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스: 스페인어/포: 포르투갈어/일: 일본어/영: 영어/인: 인도네시아어/라: 라틴어/말: 말레이시아어 /이: 이탈리아어/바: 바스크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스: Francisco de Jaso y Azpilicueta 또는 Francisco de Gassu y Javier/ 일: フランシスコ・デ・ザビエル/1506-1552)는 스페인 나바라(Navarra) 출신의 가톨릭교회의 사제,
천주교 선교사, *예수회(Compañía de Jesús)의 창립 멤버 중 1명.
*예수회(스: La Compañía de Jesús/라: Societas Iesu): 가톨릭교회의 남자수도회. 1534년 8월 15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San Ignacio de Loyola/1491-1556)와 파리 대학의 학우였던 6명의 동지(복자 페드로 파브로(Beato Pedro Fabro/1506-1546)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an Francisco Javier/1506-1552), 디에로 라이네스(Diego Laynez/1512-1565), 알폰소 살메론(Alfonso Salmerón/1515-1585),니콜라스 보다딜랴(Nicolás
de Bobadilla/1507-1562), 시몬 로드리게스(Simón Rodrigues/1510-1579)가 몽마르트르의 언덕의 상 드니 성당에 모여, 미사를 봉헌하며 생애를 하느님께 바칠 것을 서원(誓願)한 것이 시초. 종교개혁 이후, 예수회는 ‘교황의 정예(精銳) 부대’ 라고 불렀다(로욜라가 기사(騎士) 출신이었기 때문). 현재 112개국의 2만 여명이 예수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가톨릭의 남자수도회로서는 최다. 주요활동은 교육, 선교사업이나 사회 정의 실천이 3개의 활동축으로 되어 있다.
[고베시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초상화. 하비에르가 시성된 해(1622년)부터 후에
공경되는 그림으로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옛 영토 센다이지(千提寺/현재 이바라키
시(茨木市)의 옛 저택에 전해진 ‘닫혀진 상자’에 은닉(隱匿)되어 있었던 작품으로, 1920년의 조사에서 ‘마리아 15현
의도(マリア十五玄義図)’와 함께 발견되었다. 금교령으로 파기된 성화 중, 그 당시에 만들어진 보기 드문 에도시기
의 서양화로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명: 프란치스코 데 하스 아스필쿠에타 아톤도 이 아냐레스 데 하비에르(Francisco de Jaso Azpilcueta Atondo y Aznáres de Javier)
생년월일, 출생지: 1506년 4월 7일. 스페인(에스파냐(España) 나바레 주(Navarre) 하비에르 성(Castillo de Xavier).
사망월일, 사망지: 1552년 12월 3일(46세). 중국 광둥성(広東省) 상천(샹추안)섬 (上川島)
시복(諡福): 1619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
시성(諡聖): 1622년 3월 12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1)
축일(대축일): 12월 3일.
포르투갈 왕 *후안 3세(Juan III de Portugal)의 의뢰로 인도 고아(Goa)로 파견되어, 그 후 1549년에 일본에 처음으로 그리스도교(특히 천주교)를 전파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후안 3세(스: Juan III de Portugal. 1502-1557/재위: 1521-1557): 포르투갈의 국왕. ‘경건한 왕(Piedoso)' 이라고도 부른다. 마누엘 1세(Manuel I de is/1469-1521)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Fernando el Católico)와 카스틸리야의 이사벨라 1세(Isabel la Católica)의 3번째 왕녀 마리아(María de Aragóny Castilla/1482-1517)의 아들. 1536년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1468-1549. 220대)의 교서에 의해, 포르투갈에 이단심문소를 설립하였고, 예수회의 창립의 소식을 듣고,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의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할 선교사를 파견하도록 의뢰한 왕. 또, 일본이나 인도 등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며, 성 바오로를 뛰어넘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 신앙으로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톨릭교회의 聖人으로, 기념일(대축일로 지냄)은 12월 3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가톨릭의 선교를 의뢰했던 포르투갈 왕 후안 3세]
'하비에르(Xavier)‘ 라는 이름의 유래
‘하비에르(Xavier)'는, *바스크 어(euskara)로 ’새로운 집‘ 이라는 의미인 Etxebarria(’집‘(etxe)+'새로운’(barria)의 인도-로망스 풍 특유의 사투리로, 그가 태어난 생가가 있는 성(城)(*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 현재 나바라 주, 바스크 어로는 나팔로나 왕국)의 이름이기도했다.
*바스크 어(바: euskara): 계통을 알 수 없는 고립어(Language isolate/또는 독립된 언어). 현재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있는 바스크 민족을 중심으로 사용되는 언어. ‘바스크’ 라는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어 ‘basque'에서. 더 확실히는 로마 제국 시기에 현재 나바라나 아라곤 에 존재한 바스콘 사람(Vascone)에서 유래.
사투리(방언)은 크게 7개로 분류되지만, 음운(音韻), 형태(形態), 어휘(語彙)의 지역적인 변이(變異)가 비교적 크다. 알파벳은 라틴 문자 표기가 일반적. 한때 스페인에서는 프랑코(Francisco Franco y Bahamonde/1892-1975)의 독재 기간 동안 바스크어가 사용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나바라 왕국(스: Reino de Navarra/바: Nafarroako Erresuma): 중세 이베리아 반도(스: Península Ibérica) 북동부 팜플로나에서 부흥했던 왕국. 824년 바스크 인의 대장이었던 아리스타가 팜플로나(Pamplona)에서 왕으로서 선택되어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란을 꾀한 것에 의한다. ‘나바라’의 이름은, 7세기 스페인에서 서고트 족 시대의 종언(終焉)을 알렸을 무렵부터 등장했다.
Chavier나 Xabierre 등으로도 엮는 경우도 있지만, Xavier는 포르투갈어로 발음은 샤비에르. 당시 카스틸리야 어(현재 스페인어)로도 같이 묶어서 발음은 ‘샤비에르’ 였다고도 추정하고 있다.[1][2]
[1] 고베 시립 박물관(神戸市立博物館) 소장의 하비에르 초상(머리부분 참조)에는, ‘산후라누시스코자베리 우산카라멘토(さんふらぬしすこさべりうすさからめんと(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신비의 흔적)’ 이라고 씌어져 있다. 이름은 로망스어 읽기에 가깝지만, 성(姓)는 라틴어 읽기에 가깝다.
