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이란 것에 대해서 모든 종교에서 거의 일치되게 가르치는 교리중의 하나요, 특히 천주교의 구원관에 내재된 사상인, 상선벌악(賞善罰惡: 살아생전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일을 저지른 자에게는 벌을 하느님께서 주신다)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으며 특별히 개신교에서 빼버리고 있는 연옥의 존재와 죽은 이를 위한 기도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公義)의 하느님이십니다. 의인은 영원한 복을 누리고, 악인은 영원한 벌을 받음이 타당하나, 개신교처럼 죽는 순간, 믿으면 천당으로,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딱 갈라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평생을 티끌만한 죄도 없이 살았거나, 혹은 회개하고 남은 벌까지 세상에서 다 갚았다면 분명 천국(直 천당)에 들것이지만, 작은 죄를 지은 상태로 죽은 자나 아직 그 죄에 대한 벌을 스스로 갚지 못한 이는 어쩔 것인가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영혼도 완전해지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죄’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 것이요, 하느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흠이 난 상태를 말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이미 죄 사함의 은총을 받고 그 분 영광에 동참할 자녀의 위치는 얻었지만, 아주 하찮은 허물일지라도 그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느님의 공의는 반드시 갚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 우주 창공처럼 넓은 영혼의 깨끗한 바다에 속눈썹 한개 만큼의 `죄`로 인해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할까요? 답은 No입니다. 영혼이 충분히 정화되어 승천할 때까지 잠벌(暫罰: 남은 벌)의 단련을 받는 곳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연옥(燃獄)입니다. 이 중간 장소의 영혼들은 이제 자유의지를 다 소진하였기에 스스로는 어떤 힘도 없지만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기도로 큰 도움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존재의 교리에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의 교리까지 포함됩니다. 그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국 개신교계의 첫 목사 반열에 드시는 故 정춘수 목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개종자들의 한결같은 증언은 “천당 아니면 지옥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던 개신교의 교리를 청산하고 성(聖)교회의 품에 안기고 보니, 연옥교리가 주는 위로와 안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자기의 죽음 앞에서는 무섭지 않을 수 없고 사후세계가 궁금치 않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의 종말론은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사항이 될 뿐 아니라, 장례식 때 보는 종교예식과 이를 행하는 종교인들의 태도에서 그 종교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천주교인들의 장례식을 보고 감명 받아 입교하는 대 세자 가족이나 그 밖의 분들을 많이 만나곤 합니다.
어떤 독실한 개신교 집안의 할머니 한 분이 목사님을 찾아 아무래도 천주교로 개종해야 되겠다는 말을 하자 깜짝 놀란 목사님이 까닭을 여쭈니, “여기서야 고작 ‘이제 죽어 천당에 갔으니 얼마나 좋습니까?’하며 찬송가나 부르고 울지도 못하게 하지만, 천주교는 보니 가족, 친지며 온 성당 교우들이 저리도 많이 계속 모여들어 쉬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지성으로 슬퍼하며 빌어주는데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난 이제 그만 성당으로 갈라요.”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도 똑같이 그리 해 드릴게요.”하며 사정사정 붙잡더라는 얘기가 우스개삼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위안의 원천인 연옥교리는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 명백히 선언되어 내려 옴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소위 종교개혁자들은 의심을 품고 배척하였으니 정말 모를 일입니다. 구약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신약에도 암시되어 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도 한결같이 가르쳤고, 초세기 동서교회의 고래(古來) 경전에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 우리 이성에도 합치되고 인간 감성과 영혼에 크나 큰 위로와 안도, 광명을 주는 교리인 것입니다.
연옥 교리는 유다인(유대인)들도 충실히 신봉하여 구약성서에 명확히 언급되고 있으니, “그리고 유다(유대)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로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2마카 12:43-45) 유다 마카베오가 적과의 교전 후 전사자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라 명령한 이 구절의 내용은 너무나 명백하여, 따로 어떤 해설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16세기 반역의 무리(프로테스탄트: 일부의 소위 종교개혁가)들은 이를 두고, 몇 구절 바꾸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 명백한 뜻을 흐릴 수 없음을 깨닫자 외람되게도 마카베오서 모두를 성서에서 빼 버렸습니다. 음험한 자가 반대편 증인을 암살하고, 예수님의 기적으로 부활한 라자로를 살해하여 예수님 권능의 증거를 말살하려 한 유다인의 심술이나 악랄함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카베오서를 감히 외경이라 주장합니다. 자선의 덕행을 무시한 '오직 믿음만으로'를 위해 야고버서를 신약에서 삭제하고(지금은 회복되었지만…….) 연옥 등을 부정키 위해 마카베오서 등을 구약에서 빼버렸다 하더라도 그 사실성(史實性) 만큼은 부정치 못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문서로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이상, 유다 민족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희생, 봉헌한 엄연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오시어 우선 유다 율법 중 쓸모없는 것은 빼버리고, 조작된 전습(傳習 : 전해오는 관습)은 폐기해 정화시키셨습니다. 안식일만을 위해 남을 돕지도 못하게 하던 바리사이파들의 위선과 모순을 낱낱이 지적하고 준엄하게 꾸짖으셨기도 했습니다. (마태 23장 참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다인의 전통과 관행인 사후 중간 장소를 믿는 마음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행위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야단치신 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꾸짖으시기는커녕, 오히려 '연옥'의 존재에 관해 아주 똑똑한 언급을 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예수님을 자신을 부르던 말)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32)
성령을 거스른 죄는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말 속에는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는 의미가 분명히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 천국은 티끌만한 죄라도 있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지옥은 그야말로 영원한 형벌만이 존재하는 곳이므로 사죄(죄의 용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이 가는 그 곳은 어디일까요?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세에서 용서받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요? 바로 연옥인 것입니다. 연옥은 일종의 중간 장소로서 죄의 정련(淨煉 : 정화시키는 단련)을 받는 곳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상의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며 공로가 큰 사람이나 착한 이들은 훈장을 타거나 법의 보호아래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소소한 일반 잡범이나 중죄인들은 단기에서 무기까지 제재를 당하며 교도소에서 일정한 벌을 받습니다. 죄에 대한 상응한 대가를 치른 후에는 다시 자유를 회복하게 됩니다.
