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교구의 설정-4
⑩ 포교성성(布敎聖省)은 그해 11월 17일자 편지(便紙)로 신학교지도자(神學校指導者)들의 열성(熱誠)을 칭찬하고, 이어 조선(朝鮮)에 관한 계획(計劃)을 수행(遂行)하는데 넘지 못할 장애(障碍)가 하나도 없음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는 뜻을 알리고, 또 이 포교지(布敎地)의 설치(設置)를 돕기 위하여, 최초의 필요한 비용(費用)을 부담하겠노라고 제안(提案)하였다.
그러므로 신학교 지도자들은 각처(各處)에 있는 포교지(布敎地)에 편지(便紙)를 보내어 성성(聖省)의 뜻을 알렸다. 그 후 2년 동안 대부분의 교구장(敎區長)들과 선교사(宣敎師)들의 회답(回答)이 도착하였다. 참으로 사도(使徒)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는 이 훌륭한 복음전파자(福音傳播者)들은 자기들 교회의 수많은 어려움을 잠시 잊고, 그보다 한층 더 불운(不運)한 이 교회만을 생각하여, 기꺼이 교황청(敎皇廳)의 제안에 동의(同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난관(難關)이 극복(克服)된 것은 아니었으니, 이러한 계획(計劃)을 능히 성공(成功)시킬 수 있는 선교사(宣敎師)들을 선택(選擇)하고, 그들에게 장차 충분(充分)한 후원(後援)을 보장(保障)하여 준다는 문제(問題)가 남아 있었고, 더구나 그들을 어떻게 해서 조선(朝鮮)에 들여보내느냐 하는 문제(問題)도 남아있었다.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여기에 있었다. 신학교지도자들은 망설였다. 그리하여 결정적(決定的)으로 수락(受諾)한다는 편지를 성성(聖省)에 보내기 전에, 각 포교지(布敎地)에 다시 편지를 보내어, 더욱 충실한 정보(情報)를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일이 지지부진(遲遲不進)해 질 위험(危險)이 없지 않을 즈음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의 용감(勇敢)한 결정(決定)으로 해결(解決)이 촉진(促進)되기에 이르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당시 샴(지금의 타이왕국의 1939년 이전의 이름) 포교지(布敎地)에 있었고, 보좌주교(保佐主敎)로 성성(成聖)될 참이었다. 그는 조선포교지(朝鮮布敎地) 설치를 전적으로 지지(支持)한다고 외방전교회 신학교(神學校)에 편지(便紙)를 보내는데 그치지 않고, 교황(敎皇)에게 글을 올려 자기가 최초(最初)로 이 일을 해보겠노라고 맡고 나섰다.
2. 초대 조선교구장(初代朝鮮敎區長) 브뤼기에르(Bruguiere)의 등장
① 이제 초대 조선교구장(初代朝鮮敎區長)이었던 이 거룩한 선교사(宣敎師)에 대해 몇 마디 하기로 하자. 그는 비록 조선(朝鮮)에 들어오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 열성(熱性)과, 시련(試鍊) 중에 보여준 씩씩함과 인내(忍耐)로 이 포교지(布敎地)를 위하여 많은 공헌(貢獻)을 하였다.
바르톨로메오 ․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나르본(Narbonne) 근처에 있는 레싹(Reissac)에서 프랑스대혁명(大革命)의 폭풍(暴風)이 몰아치던 1793년에 탄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작농(自作農)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르본(Narbonne)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까르깟손(Carcassone)의 소신학교(小神學校)로 와서 공부를 마쳤다. 소신학교에 있는 동안, 그는 재질(才質)이 많고, 공부에 열심하고, 심심(信心)이 참되고, 특히 대담(大膽)하고 솔직(率直)함으로 인하여, 여러 학생 중에서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부제(副祭)가 된 후, 그 소신학교(小神學校)에서 제 3학년 선생이 되었다가, 다음에는 대신학교(大神學校)로 옮겨가, 4년 동안 철학(哲學)과 신학(神學)을 가르쳤는데, 그의 교직생활(敎職生活)은 보기 드문 성공(成功)을 거두었다. 그의 오랜 친구 중의 한 사람은 몇 해 전에 그에 대하여 이런 말을 썼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중 이하의 키였고, 몸은 약간 가늘고, 금발에 얼굴빛은 적동색(赤銅色)이었다. 우리는 그의 열심과, 많은 재능(才能)과, 그나큰 양식(良識)을 우러러 보았다. 그는 의지가 너무도 강하고 독립성이 대단하여, 그의 상사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주교가 된다면 그의 표어(標語)는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던, 나는 전진하리라일 것이라고. 거기에다 놀라운 고신극기(苦身克己)를 들어야 하겠으니, 그가 프랑스에서 지낸 마지막 해에는 거의 빵과 물로 목숨을 이어나갔고, 아무리 충고해도 은수자(隱修者)와 같은 이 식사를 바꾸지 않았다.
②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1825년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고향(故鄕)을 떠나 파리로 와서, 파리외방전교회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에 들어갔다. 거기에서 아버지에게 편지(便紙)를 올려 자기의 결의(決意)를 알리고, 그가 고향을 떠난 것으로 인하여 상심(傷心)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慰勞)해드렸다.