(http://www.city.kobe.lg.jp/culture/culture/institution/museum/meihin/043.html)
[2]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9. 에도시대 중기에 활약한 하타모토(旗本/쇼군 직속의 10,000석 이상의 녹봉(祿俸)을 받던 무사계급), 정치가, 학자)의『서양기문(西洋紀聞)』에는, ‘むかし豊後国に、鬼怪ある家あり。ポルトガル人の来れるを、かしこに按置す。ポルトガル人、其壁上にクルスをかきしに、そのゝちは彼怪やみぬ。国司此事をきゝて、不思議の事におもへり。一年を経し後に、
フランシスコシヤヒヱル来たりしかば、国司やがて、其法をうけしといふ。
そのフランシスコシヤヒヱルといふは、ポルトカルの語也。ラテンの語に、フランシスクスサベィリウスといふ、これ也’ 라고 되어 있다.
(실력이 모자란 탓에 옛 일본어 문헌 번역을 할 수 없음을 양해(諒解)해 주세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지음, 宮崎道生 교정(校訂) 『서양기문(西洋紀聞)』
(개정판) 헤이본샤(平凡社)(동양문고(東洋文庫), 1968년, 72항. 현대 스페인어에서는 ‘하비에르(Javier)'. 단지, 그는 바스크 어 및 나바라 어 등 2개 나라의 말을 구사(驅使)했다고(Bilingual) 추정한다.
이전 일본의 천주교회에서는 관용적으로 ‘자베리오(ザベリオ)’(이탈리아 어 읽기로부터. ‘사베료(サヴェーリョ)’로부터 가까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예: 아래의 ‘성 사베료 선교회(聖ザベリョ宣教会)’, ‘사베료 학원(ザベリョ学院)’). 그 외의 일본에서는 ‘사비에르(サビエル)’도 사용되고 있다. (예: ‘야마구치 사비에르 기념성당(山口サビエル記念聖堂)’).[3] [3] 과거의 표기로서는 그 밖에 ‘자비에(ザビエー)’ 등이 있다.
예: 幸田成友 지음. 『성 프란치스코 자비에 소전(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ー小傳)』(1941년간).
생애 청년기 시절까지
1506년 4월 7일 출생한 하비에르는, 현재 스페인의 나바라 주, 팜플로나(Pamplona)에서 가까운 하비에르 성(Castillo de Xavier)에서 지방귀족의 집안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5남매(위로 형 2명, 아래로 여동생 2명/막달레나(Magdalena), 아나(Ana), 미구엘, 후안 엘 미스모(Miguel, Juan y él mismo) 중 막내아들로, 아버지는 돈 후안 데 하스(Don Juan deJaso/?-1515), 어머니는 도냐 마리아 데 아스필쿠에타(Dõna Maria de Azpilcuet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나바라 왕 후안 3세(프랑스 귀족 아르브레 집안 출신)의 신뢰가 두터운 가신(家臣)으로서 재상(宰相)을 맡았고, 프란치스코가 탄생했을 무렵, 곧 60세를 넘겼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태어난 스페인 나바라 주에 있는 하비에르 성(Castillo de Xavier)]나바라 왕국은 작은 나라이면서도 독립을 지켰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카스틸리야=아라곤)의 분쟁 지역이 되어, 1515년에 드디어 스페인에 병합이 된다. 아버지 후안은 격동의 시기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하비에르 일가는 바스크 인과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서 복잡한 전투에 농락(籠絡)당하게 된다.
1525년, 19세에 명문 *파리 대학(Université de Paris)에 입학. 성 바르바라 학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자유롭게 학예를 익히며, 철학을 배웠을 때에, 같은 방에는 프랑스 출신의 젊은 페드로 파브로(Pedro Fabro/1506-1546)가 있었다. 그곳에서 같은 바스크로부터 온 37세의 전학생 이니고(Iñigo/이냐시오의 애칭)도 참가하게 된다. 이니고는 팜플로나의 전투에서 한쪽 발을 다쳐 상이(傷痍) 군인으로서 고향 로욜라 성에서 요양(療養) 후, 스페인 아르칼라의 대학을 거쳐 파리대학 몽테뉴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파리 대학(프: Université de Paris): 프랑스의 파리, 클레테이유(Créteil) 및 베르사이유(Versailles)의 3개의 대학구(大學區)에 있는 13개의 대학의 총칭. 많은 노벨 수상자를 비롯하여, 정치학, 과학, 물리학, 신학 등의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다수 배출 또,예술읙 교육기관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12세기 전반부터, 1970년대에 제1대학-13대학까지 독립한 대학군에 편제(編制)되었다.
[하비에르가 학문을 닦았던 파리 대학의 모습]
1529년, 하비에르의 어머니가 사망. 4년 후, 간디아의 여자수도원장이었던 여동생도 사망한다.
이 시기 하비에르는 철학 과정의 최종 과정에 들어왔지만, 이냐시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아, 성직자를 희망하게 된다. 이냐시오의 감화를 받은 청년들이 모여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르의 성당에서 하느님께 생애를 봉헌한다는 서원을 드렸다. 이것이 ‘몽마르트르의 맹세’이다. 이 때의 미사는, 유일하게 사제의 자격을 가졌던 파브로가 집전했다.
[하비에르에게 영적인 감화(感化)와 영향을 미쳤던 예수회의 창립자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몽마르트르의 성당=상 드니 주교좌 성당(프: Basilique de Saint-Denis): 파리 근교의상 드니(Saint-Denis)에 위치한 역대 프랑스 군주의 묘지가 있는 성당. 1966년부터는 상드니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사용. 이곳에서 순교했다는 상 드니(성 디오니시우스St.Dionysius/?-250)를 주보성인으로 하고
있다. 대수도원장 슈제르(Suger/1081?-1151)의 지휘 아래, 1136년 시작, 1144년 6월 11일에 봉헌. 건축학적으로도 획기적인 건축물로서, 회랑은 고딕 건축 초기의 주 양식, 후진(後陣) 또는 동쪽 끝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이냐시오와 하비에르 등 파리 대학의 7명의 동지들이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다고 서원한프랑스 몽마르트르에 있는 상 드니 주교좌 성당(Basilique de Saint-Denis)의 모습]
일동은 교황 바오로 3세의 인정과 후대를 얻고, 수품 허가를 수여받아, 1537년 6월 24일, 베네치아(Venezia)의 교회에서 빈센테 닉산티 주교에 의해, 하비에르도 이냐시오 일행과 함께 사제 수품을 받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순례의 맹세를 하였지만, 국제정세의 악화로 이루지 못하였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선교 여정 그래프.
1541년 4월-8월: 포르투갈(Portugal)-모잠비크(Mozambique). 1542년: 모잠비크-인도(India).
1545년: 인도-말라카(Malacca). 1546년: 말라카-몰루카(Molucca). 1547-48년: 몰루카-인도.
