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변정담/허병섭 목사 이야기

허병섭목사 그는 누구인가

손드러 2010. 2. 5. 17:23

가난한 이를 위한 영원한 순례자 허병섭'목회자가 죽어야 한다'는 고백적 일생...목사직 내려 놓고 이웃과 하나됨 추구

 

 

“하나님, 신학을 하게 해주시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습니다.”신학교 기숙사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면서도, 한신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도 단지 신학대학교 구내에 있고 싶었던 허병섭. 그만큼 신학도가 되고 싶었던 그의 열정에 감동한 ‘서울여신도연합회’의 도움으로 그는 마침내 신학을 할 수 있었다. 허병섭은 그의 책 <일판사랑판>에서 자신이 비운의 가족사 속에서 버림받아야 했다고 회고한다. 강충원 목사는 허병섭이 1941년 김해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떠난 어머니 등에 업혀 콩비지를 먹고 연명했다고 한다. 개구리처럼 배가 볼록하고 숨만 껄떡거려 죽겠구나 싶어 볕에 눕혀놨더니 살아나더라는 게 허병섭의 시작이었다. 부모와 가정의 사랑 대신 야단과 몽둥이질을 당하고 풀빵 하나를 주워 혼자 먹고는 동생이 떠올라 울어버렸다는 소년 허병섭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의 한 교회를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의 칭찬에 천국을 맛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교회 수련회에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대구 한남신학교에 갔으나 가족이 서울로 오게 되고 1960년 서울을 그에게 생존을 위해 피눈물을 강요하는 쓰라린 곳이었다고 한다. 신학공부하게 해 달라는 3년의 기도 끝에 쓰레기더미 위에 서 계신 예수를 환상 중에 만나고 신학 공부를 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일하러 간 한신대에서 신학을 하게 되었다. 허병섭이 스승이라고 밝힌 문익환·문동환·안병무·서남동 교수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입학 후에 그는 한번더 하나님께 고백하게 된다. 세브란스 병원 의사도 고개를 흔들 만큼 중했던 ‘패혈증’을 앓으면서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비참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이 서러웠다고 한다. 가난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빈민들이 떠올라 눈물로 기도한 것은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기도할 때의 그것과 같았다.“하나님, 저를 살려 주신다면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도시에서 밀알 노동 삶 살기서울에서 빈민을 중심으로 사회 운동을 한 1996년 그의 나이 쉰여섯까지 삶을 되돌아보며 허병섭은 “나는 감히 밀알노동이란 삶을 도시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도시 빈민이 체념하고 비굴하고 자포자기하는 삶을 사는 것에서 해방하여 떳떳한 인간으로 살도록 돕는 노동을 했다고 한다. 또 빈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희생과 봉사 섬김 나눔의 삶을 살고 이들의 노동에 참여하면서 사회를 위한 노동인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 빈민운동을 하던 시절 마흔 후반의 허병섭 목사.(<스스로 말하게 하라>)  
 

1974년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허병섭은 빈민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군대에서 휴가 나왔을 때 알게 된 하월곡동에 제대한 1976년 12월에 자리 잡고 동월교회를 하면서 그는 교회에 딸린 방을 탁아소로 내주고 자신은 산동네 사글세방을 떠돌아다녀야 했지만 그의 방은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월교회에서 하는 탁아소 ‘똘배의 집’은 최초의 탁아소였다. 동월교회에서 했던 공동식사나 국악예배도 최초의 시도였을 거라고 교인들은 증언한다. 허병섭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1979년 포장마차를 시도하고 1982년 넝마주의 집단과 생애를 같이 한 적도 있다. 허병섭은 마디마디가 굵어 우악스럽고 거칠고 흉터가 있는 ‘걸레와 같은 손’을 부러워했다. 이들의 손을 가리켜 거룩한 손이라고 기도했지만 정작 본인은 “장사할 손이 아니다”라는 소리를 고물상 주인에게 듣고 겸언 적었다고 했다.
 
