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변정담/My Writings

오늘의 교회를 생각합니다.

손드러 2010. 1. 8. 17:18

오늘의 교회를 생각합니다.

 

2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정통성을 보존, 간직하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고자 불철주야 애쓰시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 드립니다.

작금의 교회의 실상은 세태의 흐름에 따라 참으로 뜻 있는 분들의 우려하는 바대로 젊은이와 학생들의 숫자는 줄어서 교회는 점차 노령화되어 가고있고, 물질 문화의 팽배로 영신적 피폐가 더 심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러한 현상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절감하며,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몇 가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제기 하고, 교회의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오늘날 우리교회는 전교에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전국 각 본당마다 예비신자 모집에 갖가지 아이디어를 내어서 예비신자 모집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영세자가 해마다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주일 신자 수는 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세의 확장을 수치와 전체 인구대비 비율로서 가늠하고, 전교에 힘쓰고 있지만, 영세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냉담하는 숫자가 늘고 있다는 현실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사명의 일 단계는 완수했노라고 자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사람의 수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닿았을 때 참으로 열정적 신앙심을 가진 소수의 신앙의 선조 덕분에 200년이 지난 오늘날 103위의 성인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최근 30여 년의 이 땅을 얼어붙게 한 군사 철권통치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희망과 양심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교회가 톡톡히 해 낸 덕분에 상당한 기간동안 교세가 급격히 확장했으나 이젠 수적인 성장은 고사하고 오히려 냉담자 수가 날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며, 그 정도가 우려할 만한 상태에 놓여있다고 주장하면 그렇지 않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바깥으로만 눈을 계속 돌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교에 힘을 쏟지 말자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수적인 늘림에서 내부적인 충실을 기해야 할 때라는 뜻입니다.

영세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교회와의 끈을 유지한 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영세만 시켜놓으면 그만이고 그 이후는 본인의 문제라는 방관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영세 받은 자가 어디 가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라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냉담자를 회두 시킨 레지오 단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외인 권면 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고 합니다.

각 본당마다 냉담자 회두를 위한 어떤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으며, 얼마나 신자들이 그 부분에 동참하여 어떤 결과를 거두고 있는지?

물론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춰 열심히 활동하는 본당이 많을 줄 알지만 아직 까지 이를 교구 차원에서 고민하고 기도하고 해결책을 모색하여 예하 각 본당에 그 방향을 제시 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둘째로

교회가 신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인간은 정서적 존재입니다.

처음부터 교리로 영원한 생명, 구원의 신비, 영혼의 양식을 마음깊이 새겨 넣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교회에 나오면서 사랑과 마음의 감동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세월에 따라 체험의 깊이만큼 깊어지게 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옵니다.

세상에서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는 고달픈 삶에 대한 위안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가 아무런 감동 없이 싸늘한 교회 문을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교회의 현실입니다.

마음의 감화 없이 구원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고, 예수 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느낌 없이 성소도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이웃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종교적 신심은 마음의 감화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감동을 줄 수 있습니까?

신자들의 따뜻한 말, 다정한 눈길, 먼저 내미는 손, 엄숙하고 거룩한 분위기 등이 그렇게 습니다만 무엇보다도 주일 강론입니다.

신자들은 주일 강론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잘못 살아온 지난 일주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 강론에서 솟구친 감정은 영성체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요 평안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또 다음주일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나는 20대 초반까지 열심히 개신 교회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그후 영세 받고 우리교회에 다니면서 지금까지 가져온 온갖 편견에서 이제 완전히 벗어나서 참으로 모든 면에서 감사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런데 마음 한구석에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참 교회가 편리하다’라는 생각입니다.

편리한 것은 대개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도 되고, 담배나 술을 마음껏 마셔도 되고 해서 종교를 가지면 천주교에 나가겠다’는 사람들의 말을 흔히 듣습니다.

그러한 말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으로 우리교회의 편리한 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액면 그대로가 아닌 그저 편한 생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로 이 부분이 오늘날 교회의 문제를 가지게 한 원인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한 잔 술의 얼큰한 상태로 미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볼수 있는 실정입니다.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단체로 해야 할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 단체로 성호경 긋고 시작 기도하는 모습은 참 좋은데 곧이어 소주, 맥주가 어지럽게 춤을 추는 모습은 옆자리에 앉은 비신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술은 언어를 자유롭게 합니다. 따라서 이 따끔 걸러져야할 말들이 자연스레 튀어나와 주변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성스럽고 거룩한 교회에서 비켜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럼 이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기울여야 합니다.