1549-52년: 인도-일본(Japan) 왕복 선교여행. 1552년: 인도-중국 광둥성 상치안 섬] 아시아로의 선교 여정으로의 출발
당초보다 세계선교를 주제로 했던 예수회는, 포르투갈 왕 후안 3세의 의뢰로, 회원을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인도 서쪽 해안의 *고아(Goa)에 파견하게 되었다. *고아(영: Goa): 현재 면적 3,702㎢의 인도 서해안의 주(州). 만도비 강(Mandovi River)의 하구에 있는 섬에 위치하고, 천연의 좋은 항구를 두고 있다. 16세기 초에는 이슬람 왕조였던 비샤푸르 왕국(Bijapur Sultanate/1490-1686. 수니파 이슬람 여러 왕조의 하나)의 중요 도시였지만 1510년 2월 포르투갈 왕국의 인도 총독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1453-1515)가 1,000명의 포르투갈 병사를 이끌고 같은 해 11월 완전 점령. 그 후 1974년 포르투갈 자국 내의 혁명으로 독립할 때까지 450년 가까이 식민지 상태에 머무르게 되었다.
포르투갈 통치 당시의 건축물, 세계문화유산 등이 많이 존재하며, 해변이 아름다워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1509년의 고아(Goa)의 모습]
[고아의 차포라(Chapora) 강변의 아름다운 저녁 노을 풍경]
하비에르는 시몬 로드리게스와 함께 포르투갈 경유로 인도로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로드리게스가 리스본에서 여정을 중지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3명의 예수회 회원(미셀 파울로, 프란치스코 만실리아스, 디에고 페르난데스)와 함께 1541년 4월에 리스본을 출발했다.
8월에 아프리카의 모잠비크Mozambique)에 도착,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1542년 2월에 출발, 5월 6일 고아에 도착. 그곳을 거점으로 인도 각지를 선교하며, 1545년 9월에 *말라카(Malacca)로, 더욱이 1546년 1월에는 몰루카(Molucca)에 이르러 선교 활동을 계속하며,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이끌었다.
*말라카(영: Malaca/말: 멜라카(Melaka): 말레이시아의 항구도시. 말레이 반도 서쪽 해안 남부에 위치하여, 동서교통의 요충 말라카 해협에 접해있다. 면적 97.85㎢. 약 45만의 인구를 두고 있다. 항구도시고 향신료의 동서 무역에서 중요한 거점지였기 때문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2차 대전 중에는 일본군에게 점령을 당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의 총독 아폰소가 정복. 동남 아시아에서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거점지였고, 요새나 가톨릭교회가 건설되어 사제관이 상주해 있었다. 이곳 역시 문화유산이 많고 관광지로서 되어 있다.
2008년 조지타운(George Town)과 함께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말레이시아의 말라카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 이곳에는 하비에르의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말라카로 돌아와, 1547년 12월에 만난 사람이 *카고시마(鹿児島) 출신의 *야지로우(ヤジロウ/안지로(アンジロー)라는 일본인이었다.
*카고시마(鹿児島),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면적 9,188.70㎢, 약 170만의 인구를 두고 있고
쿠마모토 현(熊本県), 미야자키 현(宮崎県), 바다로는 오키나와 현(沖縄県)을 접하고 있는 큐슈(九州) 남부에 위치한 일본의 도도부현(都道府県). 큐슈 섬 남쪽에는 떨어진 섬(離島/사츠난 제도(薩南諸島)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 큐슈 섬의 부분은 현 본토(県本土)라고도 표현되고, 2개의 반도(사츠난(薩摩), 오오스미(大隅)가 있다. 남북의 거리는 600Km, 해안선은 2,722Km에 이른다.
현청 소재지는 카고시마 시(鹿児島市). 세계문화유산 야쿠 섬(屋久島)이나, 타네가시마 우주센터(種子島宇宙センター), 키리시마 산(霧島山) 등이 있고, 자연, 문화, 관광, 산업 등에서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지역. *야지로우(일: ヤジロウ.弥次郎/1511?-1550): 야지로(ヤジロー), 안지로우(アンジロウ), 서양식으로는
안젤로(Angelo/‘천사’라는 뜻)라고도 읽는다. 사료(史料)상 확실히 최초의 일본인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보고 있는 인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통역자, 하느님(Deus) 개념이나 성구(聖句) 등의 번역자로서 활약하여, 일본(서일본)에서 전교, 선교 활동에 종사했다. 출신이나 본명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설로는 호족(豪族) 네지메 씨(禰寝氏) 쇼케(庶流/종가 없이 본가에서 멀어진 일족의 명칭. 주로 일본의 봉건시대에서 보여진 혈족단. 서자(庶子) 집안) 이케하타 씨(池端氏)의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 개신교 신자인지, 천주교 신자인지는, 프로이스 등의 증언이 남겨진 채로, 하비에르가 떠난 후, 갑자기 선교 활동을 포기하고 해적 생활로 돌아가, 승려들의 박해를 받고, 중국 부근에서 해적들에
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1548년 11월 고아에서 선교 감독이 된 하비에르는, 다음 해인 1549년 4월 15일, 예수회 회원 코스메 데 토레스 신부(Cosme de Torres/1510-1570),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ández/1526?-1567) 수사(겸 선교사제), 마누엘이라는 중국인, 아마돌이라는 인도인, 고아에서 막 세례성사를 받은 야지로우 등 3명의 일본인과 함께 *정크선(Junk Ship)으로 고아를 출발, 일본으로 향하였다.
*정크선(영: Junk Ship): 중국의 선박 양식의 하나. 예전부터 사용되어 온 목조 범선(帆船)이지만, 화물, 승객의 수송 업무에 대해서는, 19세기 이후 증기선이 보급되면서 쇠퇴되었다. 중국어로 ‘배(船/츄앙)’이 전와(轉訛)된 말레이어 ‘Jǭng', 더욱이 그것이 전와된 스페인어, 포르투갈 어의 ‘Junco' 에서 유래.
일행은 상천섬(上川島/광둥성(広東省) 광먼 시(江門市)를 경유하여 야지로우의 안내로 우선은 사츠마(薩摩)의 *사츠마 반도(薩摩半島)의 *보우노츠(坊津)에 상륙, 그 후 허락을 얻어, 1549년 8월 15일 현재 카고시마 시(鹿児島市)의 *기온노스쵸(祇園之洲町)에 도착했다(이 날은 천주교 전례력의 성모 승천 대축일(성모 피승천 축일)이었기 때문에, 하비에르는 일본을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사츠마 반도(薩摩半島): 큐슈 반도의 하나. 큐슈의 남서쪽 끝에 있으며, 동쪽 해안은 카고시마 만(鹿児島湾)을 끼고 마주 대하고 있으며, 오오스미 반도(大隅半島)와 마주하고 있으며, 서쪽 해안 및 남쪽 해안은 동지나해(East China Sea)를 접한다. 나가사키바나(長崎鼻)가 있고, 그 부근에 활화산인 카이몬다케(開聞岳/표고 924m), 모래찜질로 유명한 이즈부키 온천(指宿温泉)이 있다.
