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러 2010. 1. 19. 08:42

※ 박보록(朴甫祿) 바오로 등의 승리와 죽음

① 이 무렵 도내(道內)에서 이름이 난 중(스님) 한 사람이 우연히 대구(大邱) 근처 에 와 있었는데, 이 중은 불심(佛心)이 지극한 나머지, 손가락을 넷이나 잘랐었 다. 영장(營將)은 박보록(朴甫祿) 바오로에게 이중과 더불어, 양쪽 교리(敎理)의 참되고 거짓됨에 대하여 토론(討論)을 시킬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을 들은 교우(敎友)들은 모두들 크게 걱정을 하였고, 박보록(朴甫祿) 바 오로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와 같이 무식한 사람이, 내 힘만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 중을 당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천주와 성모의 도우심만 믿으면 될 터인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걱정들을 하십니까? 그저 나를 위해서 기도들이나 해주 십시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가 진영(鎭營)에 이르러 토론(討論)이 시작되려 하자, 관 속(官屬)들은 박보록(朴甫祿) 바오로가 힘이 하나도 없음을 보고 술 한 잔을 갖 다 주므로, 그는 감사하며 받아 마셨다. 술 한 잔을 마신 다음,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토론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토론(討論)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중은 횡설 수설(橫說竪說)하다가, 말문이 막혔다고 자인(自認)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 창 피하여 도망을 치려하였다.

관원(官員)들과 관속(官屬)들이 모두 창피하고 화가 나서, 자기들 선수(選手)의 용기(勇氣)를 북돋아주려고 하였으나,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는 마구 내쫓고야 말았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승리(勝利)를 내려 주신 데 대하여 천주께 감사(感 謝)를 올렸고, 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포졸(捕卒)들은 그를 몹시 칭찬하고, 추 켜주고, 매우 축하를 하며,

?천주교는 정녕 참 교(敎)야! 불법(佛法)을 숭상하는 중들로 말하면, 그 중 두 세 명만이라도 잡아다가, 천주교인에게 하는 것처럼 형벌을 시켜봐. 그래도 불 법을 전하겠다고 할 놈은 몇이 되지 않을걸!?

하고 주고받는 것이었다.

② 5월 후에는 새로 잡힌 사람이 있은 것 같지 않다. 박해자(迫害者)들의 열기(熱 氣)가 저절로 식었었는지, 아니면 조정(朝廷)에서 비밀지령(秘密指令)이 내렸었 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떻든 그 무렵에는 갇혀있는 교우(敎友)들을 처치(處置) 할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이리하여 모든 신자들이 다시 신문(訊問)을 받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석방(釋 放)되었고, 어떤 이는 귀양을 갔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의 어린 자식들은 어 리다고 하여 석방이 되었다. 박보록(朴甫祿) 바오로는 그들을 떠나보내며 말하였 다.

?가서 너희들의 영혼을 아무 죄 없이 깨끗하게 보존하고 만약에 불행이도 천주 를 거스르는 일이 있거든 진심으로 통회 하여라! 지금부터 10년 후에는 조선교 우들은 크나큰 기쁨의 자료를 얻게 될 것이다.?

그의 이 말은 이 나라에 신부(神父)가 들어오리라는 것이었다.

③ 며칠이 지난 후, 대구감옥(大邱監獄)에는 위에서 말한 6명의 증거자(證據者) 밖 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굽힐 수 없는 결심(決心)을 지닌 이들은, 자기들의 언도 (言渡)가 질질 끄는 것을 보고, 옥중에서 일생(一生)을 보내려는 거처럼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각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짚신을 삼는다든가, 다른 무슨 잔 일을 하였다.

전에 있던 감사(監司)가 바뀌고 새 감사가 와서, 다시 그들을 관가(官家)에 출 두시켜, 간단한 신문(訊問)을 한 뒤에 몹시 심한 매질을 하였다.

노령(老齡)과 전에 당한 형벌(刑罰)로 인하여, 기운이 쇠진(衰盡)한 박보록(朴 甫祿) 바오로는 이렇게 새로 고문(拷問)을 당하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옥 으로 돌아와서 며칠 동안 신음(呻吟)하다가, 자기의 최후(最後)가 가까웠음을 깨 닫고, 아들 박사의(朴仕義) 안드레아와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은 다른 교우(敎 友)들을 가까이 불러, 항구하고 충실하게 천주를 섬기라고 권면(勸勉)하며 이렇 게 말하였다.

?이 옥을 복락소(福樂所)로 생각하시오. 밖에 있는 부모나 아이들에 대한 분별 없는 지나친 사랑으로 분심되게 하지 말고, 내 뒤를 따르시오. 예수 그리스도 를 위하여 죽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오.?

하고 말한 후, 우러러볼 만큼 조용하고 화평(和平)하게, 그의 영혼(靈魂)을 천주 께 돌리니, 때는 정해(丁亥, 1827)년 9월 27일이요, 그의 나이는 7세였다.

④ 이 훌륭한 신앙증거자(信仰證據者)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으며, 전국의 신자(信 者)들은 매우 존경(尊敬)하는 마음으로 그를 기억(記憶)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친절(親切), 변함없는 온화(穩和), 모든 이에게 그렇게도 관대(寬 大)하게 베풀어 준 대접성(待接性),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의 그의 열성 (熱性), 그밖에도 그의 긴 일생(一生)을 두고 항상 아름다운 모범(模範)을 보여준

다른 덕행(德行)들은, 자기의 가족(家族)위에 천주의 강복(降福)을 이끌어왔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할 아들 박사의(朴仕義) 안드레아만이 잘 되었을 뿐만 만 아니라, 오늘까지도 그의 후손(後孫)들이 그들의 신앙(信仰)과 열심(熱 心)이 조상(祖上)을 욕되게 하지 않고 있다.

⑤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도 조금 뒤에 옥사(獄死)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 를 돌봐준 사람들에게 짐이 된 것을 늘 후회(後悔)하였다. 자기와 같이 아무런 가진 물건이 없는 교우죄수(敎友罪囚)들은, 감사(監司)가 근처의 민가(民家)에 부 과한 세금(稅金)으로 먹고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 그 마을 사람들에게 부담(負擔)이 된다는 생각에 몹시 마음이 걸렸다. 그가 식음(食飮)을 전폐하기로 작정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 괴퍅(乖愎)한 결 심(決心)을 천주의 도우심으로 시작하였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다.

어떻든 그는 절대적인 대재(大齋)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다른 신자 들이

?선생님이 잡숫지 않으시니, 저희도 모두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는 엄하게 책망(責望)하였다.

?비록 내가 당신들에게 연유를 말하지 못한 채 이와 같이 해야 한다하더라도, 당신들이 이렇게 한다면 그건 자살행위가 될 거요.?

어떤 사람들은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가 이렇게 여러 날을 지내다가 조용 히 숨을 거두었다고 말하는데, 또 다른 증인(證人)들의 말을 빌리면, 아무에게도 나쁜 본보기가 되지 않으려고, 오래 재(齋)를 지킨 뒤에는 음식(飮食)을 다시 들 었고, 그 후에도 얼마동안 더 살았다고 한다, 그는 68세로 무자(戊子, 1828)년 10월 27일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