우선 먼저 교회가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교회는 신자들의 요술 단지(?)같은 호주머니에 의존하여 그런 대로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가난한자들을 입술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속 깊이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무금이다 주일헌금이다. 각종 후원금에다 비밀헌금까지....

이런 얘기가 나오면 으레 개신교는 십일조가 어떻고, 재산까지 바치는 판에...라는 말로 짤라버립니다.

어디 예수님이 남과 비교하여 헌금하라 했는가?

가난한자 한 렙톤이 부자 한 달란트보다 귀하다 하지 않았는가?

부유한 곳에는 시비가 감돌고 가난한곳에는 사랑이 감돌게 마련입니다.

천막교회와 전세교회를 보고싶습니다.

비 맞고 떨면서 올리는 미사의 감동이 벽돌 한 장으로 쌓아 올려질 때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격스런 본당의 골격은 만들어질 것입니다.

나는 우리교회에서 참으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하여 기금을 조성하는데 어떡하면 쉽게 거둘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점입니다.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작은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려는 집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 님은 참으로 답답하게도 어려운 길만 골라 걸어 가셨습니다.

왜 우리는 안 됩니까?

다음으로 교회의 어른들의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교회의 어른은 누구입니까?

교회 어른의 근본 모델은 예수 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님은 높으신 자리를 마다하시고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어른은 스스로 종이 되신 분의 뒤를 따르겠다고 작정한 머슴입니다.

그런데 머슴노릇 안하고 주인노릇 하려는 머슴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생을 주인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가장 낮은 모습으로 머슴이 해야할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그 본분을 마다하고 주인노릇하기 위해 높아지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머슴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집이 잘될 리가 없습니다.

머슴보다 텃밭을 잘 가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누가 뭐라 해도 텃밭을 제대로 가꾸는 야무지고 바른 생각을 가진 머슴이 아쉽습니다.

나라나 교회나 가정이나 다 마찬가지로 각자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설령 마음속이 천근 만근 무겁고 괴로울지라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것도 다른 식구들을 위해 때론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뿐이겠습니까.

무슨 일이던지 성덕으로 향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떠한 행위도 성당 내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추상같은 令이 서야 합니다.

성당 경내는 묵상하는 곳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필요에 따라 흥이 넘칠 수도 있겠지만 경박한 짓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어찌 개인적인 차원에서 처리될 일입니까?

끝으로 우리평신도들의 역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교회에서 일어나는 대소간의 문제는 결국 우리 평신도의 책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인 우리들이 주인노릇 제대로 못한 결과로 앞으로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할 것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평신도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살기 위해서 입니다.

참으로 무기력하게 비극으로 끝이 난 듯한 그분의 십자가상의 어리석은 죽음을 본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느님 뜻에 따랐듯이 그렇게 우리도 그 분 뒤를 따라가고 싶어서 교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자꾸만 예수 안에서 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죽어야 된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이래서는 예수를 살 수 없습니다.

수도자나 사제들이 잘못되는 것은 대개 평신도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결, 순명, 청빈의 수도자 정신을 흩뜨리게 하는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때론 지나친 관심이 그들의 길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냉철히 생각해 볼 때입니다.

사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의 본 모습은 예수님을 닮는 모습입니다.

그분들은 그렇게 살고 싶은데 우리 평신도가 가까이 다가가서 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꾸 발목을 잡아당깁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그분들이 선택한 고독한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도록 열심히 기도해주고, 분위기를 잡아주고, 필요에 따라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오히려 그분들에게 도움이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총체적으로 정리 정돈이 필요합니다.

우리교회의 큰 머슴이신 주교님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인식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오직 각자가 현재의 모습에서 더욱 하느님을 가까이하고 닮으려는 노력으로만 가능하다는데 고민이 있습니다.

아무런 편견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만인에게 다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우리들이 작은 것을 얻으려고 큰 것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구원이신 예수님을 각자 마음의 한 가운데 모시고 덧없는 세상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산교구의 새 사목 표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는 이런 의미에서 너무도 교회의 현실을 꿰뚫은 묵상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습니다.상에서감사합니다.

(2003.11.26 손형도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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