허병섭은 동네 사람의 어려움이 가난 때문이고 가난은 잘못된 정치와 분단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1974년 유신치하에서 중심에 서서 ‘목요기도회를 만들었다. 1976년 당국은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가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로 남한 공산화를 시도했다고 조작한다. 관계자들은 50일 이상 취조당하고 고문 받고 허병섭 목사는 그 후 20여 차례 연행당하거나 구금되고 고문을 받고 78년부터 79년 3월까지는 도피생활을 했다. 1986년에 건대사건 이후 삭발하고 민정당사에서 목회자들 시위를 주도하고 1987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회자 삭발 단식’을 단행했다. 허병섭은 노동자 분신을 안타까워하면 “목회자가 죽어야 하는데…”를 되뇌며 ‘살아 있음의 부끄러움’을 자주 토로했다고 했다. 그에게 붙은 ‘정치 목사’의 딱지에 대해 그는 담담했다.“현대 사회에서 삶이 정치와 분리될 수 없어요. 빈민선교를 하는 성직자가 정치에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하죠. 정치에 무관심한 자들도 이미 정치적인 셈이에요. ‘정교분리’라는 허울로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을 바라는 정치권력에 동조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죠."허병섭은 1987년 재야가 분리되고 노선대립에 빠져들자 운동에서 발길을 돌렸다. 같은 해 <스스로 말하게 하라>를 펴내 “민중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조건만 주어지면 민중은 사회변혁의 주체가 된다”고 했다. 1988년 당국이 동월교회 증축공사를 방해하며 교회를 철거하려고 하자 주민들이 철거 반대 진정서에 서명하고 1989년 최초 주민 자치 조직인 ‘우리 마을 발전추진회’가 결성되고 ‘월곡동 마을 청년회’ ‘월곡동 건축일꾼 두레’가 결성됐다.동월교회에서 일한지 12년 되는 해인 1988년 8월 15일 허병섭은 대한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 목사사직서를 제출하며 “이 날을 목사직에서 해방하는 날, 교회의 제도권에서 해방되고 사회의 기득권에서 해방되는 날”이라고 했다. 허병섭은 이렇게 설명했다.“저는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고 지금까지 애써 왔어요. 그러나 제가 목사인 동안 완전히 하나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직을 버리고 노동자가 되었고 이제는 진짜 동네사람이지요. 사실 동네사람들은 여전히 가난한데 저 혼자 이름난 목사가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됐고 이 썩어가는 세상을 살리는 길은 ‘자리 앉은 사람의 각성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죠.”일용직노동자생산공동체 ‘월산동 건축 일꾼 두레’허병섭은 모든 후원금을 끊고 미장이로 일하면서 생계를 걱정하는 날삯(일용직) 노동자의 마음을 알아 간다. 허병섭은 노동하면서 ‘노동자를 옭죄는 것이 부조리한 건축체계와 관행’인 것을 알게 된다. 중간 과정 없이 직거래로 건축하면 건축주는 공사비를 줄이고 노동자는 수익이 높아진다고 확신해 동네의 노동자를 설득해 1990년 ‘월산동 건축 일꾼 두레’가 탄생한다. 두레는 각종 매스컴의 찬사를 받고 건축주와 일꾼의 호응을 얻었다. 날삯 노동자가 월급을 받고 하루 8시간 근무시간을 지키는 등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두레 회원들도 절망과 체념의 과거 타성에서 벗어나 희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했다. 허병섭은 건축 일꾼 두레가 만들어진 과정을 소상히 적어 1992년 <일판사랑판>을 펴낸다.   일꾼 두레는 건축회사가 될 꿈을 꾸었으나 없어지고 만다. 일꾼 두레 윤창호 씨는 “일꾼 두레의 정직을 이용하려는 건축주가 있었고 회원들이 나태해지고 삐끗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꾼 두레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일꾼 두레는 월산동에서 봉천동으로 옮겨 나성건설과 합쳐 나레건설로 바뀌었고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관악자활후견기관 최종덕 과장은 “일꾼 두레가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과정을 보고 빈민이 생산 활동을 하도록 국가가 도와줄 것을 민간이 요구했다”고 했다. 민간이 요구하고 정책입안자들이 연구해 96년 만들어진 것이 자활후견기관이다. 처음에는 5개 지역에 불과했으나 2000년 이후 국민기초생활법에 의해 각 구에 하나씩 만들어졌다. 자활후견기관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생산공동체를 만들기도 하고 공익사업과 간병 등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허병섭 부부의 밀알로 살기 위한 귀농

   
 
  ▲ 귀농해 생명평화운동을 펼치는 시절의 허병섭 목사.(뉴스앤조이 자료사진)  
 