*보우노츠(坊津): 현재 카고시마 현 미나미사츠마 시(南さつま市) 보우노츠쵸(坊津町)에 해당하는 지명. 옛 항구명. 고대부터 사츠마번(薩摩藩)의 중반 무렵의 오랜 시기에 걸쳐서 해상 교통상의 요지였고, 아노츠(安濃津), 하카타(博多)와 함께 니혼산신(日本三津)이라고 불렀다.
*기온노스쵸(祇園之洲町): 카고시마 시에 있는 쵸(町/일본의 가장 작은 행정단위)의 이름의 164명의 작은 마을.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동쪽의 해안을 묻은 것에 이름이 유래. 이나가와 강(稲荷川)의 하구에 접한 먼 곳까지 물가가 얕은 지역이었다. 하비에르가 이곳 주변을 통해 일본에 첫발을 내딛은 곳으로 보고 있다.
[하비에르가 맨 처음에 도착했던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카고시마 시(鹿児島市)
기온노스쵸(祇園之洲町)의 모습. 국토교통성의 항공사진 촬영 ]
1549년 9월에는, 이쥬인성(伊集院城)(*이치우지 성(一宇治城)/현 카고시마 현 히오키 시(日置市) 이쥬인쵸(伊集院町)에 위치)에서 사츠마의 *수호 다이묘(守護大名)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를 알현(謁見), 선교의 허가를 얻게 된다.[4]
[4] 선교사의 기록에서는, 하비에르가 시마즈 타카히사를 알현한 장소는 ‘카고시마에서 5,6레구아(Legua/거리의 단위. 1레구아는 약 4Km.약 20-30Km)의 땅‘ 이라고만 기록되고, 지명은 확실히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치우지 성이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 밖에도 시미즈 성(清水城)(카고시마 시)라는 설도 있다.
*이치우지 성(一宇治城): 옛 사츠마국 이쥬인에 존재했던 중세의 산성. 카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85-1333)의 이쥬인 씨(伊集氏)에 의해 축성(築城)되었다고 한다. 그 후, 시마즈 씨(島津氏)를 이어간다고 말한 이쥬인 씨 권력을 배경으로 확충되었지만,1450년 3월 시마즈 타다쿠니(島津忠国/1403-1470)는 이쥬인 일가를 추방. 표고 144m의 성산(城山)이라는 자연의 산을 이용해서 지었다. 크고 작은 30여개의 요새 울타리로부터 구축되어 있다.
*수호 다이묘(守護大名): 군사, 경찰뿐만 아니라, 경제적 권리도 획득하여, 한 나라 내에 영역적, 일원적인 지배를 강화한 무로마치 시대의 수호(守護)를 나타내는 일본 역사의 개념. 15세기 후기-16세기 초기 무렵에 일부는 전국(戦国) 다이묘가 되고, 일부는 몰락하기도 하였다.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1514-1571): 사츠마의 수호, 전국 다이묘. 시마즈 일가의 15대 당주. 시마즈 일가는 명나라나 류큐 왕국에 교역을 하였고, 포르투갈 배로부터 총이나 서양말을 수입하여, 산업을 일으켰다. 타카히사는 인도 총독에게 친서를 보내는 등 외교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549년에 일본을 찾아온 하비에르를 만난 후, 천주교 신앙의 전교 허가를 내렸지만 절이나 코쿠진(国人/토착 영주)의 격심한 반대로 후에 천주교 전파를 금지하게 된다.
*후쿠쇼우지(福昌寺): 이전에 카고시마 시에 존재했던 조동종(曹洞宗)의 큰 사찰(寺刹). 사츠마 번주(藩主) 시마즈 씨의 조상을 모신 사찰이었지만 메이지(明治) 초기 폐불훼석(弊佛毁釋) 정책에 의해 파괴되었다.
1394년, 시마즈 일가 제7대 당주 시마즈 모토히사(島津元久/1363-1411)에 의해 건립. 그 후 대대로 시마즈본 종가집의 조상을 모신사찰이 되었다. 하비에르는 카고시마에 있을 동안 후쿠쇼우지에서 머무르게 된다. 하비에르는 사츠마에서 전교 중에, 후쿠쇼우지의 주지승(住持僧)이었던 닌지츠(忍室)와 함께 종교적인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후에 일본 최초의 유럽 유학생이 된 *카고시마의 베르나르도(鹿児島のベルナルド) 등도 이 시기에 만나게 된다.
*카고시마의 베르나르도(鹿児島のベルナルド/?-1557): 하비에르가 최초로 세례성사를 베푼 일본 최초의 천주교 신자. ‘베르나르도’는 그의 세례명이고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의 일본인 천주교 신자로서 로마 교황을 알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타카히사가 승려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쿄(京)로 올라간다.” 는 이유로 사츠마를 떠났다(승려와 하비에르 일행의 대립을 염려했던 타카히사의 조취를 취했다는 설도 있다).
*쿄(京): ‘쿄’는 그 당시 일본의 수도이자,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토(京都)를 가리킨다. 교토의 의미는 동아시아에서 아주 옛날에, 역사적으로 ‘하늘의 아들(天子/여기서는 일본의 천황을 가리킴)이 사시는 곳’ ‘수도(首都)’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사용되었고 50대 천황 칸무(桓武/737-806)가 794년 천도(遷都),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1543-1616)가, 에도(江戸/지금의 도쿄(東京)로 옮길 때까지 809년 동안 일본의 중심지였다.
1550년 8월, 하비에르 일행은 *히젠(肥前) *히라도(平戸)에 들어가,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히젠(肥前): 1195-1534년에 현재 사가 현(佐賀県)과, 쓰시마 시(対馬市)와 이키 시(壱岐市)를 제외한나가사키 현(長崎県)에 존재했던 히젠국(肥前国)을 가리킨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말기에, 포르투갈, 스페인의 선교사들이 계속 찾아옴에 따라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장소의 한 곳이 되어, 텐쇼 소년 사절단(天正少年使節団)을 보내게 되었다.
*히라도 시(平戸市): 나가사키 현 북서부의 히라도 섬(平戸島)과 그 주변을 행정구역으로 하는 시로 나가사키 현과 큐슈 본토의 시로서는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면적 235.63㎢, 약 34,000명의 인구를 둔 도시. 쇄국 전에는 중국, 네덜란드 등과 교역을 했던 국제 무역 항구였다. 예전 히라도 시는 히라도 섬과, 타쿠 섬(度島) 등의 떨어진 섬을 행정구역으로 하였지만, 2005년 10월 1일 주변의 키타마츠우라 군(北松浦郡), 타비라쵸(田平町), 이키츠키쵸(生月町), 오오시마무라(大島村)와 병합.
