 가장 슬프고 가장 창피스러운 배교(背敎)는 그들의 사도(使徒) 李「단원」(存昌) 곤자기의 루도비꼬의 배교였다.
외교인(外敎人)과 천주교인(天主敎人) 모두에게 잘 알려진 그는 박해자들의 함정(陷穽)을 오랫동안 피할 수가 있었다. 그는 공주(公州)에서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가 어떤 형벌(刑罰)을 받아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사실(事實)인 것 같다. 공주감사(公州監司) 박종악(朴宗岳)의 12월 2일자 글에는 왕에게 李「단원」(存昌)의 복종(服從)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는 아주 분명(分明)하게 배교(背敎)하였고, 요술이 섞인 그 악한 都에 끌려 들어간 것을 원통히 생각한다고 증언(證言)하였으며, 자기가 가르친 모든 사람을 참다운 길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권고(勸告)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② 王은 죄인의 회개(悔改)가 아주 최근에 있은 일인 만큼, 그 개과(改過)가 적극적(積極的)이고 완전하게 된 다음에만 석방(釋放)하라고 명령을 내려 보냈다. 그러나 李「단원」(存昌)은 동월 5일에 석방(釋放)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공주감사(公州監司) 의 보고는 엄청나게 과장(誇張)된 것이었다. 李(存昌) 루도비꼬의 잘못이 어떠한 것이었더라도, 그의 나약함이 천주교인들을 배교(背敎)시키겠다고 맹세하기까지에는 이를 수가 없었다. 그 가장 좋은 증거(證據)로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그는 본분(本文)을 다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③ 그러나 그가 내포(內浦)에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위험(危險)을 덜 당하기 위하여 이사(移徙)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 해(1791)년12월 30일 밤에 그는 형에게 하직(下直)을 고하였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서른 집이 넘는 친척들뿐 아니라, 3백 가구가 넘는 그 동네의 모든 주민(住民)들도 그의 곁으로 모였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알려 준 사람이 그였고, 그들을 입교(入敎)시키고 영세(領洗)를 준 것도 그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각기 아버지나 형이나 친구를 잃는 것 같았다. 그의 출발은 참으로 비통(悲痛)한 광경이었다.
그는 홍산(鴻山) 고을에 가서 자리를 잡았고, 비록 전보다 훨씬 덜 화려(華麗)하게, 덜 드러내놓고 하였지만, 복음전도(福音傳道)의 일을 다시 시작하였다. 우리는 나중에 그의 순교(殉敎)이야기를 하는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④ 당신의 은밀한 계획(計劃)으로 이렇게 많은 배교(背敎)를 허락하신 하느님이시지만, 당신 이름의 원수(怨讐)들이 완전한 승리(勝利)를 자랑할 수 있게 되기를 허락(許諾)하지 않으셨다.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충절(忠節)의 본보기가 조선(朝鮮)의 어린 교회(敎會)를 위로(慰勞)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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