허병섭은 1994년 이정진 씨와 재혼한다. 허병섭은 그의 저서에서 “나로 인하여 슬픔과 괴로움, 실망과 좌절을 안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죄책감이 있다”고 했다.예수를 따라 민중과 함께 하려한 것을 이해해 줘서 감사하다고 했다. “이기적 행동 때문에 상처 받았거나 원한이 있다면 껴안고 갈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하나님의 용서를 기다릴 뿐이다”며 “때로 혈연에 대해 그리움이 있고 연민이 있지만 만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업보로 생각한다”고 했다.이정진 씨는 “상처를 안고 50이라는 적지 않는 나이에 재혼했다. 남편이 집도 절도 없고 은행 통장도 없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쉽지 않았다”며 “이웃에게 모든 것은 내 준 사람이 존경스러웠지만 결혼하고 그 존경심이 추상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때 내가 감당할 몫에 대해서는 충분히 각오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정진 씨는 스스로 자신이 “때로 예수의 발목을 잡는 악처”라고 고백하면서도 “마누라 바가지에 쉽게 자기 삶의 방식을 포기한다면 허병섭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이 부부는 1996년 돌연 경상도 무주 안성면으로 귀농한다. 허병섭은 그의 아내 이정진과 함께 2001년에 낸 <넘치는 생명세상 이야기>에서 “밀알노동을 이어가기 위해 농촌에 내려온 것”이라 한다.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아가 성장하도록 도왔는데 결국 도시 사람이 상업화와 산업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구조에 얽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아를 성취하는 목표가 거대한 도시 산업구조라는 기계의 부속품이 될 수밖에 없기에 의미를 느끼지 못해 생태적 자리인 농촌으로 내려왔다.”허병섭은 우렁이 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을 도입한다. 유기농 통한 생태농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대안학교를 꿈꾸는 교사들을 만나 푸른꿈고등학교 설립하고 ‘생태 이념’ 구현하는 대안학교로 교육부의 인가를 받는다. 푸른꿈고등학교의 이사와 운영위원장으로 청소년의 자아를 세우고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하는데 힘쓴다. 그의 관심은 이제 생태공동체로 확장된다. 푸른꿈고등학교 설립에 힘썼던 사람들과 함께 고등 생태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논하다가 허병섭은 ‘녹색대학’을 꿈꾼다. 1995년부터 준비한 끝에 2001년 경상남도 함양군에 녹색대학이 개교한다. 녹색대학은 “생태문화 공간을 재생하고 복원하는 일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실천하는 일”에 집중했다. 권위적이고 정형화된 제도와 교육방식을 탈피해서 대학 차원의 대안 교육의 틀을 보여주는 배움의 장을 열겠다는 것이 녹색대학의 포부다. 허병섭은 2008년 아내 이정진과 함께 전 재산 임야 6만 3099제곱미터(1만 9000여 평)를 마을 공동재산으로 내놓았다. 자연환경국민신탁에 기증한 것이다. 공시지가 3억 정도인 이 땅은 허병섭 목사 부부가 귀농할 때 동월 교회에서 준 돈 5000만 원으로 산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부부가 쓰러졌다. 아내 이정진 씨가 먼저였고 일주일 후 허병섭 목사가 같은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허병섭 목사가 쓰러진 것을 두고 후배들은 “김수환 추기경이 쓰러진 것보다 더 슬프다”고 한다. 민중을 향한 애정과 헌신 때문이라고 했다. 허병섭 목사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고 포괄적이면서 고집스런 집요함이 있다. 일생에 자기 성찰이나 반성,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다. “힘든 일 심부름, 빈자리 채우기, 신학과 종교 영역에서 남이 간과하는 일을 찾아가는 것이 삶의 특징”이라 했다. 도시빈민운동가로 평신도로 넝마주의로 생태운동가로 위치를 바꾼 것에 대해 “시대의 흐름이 다양한 변신을 하게 된 이유기도 하지만 내 정신, 내면적인 진실 찾기의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허병섭 목사는 쓰러져 있으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는 소수의 선각자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소수의 진실에 내 자신을 위탁하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을 반성하고 반성한 결과가 사회에 반영되기를 바란다. 삶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영원한 순례자의 삶을 살자.” 

   
 
  ▲ 종교인 생명 평화 순례 100일에 참가한 허병섭 목사. 왼쪽에 있다. (사진제공 녹색온배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