[하비에르가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였던 히라도 풍경. 히라도 성(平戸城)에서 바라본 히라도의 좁은 해협의
모습이고 마주 보고 있는 건너편 장소는 키타마츠우라 반도(北松浦半島)]
같은 해 10월 하순에는, 교우의 일을 돕던 *토레스 신부(Cosme de Torres/1510-1570)에게 맡기고, 베르나르도, 페르난데스 수사 신부와 함께 교토를 목표로 하여 히라도를 떠난다.
*코스메 데 토레스(스: Cosme de Torres/1510-1570): 하비에르와 같은 시대에 일본을 찾아왔던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 예수회 소속 사제. 하비에르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18년에 걸쳐 일본에서 선교. 토레스가 목표로 했던 선교지 현지 문화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적응주의’는, 당시 유럽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상이었고,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전파의 성공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카타(博多)에 머무른 후, 11월 초순에 *스오우(周防) *야마구치(山口)에 들어가, 허가 없이 선교 활동을 한다.
*하카타(博多): 큐슈 북부 치쿠젠 국(筑前国/현재 후쿠오카 현(福岡県)에 해당하는 지역)에 구축된 하카타 만(博多湾)을 접한 항구도시.고대부터 역사를 가지고, 중세에는 무역도시로서 번영. 현재는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 시 하카타 구 북서부의 한 지역. *스오우(周防): 1235-1551년에 현재 야마구치 현(山口県) 반 동남부에 존재했던 나라. 스오우 국(周防国).
*야마구치 시(山口市): 츄고쿠 지방(中国地方/혼슈(本州)의 서부에 위치한 톳토리(鳥取), 시마네(島根), 오카야마(岡山). 히로시마(広島), 야마구치(山口)의 5개 현 지역) 서부(큐슈, 야마구치 지방 북동부)의 면적 1,023.31㎢, 약 19만 8천명의 시. 야마구치 현 현청 소재지로서 일본 국내에서 브라질리아, 캔버라, 미국의 여러 주도(州都)처럼 정치, 행정, 문화로 보기 드물게 특화된 곳이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서쪽의 교토’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스오우의 수호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를 알현하기도 했지만, *남색(동성애)을 죄로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오오우치의 노여움을 사서, 같은 해 12월 17일에 스오우를 떠난다.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1507-1551): 스오우 국(周防国)의 오오우치 씨(大内氏)의 제16대 당주. 문화적인 관심이 강하였고, 문치(文治)주의적인 전국(戦国) 다이묘로서 알려졌고, 그가 당주로 있었던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로서 매우 번영을 누렸다. 하비에르를 초대에서 야마구치에서의 선교 허가를 하는 등, 야심이 많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비에르를 알현했고 문화적이고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초상 ]
*남색(男色/영: Homosexuality): 동성애(同姓愛)를 가리킴. 일본에서는 ‘슈도우(衆道)’라고 하여, ‘와카슈도우(若衆道)’의 약자로서, 남성끼리의 동성애, 소년애(Pederasty)의 명칭, 형태. 별명은 ‘쟈쿠도, 냐쿠도(若道)’,; ‘쟈쿠쇼쿠(若色)’.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 공가(公家)나 승려들 사이에 유행하였지만, 중세 이후 무사들 사이에도 퍼져나가, 그 후 ‘주종관계’의 가치관과 융합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전국 다이묘가 어린 남자아이(小姓/코쇼)를 남색의 대상으로 수없이 삼았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나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모리 나리토시(森 成利), 타케다 신겐(武田信玄),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우에스기 카케가츠(上杉景勝), 키요노 나가노리(清野長範) 등이 유명했다.
이와쿠니(岩国)로부터 바닷길로 여정을 바꾸고, *사카이(堺)에 상륙.*사카이(堺): 오사카부(大阪府) 중남부에 위치한 정령(政令/일본에서 인구 50만이 넘는 도시를 가리킴. 현재 19곳)지정도시. 오사카부에서는 인구, 면적이 2번째이며, 면적 149.99㎢, 약 84만의 인구를 두고 있는 곳. 오사카부 중앙부를 흐르는 야마토 강(大和川)을 끼고 오사카시 남쪽에 위치, 주변에 7개의 도시가 있다.
무로마치, 전국시대 사카이는 명나라-일본 무역의 중계지(中繼地)로서 번창하기 시작하여, 류큐(琉球), 남만(南蛮/스페인, 포르투갈을 대상으로 했던 교역), 일본 국내외보다 많은 상인들이 모이는 국제무역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물론 이곳에도 하비에르를 비롯하여 역시 예수회 선교사였던 가스파르 빌레라(Gaspar Vilela/1525?-1572),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1532-1597) 일행이 찾아왔다. 선교사들은 사카이 시의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 히 루이스는,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자신의 저서『프로이스 일본사』에서 ‘동양의 베네치아’라고 언급하였다.
거상(巨商)이었던 *히비아 료케이(日比屋了珪)의 후대를 얻는다.
*히비아 료케이(日比屋了珪/?-?): 아츠지 모모야마 시대의 대표적인 천주교 신자. 교토(京都)지방에서 전교를 시작한 빌레라 신부를 보호, 1564년 ‘디에고’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그의 가족들도 열심한 교우가 되었다. 1587년 금교령으로 사카이의 천주교회가 괴된 후 자택을 개방, 천주교 신자들의 병원으로 받아들였다. 1617년 그 당시 교우들의 증언을 모은『코로스 징수문서(コーロス徴収文書)』에 서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때쯤 사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사카이 시(堺市) 하나다구치(花田口) 부근에 위치한 하비에르 공원(ザビエル公園). 1550년 사카이 시를 찾았던 하비에르를 신뢰깊게 도왔던 거상 히비야 료케이의 저택터에 세워졌다. 1949년 하비에르의 내항 400주년을 기념해서 ‘하비에르 공원’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출처: http://spacecan.jp/osaka/photowalk/romen/hanataguchi/xavierpark.html ]
실의의 교토 체재(滯在), 야마구치(山口)에서의 신앙 전파
1551년 1월, 히비야 료케이의 지원을 받으며, 일행은 염원의 교토에 도착.
료케이의 소개로 *코니시 류우사(小西隆佐)의 환대(歡待)를 받았다.