신앙(信仰)이 깊은 참된 천주교인인 아버지는 천주께서 요구하시는 이 희생(犧牲)을 받아들였고, 그 후 아들에 대한 말을 들을 때면 항상 눈물을 글썽이며,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애가 나보다 천주님을 더 사랑하니, 잘 된 일이지 뭡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③ 외방전교회신학교에(外邦傳敎會神學校)서 몇 달을 지낸 후,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1826년 3월에 보르도(Bordeaux)항에서 출범(出帆)하여, 1827년 6월 4일에 샴 왕국의 수도(首都)인 방콕에 도착했다.
소조뽈리스(Sozopolis) 명의주교(名義主敎)요 샴교구장(敎區長)인 플로랑(Florent) 주교(主敎)는, 포교사업(布敎事業)으로 머리가 희어지고, 병고(病苦)에 시달리는 노인(老人)으로, 그때에는 본국인 신부 몇 분의 보좌(補佐)를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천주께서 그에게 보내신 구원(救援)을 진정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곧 학생이 20명가량 되는 신학교(神學校)를 맡아 보게 되었고, 동시에 그 나라 말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하여,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이내 성직(聖職)을 행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가장 즐기는 일은 죽을 고비에 이른 외교인(外敎人)의 아이들에게 세(洗) 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가엾은 어린이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싶었지만, 방콕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무(義務)로 인하여, 경험(經驗)있는 대세자(代洗者)들의 파견(派遣)을 여러 가지로 격려(激勵)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방콕에 체재(滯在)한 최초의 6개월 동안에, 그는 죽어가는 어리이 1천 6백 명 이상에게 세를 주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는 이 어린 천사들의 기도(祈禱)로, 그들의 무관심한 동포(同胞)들이 회개(悔改)의 은혜(恩惠)를 받기를 기대하였으니, 그는 천주의 나라에 대한 열성(熱誠)이 지극하여, 복음(福音)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가 그다지도 많음을 보고 탄식(歎息)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④ 그는 이런 말을 썼다.
니아스(Nias) 섬, 파당(Padang), 아바(Ava)왕국, 퀘다(,Queda), 라오스(Laos). 아켄(Achen), 리고르(Lygor), 이런 곳에 선교사를 보내야 하겠지만, 어디에서 그들을 구해온단 말입니까?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곤경(困境)에서 빠져 나오려면
강력한 응원군(應援軍)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선교사(宣敎師)를 보내주십시오. 그러나 유식(有識)한 신부(神父)보다는 거룩한 신부들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나로 말하면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러 갈 마음이 간절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주교(主敎)님이 혼자 남아 계시게 될 터인데, 그분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여, 적어도 후임(後任)이 오기 전까지는 그분을 떠날 수가 없으니, 그런 말씀을 드려도 소용(所用)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신학교를 맡고 있는데, 매일 신학강의(神學講義) 2시간, 1주일에 라틴어 4시간, 성경강의(聖經講義)를 2시간 합니다. 이 밖에 방콕에 있는 양(羊)의 무리를 위하여, 주임신부(主任神父)의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협력자(協力者)가 필요한가를 당신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대신(代身)할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만 온다면, 나는 내 취미(趣味)대로, 우상숭배자(偶像崇拜者)들에게 포교(布敎)하러 떠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⑤ 이렇게 여러 가지 직무(職務)를 맡아가지고 있으면서도,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유럽에 자주 편지(便紙)를 보내어, 전교회원(傳敎會員)들의 열심을 새롭게 하고, 선교사(宣敎師) 지원자(志願者)들을 모으려 하였다.
전교회지(傳敎會誌)에는 당시에 이 열심(熱心)하고 유식(有識)한 선교사(宣敎師)의 대단히 흥미(興味)있는 편지(便紙)를 여러 장 실었다. 그 편지에는 박식(博識)과, 섬세한 관찰(觀察)의 사도적(使徒的)인 소박(素朴)과 힘이 겹쳐 있어, 읽기에 재미도 있고 유익(有益)하기도 하였다.
이 편지들 가운데는 아래와 같은 마음의 부르짖음이 적혀 있다.
조선에 파견되었던 신부가 순교한 뒤에는 저 나라의 신자들이 천주교의 구원을 도무지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저 열심한 신입교우들의 사절이 해마다 북경주교(北京主敎)를 찾아와서는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은 이런 사정을 로마에도 호소(呼訴)하였습니다. 내가 들은 것이 틀림없다면, 이번 편지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어찌하여 유럽 전체에 이 불운한 신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신부 한 사람이 아직도 나서지 않는단 말입니까?
⑥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가 방콕에서 활동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플로랑(Florent) 주교(主敎)는 교황청(敎皇廳)의 허락(許諾)을 받아, 그를 갑사(Capsa)명의의 보좌주교(補佐主敎)로 선정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처음에는 이 무거움 짐을 사양(辭讓)하려 하였으나, 그때 샴 교구(敎區)의 사정(事情)은 교구장(敎區長)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이 용납(容納)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조선포교지(朝鮮布敎地)에 관한 포교성성(布敎聖省)의 제안(提案)과 거기에 대한 외방전교회신학교(外邦傳敎會神學校) 지도자(指導者)들이 보낸 회담(回答)을 알리는 편지(便紙)가 방콕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여러 번 조선(朝鮮) 사람들을 구원(救援)하러 달려가고자 한 적이 있었던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는, 이와 같은 소식(消食)을 듣고 무관심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편지(便紙)를 써서 조선 사람들의 사정(事情)을 변호(辯護)하였다. 조선을 위한 이 열렬(熱烈)한 변호는 동시에 선교사(宣敎師)들의 열정(熱情)을 불러일으키는 간절한 호소(呼訴)도 되었기에, 여기에 그 편지의 거의 전부를 수록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