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奴)는 남자 종이고 비(婢)는 여자 종이다
노비가 되는 원인
노비는 흔히 종이라고 불렀는데, 노(奴)는 남자 종을 말하고 비(婢)는 여자 종을 말한다. 노비는 고조선시대에도 있었던 제도로 노비가 되는 이유는 대체로 전쟁포로, 인신매매, 채무, 형벌, 재생산(출산)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출산에 의한 노비가 주를 이루었다. 노비는 국가나 개인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조세부담이나 국방의 의무는 없었으며 다만 소유주를 위해 각종 부담과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노비는 그들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 소속의 공(公)노비와 개인이 주인인 사(私)노비로 나누었다. 공노비는 중앙과 지방의 각 기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근무하였는데 일정 기간 관아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노비와 정해진 만큼의 재물을 바치고 어느 정도 자유롭게 생활하는 노비로 분류된다.
사노비는 거주 형태에 따라 주인집에서 살며 주인집의 각종 일을 하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집과 독립하여 살면서 주인집의 농토를 소작하거나 자기 나름대로 벌어먹으면서 주인이 필요로 하는 재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외거노비(外居奴婢)로 구분되었다.
국가에서는 상황에 따라 아버지가 종이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부법(從父法)을 시행하다가 어떤 때는 어머니가 종이면 자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從母法)이 시행되기도 하였는데 종모법이 시행된 기간이 길다. 노비가 지나치게 증가되면 양인이 줄어들어 군역, 각종 부역 등에 차질이 생기고 세금징수대상이 감소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종부법, 종모법을 상황에 따라 시행한 것이다.
노비는 하나의 재산으로 취급되어 가장 좋은 뇌물수단이었다. 일반적으로 노비를 거느리고 있는 집안에서는 사유재산인 것처럼 주고받기도 하였고, 재산 분배시에도 나누어 주는 노비를 늘리기 위해서 부모 중에 한 사람이라도 노비면 그 자식들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을 고수하려 들었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 집의 노비가 자기네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고 양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였는데, 이는 어떻게 되었든 그들의 자식은 자기의 노비가 되므로 재산 증식의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비는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식들도 대대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때문에 어떤 수단을 쓰든지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것은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주로 도망가는 곳은 변방의 섬이나 깊은 산속 등 사람의 발자취가 드문 곳이었다.
노비의 주인은 도망간 노비를 찾으러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자기가 아는 수령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노비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노비를 잡으러 온 양반이 노비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해코지를 당하는 경우도 나오는 등 피해가 속출하였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상업 활동에 뛰어들어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하여 벼슬을 사거나, 대신 사람을 사서 넣고 자기는 빠져 나오는 경우였다. 즉 공명첩을 사든가 재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기도 하고 아니면 곡식을 바치고 임금의 특전으로 양인이 되기도 하였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힘센 세도가나 관가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노비의 양인화(良人化)
조선후기로 갈수록 정부의 재정이 좋지 않자 적극적인 노비 양인화(良人化) 정책을 펼쳤다. 이는 양인의 수가 늘수록 정부의 조세수입이 많아지므로 공노비뿐만 아니라 사노비도 양인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를 위해 기존의 종부법․종모법을 종량법(從良法)으로 바꿔 시행하였다. 종량법은 모친이 양인이면 자식은 자동적으로 양인이 되는 것으로 강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것과 노비의 수가 증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노비제가 완화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은 중인과 서얼 등의 신분해방운동 때문이다. 종래 양반들만 독점하다시피 하던 관직을 서얼과 중인 계층이 조금씩 진출하게 되자 노비들의 신분해방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다. 결국 공노비는 순조 임금이 1801년에 폐지했고, 사노비는 고종 임금 때인 1894년 갑오경장 때 법적으로 폐지시켰다. 아래 기록은 공노비를 폐지하던 날의 <조선왕조실록> 내용의 일부이다.
“정조께서 일찍이 노비를 혁파하고자 하셨으니, 내가 마땅히 그 뜻을 이어받아 지금부터 일체를 혁파한다. 그리고 대신 주는 것은 장용영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겠다.” 하고, 홍문관의 관리로 하여금 임금의 말씀을 대신 지어 알아듣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승지에게 명하여 각 관아의 노비문서를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고 아뢰도록 하였다.(내수사와 각 궁방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36,974명이었고, 노비문서의 책수는 160권이었다. 기로소, 종친부, 의정부, 의빈부, 돈녕부, 충훈부, 상의원, 이조, 호조, 예조, 형조 등에 소속된 각 도의 노비는 도합 29,093명이었고, 노비문서의 책수는 1,209권이었다.) ―1801년(순조 1년) 1월 28일
하지만 신분이 해방되었다고 하여도 노비들은 갈 곳도 없고 먹고 살길도 막막한 사람이 많아 여전히 주인집에 의지하며 종전과 다름없이 소작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으며 신분차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1960년대쯤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노비가 없어지다 보니 양반으로 살던 사람들은 갑자기 자기가 살림을 하려니 모든 게 서툴기 마련이었다. 또 노비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나 시골에서 올라와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던 사람들은 생활이 어렵고 집 장만하기도 어려워 남의 집 행랑채에 살면서 주인집의 일을 거들어 주고 식생활을 해결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셋방살이를 행랑살이라 했으며, 주인집에서 이들을 부르기를 남편에게는 행랑아범, 부인에게는 행랑어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종전과 같은 주인과 하인 사이와는 다르게 언제든지 떠나면 그만인 자유스러운 관계였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읍내에서 정육점 하는 사람을 백정이라고 여겨 옛날처럼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육점 주인은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정육점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 농사에 필요한 비료 등을 사거나 자식들 학비를 융통하려면 그들에게 가서 돈을 빌리는 게 가장 쉬우므로 점차 옛날처럼 깔보는 풍조가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