*코니시 류우사(小西隆佐/?-1592): 전국-아츠지 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사카이의 거상.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신(家臣). 1565년, 루이스 프로이스의 사사(師事)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요아킴(일: 죠우친(ジョウチン)’. 1585년 카와구치(河内), 이즈미(和泉)에서 토요토미 씨(豊臣氏)의 쿠라이리치(蔵入地/전국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 안에, 가신에게 부여하는 행정권에 대해 대관(代官)을 파견해서 직접 지배를 하여 공적, 직분 등의 징수에 맞춘 직할지의 명칭)의 대관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출병이 시작되면서 히젠(肥前) 나고야 성(名護屋城)에 들어가지만, 곧 발병하여 교토로 돌아가 사망하였다.
하비에르는, 전국에서 선교 허가를『일본국왕』으로부터 얻기 위해, 인도 총독과 고아(Goa)의 주교의 친서(親書)와 함께 고나라 천황(後奈良天皇/1497-1557. 105대) 및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알현을 청원. 하지만, 헌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1536-1565): 무로마치 막부 13대 세이이타이 쇼군(征夷大将軍).1554년, 오오토모 씨(大友氏)로부터 총포, 화약의 비법책을 손에 넣거나, 1560년에, 가스파르 빌레라에게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를 허가하는 등, 새로운 문물에 밝았다고 한다. 1565년, 당시 오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
1517-1593. 106대)은 교토에서 예수회를 추방하도록명령했지만, 요시테루는 이 명령을 무시했다고 한다.
[하비에르를 환대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
또, *히에이 산(比叡山) *엔랴쿠지(延暦寺)의 승려들과의 격렬한 논쟁도 시도했지만, 거부당했다.
*히에이 산(比叡山): 사가 현(滋賀県) 오오츠 시(大津市)와 교토 부(京都府) 교토 시(京都市) 북동부에
걸쳐있는 산. 오오츠 시와 교토시 사쿄우 구(左京区)의 현(県) 경계에 위치한 오오비에이(大比叡)(848.3m)과 사쿄우 구를 위치하는 시메이가타케(四明岳/838m)의 2개의 봉에서 완성되는 쌍이봉(双耳峰)의 총칭.
*엔랴쿠지(延暦寺): 사가 현(滋賀県) 오오츠 시(大津市)에 위치, 표고 848m의 히에이 산 전 지역을 경내(境內)로 하는 사원. 엔랴쿠지보다 히에이 산(比叡山), 에이잔(叡山)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헤이안쿄(平安京/교토(京都)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호쿠레이(北嶺)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헤이안 시대 초기의 승려 사이쵸(最澄/767-822)에 의해 열려진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총본산지. 일본 불교사에 남을 많은 유명한 승려들을 배출했다. 엔닌(円仁/794-864), 엔친(円珍/814-891) 등
당(唐)에 유학하여 많은 불경을 가지고 돌아와, 히에이 산의 밀교 발전에 전력하였다.
[하비에르가 승려들과 격렬한 종교 논쟁을 펼쳤던 엔랴쿠지의 모습]
이 선교 여정의 실패는 전란(戰亂)에 의한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무로막치 막부)의 권력 실추도 배경이 있다고 보고, 당시의 *고쇼(御所)나 수도 교토의 거리에는 꽤나 황폐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쇼(御所): 주로 천황 등에게 특히 지위가 높은 귀족들의 저택 또는 그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의 하나)교토에서 머무르는 것은 포기한 하비에르는, 머무른 지 11일(약 1개월이라는 설도 있다)만에 실의에 빠져 교토를 떠났다. 야마구치를 거쳐, 1551년 3월, 히라도(平戸)로 돌아온다.
하비에르는, 히라도에 두고 왔던 헌상품을 준비하여, 3번째로 야마구치로 들어갔다. 1551년 4월 하순,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다시 알현.여태까지의 경험에서, 귀족과의 회견 때에는 체면이 중시되는 것을 알게 된 하비에르는, 일행에게 정장을 입혀, 아름다운 문물(文物)을 요시타카에게 헌상했다. 헌상품은, 천황에게 봉정(奉呈)하려고 준비했던 인도 총독과 고아 주교의 친서 외에, 망원경, 양금(洋琴/피아노),탁상시계, 유리(ギヤマン/기야만)의 주전자, 거울, 안경, 서적, 그림, 소총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헌상품에 기뻐했던 요시타카는 하비에르에게 선교를 허락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또, 당시 곧 폐사(廢寺)가 되어 있었던 *다이도우지(大道寺)를 하비에르 일행의 주거 겸 교회로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일본 최초의 상설 교회당).
*다이도우지(大道寺): 야마구치 현(山口県) 야마구치 시(山口市)에 존재했던 절. 스오우(周防)의 전국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폐사(廢寺)가 되어 있었던 다이도우지를 하비에르에게 맡긴 것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 전파지의 거점이 되었다. 그후, 건물이 다시 세워져, 이것이 일본 최초의 그리스도교(천주교) 교회가 되었다. 일본에서 첫 크리스마스 행사도 이곳에서 펼쳐졌다.
하비에르는 이곳 다이도우지에서 하루에 2번 강론을 하였고, 약 2개월간 선교로 전교한 신자 수는 약 500명에 이르렀다. 또, 야마구치에서 선교 중, 하비에르 일행의 이야기를 앉아서 열심히 듣던 눈이 보이지 않던 비와 법사(琵琶法師)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하비에르를 따라서, 후에 예수회의 강력한 선교사가 되는 *로렌 료사이(ロレンソ了斎)가 되었다.
*로렌 료사이(ロレンソ了斎/1526-1592): 전국시대 후기에 활약한 일본인 예수회 수사. 하비에르를 만나 세례를 받고, 유명한 강론가가 되어 정력적인 선교활동을 펼쳤고, 당시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의 확대에 커다란 역할에 공헌했다. 바테렌 추방령(伴天連追放令)을 받고 큐슈(九州)로 옮겨져, 1592년 나가사키(長崎)에서 선종.
분고(豊後)에서의 선교
하비에르는, *분고(豊後) 부내(府内)(오오이타 시(大分市)에 포르투갈 배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마구치에서 선교를 토레스에게 맡기고, 자기자신은 분고로 향했다(이 시점에서 신자 수는 약 600명을 넘었다고 한다).
*분고(豊後): 1206년?-1550년까지 이전에 존재했던 나라. 현재 오오이타 현의 우사 시(宇佐市)와 나카츠 시(中津市)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해당. 분고국(豊後国). 1551년 9월, 하비에르는 분고에 도착. 수호 다이묘 *오오토모 요시시케(大友義鎮/후에 소우린(宗麟)의 환대를 받고, 소우린의 보호를 받고 선교를 펼쳤다. 안경도 선물받았다.
