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재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이티의 재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카리브 해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섬나라 아이티에 엄청난 재앙이 덮쳤다는 뉴스는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진도 7이상의 지진이 그 나라를 강타하여 수도에는 온전한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사망자와 실종자가 합하여 20만 명인지 30만 명인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다.
어쩌면 저렇게 철저히 파괴될 수 있는지 매체의 화면속의 아이티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는 그 나라 사람들이 왜 그토록 처참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답답한 가슴은 그 물음을 되묻고 있지만 나의 머리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이티는 인구 80%이상이 가톨릭신자들이며, 수도인 포르토프랭스 교구 주교좌 성당도 피해를 입어 주교님도 변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 나에게는 이와 같은 소식이 전해질 때 마다 당혹감을 감출수가 없다.
1980년대 중반에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극심한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수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리고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쓰나미로 17만 여 명이 목숨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나에게 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도전적인 직장동료의 질문에 명확한 언급을 하지 못하는 내가 그렇게도 안타까왔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어린 아이들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는지는 내게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이라는 미국의 근본주의 우파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목사는 "아이티의 지진은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고 악담을 해서 구설수 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일전에 불교를 믿는 나라는 못살고, 기독교를 믿는 나라는 잘산다는 개신교 장(J)모 목사의 망언이 떠오른다.
전하는 말의 전 후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단순히 그 말마디로서 그분들의 경솔함을 탓 할 것은 못되지만 공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말 인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번 아이티 사태는 이교도의 눈에는 가톨릭 나라이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통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T.V뉴스의 그림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어느 자매님이 손에 묵주를 움켜쥐고 신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절규하는 모습이 너무도 가슴을 에이게 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크든 작든 모든 사건과 일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시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그렇게도 간절하게 매달리며 했던 기도를 왜 들어주지 않는지 많은 사람들은 의아스레 생각한다.
비 인간적인 차별과 금전 만능의 가치를 몸으로 부딪히며 정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주는듯한 이 차가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에 나는 우리 마산교구 교구장님의 사목표어인 ‘순교영성으로 세상복음화를’에 착안하여 마산 레지아 교육위원으로서 ‘순교 영성과 레지오 마리애’라는 원고를 작성하면서 우리나라를 피로 붉게 물들인 순교자들의 자취를 저 나름대로는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제도 없이 평신도인 이웃에게서 전해들은 예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분들의 삶은 순교 당시의 사회 가치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배교를 강요당하며 주리를 틀리고, 인두 지짐을 당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태형을 맞으면서도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주님께 의지했지만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도 하느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순교자의 수에 있어서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랄 수도 있지만 만 여명이 순교하거나 행불되는 동안 단 한번도 단말마적인 ‘예수마리아’라는 신앙고백에 응답이 없었다.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 매달려 죽기까지 성부 아버지 하느님께서 침묵하셨듯이.............
그렇지만 허망하게만 보였던 주님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생겨나고 20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자 수는 15억을 상회하고 있다.
200년 전 어리석은 죽음으로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던 순교자는 이 땅에 103위의 성인으로 되살아 났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 안타까워한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가만히 돌이켜 보면 우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느님은 구석구석에서 우리들의 삶을 은총으로 수놓아 주시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그분의) 은총이었네’가 너무도 가슴에 와 닿음을 신자라면 모두 다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 예수 살이는 나에게 복을 가져다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게 견딜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닥쳐올 때 능히 당신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또한 참 예수 살이는 이웃 속에 있는 주님을 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내 잇속을 챙기고 내 뱃속을 채우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는지 반성해 봐야 할 시점이다.
우리들이 낭비하는 하루 분량의 음식쓰레기는 아이티 난민 200만명이 보름 먹고도 남는 양이다.
매년 8조원이 음식 쓰레기로 버려지는 우리의 낭비는 같은 지구촌에 사는 아이티의 굶주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할 그네들이 굶주림에 지쳐있는 모습을 보고 측은하다고 느끼는 한, 먼 나라의 일이라고 치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도 불과 40년 전에는 지금의 아이티처럼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교통도 통신도 하루 이내로 당겨진 지구촌에서 내만 배불리 먹는 일에 열중한 결과는 지구의 또 다른 곳에 엄청난 재앙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저미게 함을 알아야 하겠다.
20여년 전 에디오피아 아동의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으로 전 세계는 '우리는 하나(WE ARE THE WORLD)'로 뭉치게 했고, 살아서 지옥의 단편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번 아이티의 재앙은 준엄한 하늘의 재판에 우리 모두를 회부시켜 우리들의 욕망과 이기심을 준엄하게 추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설령 피부색깔과 언어와 풍습과 관습과 종교가 다르다 할지라도 다 그분의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깨달아 ‘나의 지나친 가짐은 다른 이의 절대 빈곤을 초래함’이라는 원리-그리스도 신비체 원리-를 가슴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이 아둔한 머리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이번 아이티 재앙은 미국을 위시한 소위 서방 선진국들의 이기적인 횡포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 경제 논리와 사회 곳곳에 만연한 비인간화에 맞선 자연의 몸짓이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2010. 2. 6 손형도 안드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