개신교에서 가장 떠받드는 사도 바오로(사도 바울)도 연옥을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들어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 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1고린 3:13-15) 영혼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나, 결백해질 때까지 연옥불 속에서 충분히 단련을 받는 낭패만큼은 어쩌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개신교인들처럼 성령과 직방으로 통하여 내 심령을 울리고 둔한 머리를 깨우쳐 내 마음이 이르는 대로 뜻을 깨닫고, 계시 받아 해설하는 개인의 의견이 결코 아닙니다. 앞서 마카베오서처럼 정, 위경의 판정은 오직 가톨릭교회의 정통성에 입각한, 오래고 변함없는 권위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고, 결정되어 왔으며, 성서 구절 하나하나도 개인의 호, 불호나 사감이 배제된 채 초대 교부로부터 확인되고 검증된 해석만이 인정되고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이 유서 깊은 연옥 교리를 누가 감히 배척한다 말입니까?
연옥 에 관한 교부들의 증언은 너무 많아 가장 저명한 몇 가지만 들겠습니다. 2세기 테르툴리아노는 “충실한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 기일에 기도드리기를 게을리 않는다. 만약 이를 실행치 않는 자는 가식의 삶을 사는 자로 남편을 배신하고 버리는 자이다.”하였고 (De Monogam.,n. X) 4세기경 유명한 교회사학자 에우세비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례 광경을 묘사하기를 “황제의 시체는 높은 관대에 안치하였고, 제관들과 군중은 눈물과 비탄 속에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와 제물을 봉헌하였다. 이는 황제 평생소원의 성취이니, 그는 일찍이 자기의 죽음 후 교우들이 모여 자기를 추억하며 기도해 주기를 간절히 바래, 콘스탄티노플에 대성전을 건립하였다.”라고 했습니다. (Euseb., B.iv,c.71) “나의 형제와 친구여, 향료는 하느님께 바치고 죄 중에 잉태된 나는 비애 속에 매장하라. 다만 잊지 말고 부디 기도해 주기를 부탁한다.” (4세기의 성 에프렘) 성 예로니모는 동무 팜마키우스 아내의 상을 맞아 “다른 남편들은 죽은 아내의 묘를 아름다운 꽃으로 꾸미지만, 우리 팜마키우스는 바울리나의 거룩한 묘에 희사의 향유로 장식한다.”고 조사하며 죽은 이를 위해 대신하는 자선의 덕능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사도들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미사)중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라 명한 것은 참으로 지당하다. 기도가 저들에게 실로 유익함을 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신 까닭이다.”하며 연옥 교리가 사도들에게서부터 바로 인준되어 왔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Faith of Catholics, Vol. II) 5세기의 위대한 성인, 효성 지극한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이신 또 한 분의 위대한 성녀, 모니카의 “내 육체는 아무 곳에나 묻어라. 어디에 어떻게 묻히든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오직 하나 언제든지 주의 제단(제대)앞에 설 때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한 유언을 따라 다음과 같은 눈물의 기도를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의 죄를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허락하여 주소서. 또한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교우 및 같은 사제 = 신부, 주교)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를 꼭 기억하게 도와주소서.” (고백록 ix) 추리고 추려 연옥 영혼을 위하는 기도 관습에 대한 교부들의 일치된 견해와 실증을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개신교에서 가장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불후의 기록, 참회록(고백록 Confessiones)의 구절조차 바꾸거나 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성서만을 부르짖을 때, 이 구절은 넣고 저 구절은 뺀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내 교단, 내 교리, 내 취향, 내 처지와 어긋나고 불편하더라도 믿고 따라야 하며, 아무나 임의로 보태거나 뺄 수도, 편의대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의혹과 거북함을 깨달았다면 바로 진리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연옥의 심오한 도리는 최근의 발명도 아니요, 어느 천재의 공상도 아닙니다. 사도로부터 내려 오는 초대교회와 유다의 관습과 법령에 기초하고,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인들의 확실한 믿을 교리로써 교부들과 학자들이 다투어 보증한 경건하고 살아있는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또한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 역시 허황하고 추상적인 원리로서가 아니라 천주교인들이 2,000년을 두고 다른 기도와 함께 날마다 반드시 실행해 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실천 덕목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저녁 기도와 경문(성무일도와 미사경본)을 바치고, 미사성제를 드릴 때 마다 꼭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께 간구하고 청원함은 물론, 밥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천주교인들이 즐겨 바치는 묵주기도 역시 매 순간 연옥의 영혼들을 기억하며 하느님 대전에 끊임없는 기도의 연결고리를 바치고 있습니다. 자부하건데, 세상의 어떤 종교도 우리 천주교만큼 죽은 조상과 부모(또는 형제, 친척, 친구, 친지)에게 효도하고,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정성을 바치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천주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이런 교리를 지니고 죽음 너머에까지 한없는 위로와 희망을 받는 천주교인이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