*오오토모 요시시케(大友義鎮/1530-1587): 전국시대의 부쇼(武将/사무라이 등 군사에 관련된 우두머리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 분고의 전국(戦国), 키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 오오토모 씨(大友氏)의 21대 당주. 소우린(大友宗麟)은 법명. 1551년 하비에르를 만난 후 27년 후인 1578년 7월에 세례성사를 받고, 포르투갈 국왕에게 친서를 가진 가신을 파견. 영내(領內) 안에서도 선교 활동을 보호, 남만무역을 하였다. 철저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았기에 대신(大臣)들과 대립, 또한 영내에서의 봉기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하비에르의 선교 활동을 보호했고, 그 자신도 열심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던 오오토모 요시시케의 초상화]
다시 인도로
일본에 머무른 지 2년이 지나, 하비에르는 인도로부터의 정보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일단 인도로 돌아갈 것을 결심. 11월 15일, 일본인 청년 4명(카고시마의 베르나르도, 마태오, 쥬안, 안토니오)을 선발하여 동행하게 하여, 토레스 신부와 페르난데스 수사 일행을 남기고 출항. *타네가 섬(種子島), 중국의 상천도(上川島)를 거쳐 인도의 고아(Goa)를 목표지로 하였다.
*타네가 섬(種子島): 면적 444.99㎢, 큐슈(九州)의 카고시마 현(鹿児島県) 소속, 오오스미 제도(大隅諸島)를 구성하는 섬의 1곳. 현내 사람이 사는 이도(離島)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 인구는 아마미오오 섬(奄美大島)에 이어서 2번째가 많고, 아마미오오 섬, 야쿠 섬(屋久島)에 이어서 3번째로 크다. 망글로브의 숲이 펼쳐진 지역. 표고는 최고점에서도 282m밖에 안되고,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거의 평평함 밖에 보이지 않다. 중심도시는 니시노오모테 시(西之表市). 1552년 2월 15일, 고아에 도착하면서, 하비에르는 베르나르도와 마태오를 사제의 양성학교(대신학교)인 성 바오로 학원에 입학시켰다. 마태오는 고아에서 병으로 사망했지만, 베르나르도는 학문을 닦아 유럽으로 건너간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중국 선교로의 지망과 종언(終焉), 시복시성(諡福諡聖)까지
1552년 4월, 하비에르는, 일본 전국에서 선교를 위해 일본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에서 선교가 불가결하다고 생각하여, 발타사 가고(Baltasar Gago) 신부를 자신 대신에 일본으로 파견. 하비에르 자신은 중국을 목표로 하고, 같은 해 9월에 상천섬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몸도 쇠약해지고, 정신적으로도 소모(消耗)해갔던 하비에르는 병이 발병. 12월 3일[5], 상천섬에서 선종하였다. 46세였다.
[5]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수호성인으로 하고 있는 히로시마 학원(広島学院) 중,고교는 12월 3일로 되어 있다.
http://www.hiroshimagakuin.ed.jp/
유해는 석회(石灰)를 묻고 관에 모셔서 해안에 매장했다.
1553년 2월 말라카(Malacca)로 이송. 더욱이 고아(Goa)로 옮겨져, 1554년 3월 16일부터 3일간, 성 바오로 성당에서 관에서 옮겨져 일반에게 순례가 허락되었다. 그 때 순례자 중 1명인 부인이 좌우 발가락 2개를 잘라서 도망쳤다.
2개의 발가락은, 그녀의 죽음 후 성당으로 반환되어, 더욱이 1902년 그 중 1개가 하비에르 성으로 옮겨졌다.[6]
[6]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가도를 가는 남만의 길(街道をゆく 南蛮のみち)』 ~하비에르의 오른손(ザビエルの右手)~ 등을 참조.
유해는 현재 본 *제즈 교회(Chiesa del Gesù)에 안치되어 있다.
*제즈 교회(이: Chiesa del Gesù): 이전의 예수회의 본거지.
정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성명(姓名) 교회(Chiesa del Santissimo Nome di Gesù all'Argentina). 1551년 예수회를 창립한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라 구상. 미켈란젤로가 무상으로 설계하는 것으로 허락했지만, 예수회 창립을 인가한 바오로 3세의 손자 알레산드로 파르네제(Alessandro Farnese il Giovane/1520-1589)
가 설계하여 출자. 비뇰라(Giacomo Barozzi da Vignola/1507-1573)의 설계에 바탕으로 착공. 이 여러 혁신적 요소에 의한 20세기까지 계속해서 예수회교회의 모범이 되었다.
[하비에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제즈 교회(Chiesa gesu facade)]
오른팔뚝은 1614년 로마의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세바스티안 곤잘레스에 의해 절단되어,로마 제즈 교회에 안치되었다. 이 오른팔은 1949년(하비에르 내조(來朝) 400년 기념) 및 1999년(450년 기념) 때 일본으로 옮겨져, 팔 형태의 관에 들어간 채 전시되었다.
[1949년 일본에서 공개된 하비에르의 오른팔 유해 모습]
이 오른팔 윗부분은 마카오(Macao)로, 귀, 머리카락은 리스본으로, 치아는 *포르토(Porto) 등에,
흉골(胸骨)의 일부는 도쿄 등에 흩어져 존되고 있다.
*포르토(Porto): 포르투갈 북부에 위치한 면적 41.3㎢, 인구 약 26만 3천 명의 항만도시.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며 자국내 국제적인 도시로서, 이곳의 도시권(都市圈)은 약 160만 명을 넘는다. 199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하비에르는 1619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1552-1621: 233대(재위: 1605-1621)에 의해 시복(諡福), 1622년 3월 12일에 맹우(盟友)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1554-1623: 234대(재위: 1621-1623)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하비에르는 가톨릭교회에 의해 호주, *보르네오(Borneo), 중국, *동인도 제도(East Indies), 고아, 일본, 뉴질랜드의 수호성인으로 되어 있다.
*보르네오 섬(인: Pulau Borneo,Kalimantan/영: Borneo): 동남 아시아에 위치,그린란드(Greenland) 섬, 뉴기니아(New Guinea)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또는 4번째)로 큰 섬(면적: 725,500㎢). 남지나해(South China Sea/서쪽과 북서쪽), 술루 해(Sulu Sea/북동쪽), 셀레베스 해(Celebes Sea)와 마카사르 해협(Makassar Strait/동쪽), 자바 해(Java Sea)와 카리마타 해(Selat Karimata/남쪽)에 둘러싸여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의 영지(領地)가 있는 섬. ‘보르네오’의 어원은, 이전의 섬의 북쪽의 절반을 차지했던
‘브루네이’가 와전(訛傳)되었다고 한다.
*동인도 제도(영: East Indies/스: Indian Orientales): 이전에 동남 아시아의 크고 작은 섬들의 지역을 부르는 호칭. 및 현재 인도네시아(뉴기니아 섬을 제외), 필리핀, 말레이시아의 칼리마탄(보르네오 섬) 섬 부분, 싱가포르, 브루나이, 동티모르에 해당. 동인도’ 라는 명칭은,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15세기 중반-17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던 유럽인에 의한 인도-아시아 대륙, 아메리카 대륙 등의 식민지주의적인 해외진출의 명칭)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유럽인이, 당초 그 땅을 인도로 착각했기 때문에, 후에 진짜 인도와는 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아메리카 대륙을 ‘서인도’, 본래의 인도와 그 근린지역을 ‘동인도’로 부른 것에 의한
하비에르와 일본인
하비에르는 일본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하며, ‘지금까지 만난 이교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국민’ 이라고 보았다. 특히 명예심, 빈곤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며, 뛰어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될 자질이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당시 유럽인의 일본관(日本觀)에서 생각하면 놀랄만한 높은 평가다. 동시에 하비에르가 놀란 또 하나는, 그리스도교에서 중죄로 여기고 있는 남색(동성애)이 일본에 서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교는 곤란을 더하였다.초기에는 통역을 맡았던 야지로우의 그리스도교 지식이 부족하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다이니치(大日)’로 번역하여 ‘다이니치(大日)를 믿자’ 라고 강론했기 때문에, 불교의 한 종파라고 착각하여, 승려에게 환대받은 적도 있었다.
*다이니치(大日): 대불여래(大日如來/일: 다이니치뇨라이(だいにちにょらい). 범어(梵語)로는 마하바이로차나(mahaavairocana)는, 밀교(密敎)에서 우주 그 자체와 한몸(일체(一體)라고 생각하는 범신론적인 여래(부처)의 일존(一尊). 그 광명(光明)이 널리 비추는 것에서 편조(遍照/두루 비춤), 또는 다이니치라고도 한다. 하비에르는 잘못된 것이라고 알아차리고 ‘다이니치’의 단어를 그만두고, ‘*데우스(Deus)’라는 라틴어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데우스(Deus): 라틴어로 ‘하느님’을 나타내는 단어. 고대 로마에는 신들(그리스-로마 신화)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의해 유일신 하느님을 나타내는 단어가 되었다.
그 후, 선교사들이나 일본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연구에 의해 ‘데우스’의 번역 이후, *키리시탄(キリシタン)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의 신(神)은 ‘데우스’라고 부르게 된다.
*키리시탄(キリシタン/포: Cristão): 일본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 또는 메이지 초기 무렵까지 사용되었던 옛 단어. 원래는 포르투갈어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의미로, 영어로는 ‘Christinan'.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이후 전래된 그리스도교(천주교)의 교우나 전교자 또는 그 움직임의 호칭.
참고문헌
1차 사료(史料)
하비에르 자신에 의한, 또는 하비에르 생존 중-선종 직후의 기록
무라카미 나오지로(村上直次郎) 옮김, 야나기 타케오(柳谷武夫) 엮음.
『예수회 일본통신(イエズス会士日本通信)』(上), 유쇼우도(雄松堂)(신이국총서(新異国叢書), 1968년.
슈르핸머(シュールハンマー) 위키(ヴィッキ) 엮음, 河野純徳 옮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전서간(聖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全書簡)』, 헤이본샤(平凡社), 1985년.
※1994년 같은 출판사의 ‘동양문고(東洋文庫)’에 수록(모두 4권).
마츠다 키이치(松田毅一), 감수, 번역
『16-17세기의 예수회 일본 보고집(十六・七世紀イエズス会日本報告集)』제3기 제1권(第III期第1巻)
(1549년-1561년), 도우호우샤(同朋舎), 1997년.
그외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ルイス・フロイス) 지음, 마츠다 키이치(松田毅一), 카와사키 모모타(川崎桃太) 옮김.
『일본사(日本史)』모두12권,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1977-1980년.
※하비에르 관계의 기사는 주로 ‘분고편(豊後編) I’ (6권)에 수록.
연구문헌
미하라 사토루(尾原悟)『하비에르(Century Books- 사람과 사상)ザビエル(Century Books - 人と思想)』, 시미즈 서원(清水書院), 1998년.
키시 히사시(岸 野久),
『서양인의 일본발견 하비에르 내일 전 일본정보의 연구(西洋人の日本発見
ザビエル来日前日本情報の研究)』, 1989년
『하비에르와 일본 키리티칸 개교기의 연구(ザビエルと日本 キリシタン開教期の研究)』, 1989년, 요시카와 코우분칸(吉川弘文館),
하비에르 도래 450주년 기념위원회(ザビエル渡来450周年記念委員会) 엮음,
『‘동양의 사도’ 하비에르(「東洋の使徒」ザビエル)』(I/II), 상지대학(上智大学), 1999년.
하비에르 탄생 500년 기념 *심포지움 위원회(ザビエル生誕500年記念シンポジウム委員) 엮음,
『하비에르의 개척한 길 일본발견, 사제양성, 그리고 영혼의 구원(ザビエルの拓いた道 日本発見,
司祭育成,そして魂の救い』난보우신샤(南方新社), 2008년.
*심포지움(Symposium): 고대 그리스어의 ‘향연(饗宴/심포지온(Symposion)'에 유래하는 단어. 원래는 함께 술을 마신다는 의미. 일반적으로는 어느 주제를 정해서 넓게 청중을 모아, 공개토론 등의 형식으로 개최되는 경우가 많다. 제1부에는 기조강연(基調講演)이 이루어지고, 제2부로서 3명 이상의 토론자들에 의해, 공개 토의를 진행(Panel discussion)된다. 그 외의 소그룹의 활동보고나, 여흥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沢本良秋 지음
『키리시탄 순례의 연보 야마구치, 아키, 츠와노, 시부키, 지후쿠, 나가토(切支丹巡礼の譜 山口・萩・津和野・紫福・地福・長門)』, 아키 키리티탄 유적 보존회(萩キリシタン遺跡保存会)/防長出版, 1976년.
츠야마 치에(津山千恵),『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을 둘러싼 문화의 충돌
(フランシスコ・ザビエル 神をめぐる文化の衝突)』,산이치 쇼보(三一書房), 1993년.
피터 밀워드(ピーター・ミルワード) 지음, 마츠모토 타마(松本たま訳) 옮김.
『하비에르의 시선으로 본 일본(ザビエルの見た日本)』, 코단샤(講談社), 1998년.
요시다 코고로(吉田小五郎),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소전(聖フランシスコ・シャヰ゛エル小傳)』, 오오모토야마 서점(大岡山書店), 193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