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을해박해 -9

손드러 2010. 1. 19. 08:06
 


⑪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와 그의 동료(同僚)들은 이렇게 약 20개월 동안을 옥에서 지

    내며, 서로 열심(熱心)하고 인내(忍耐)하자고 격려(激勵)하고, 고난(苦難)의 도가니 속

    에서 그들의 덕을 단련(鍛鍊)시켰다.

       이러는 동안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아들 종악이 자기의 품속에서 죽는 괴로움을 당

    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행복(幸福)한 처지(處地)를 생각하고, 크게 위로(慰勞)를 받았

    다. 과연 아직 철도 나지 않은 이 어린아이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의지인 어머니

    를 따라 옥에까지 들어왔었다.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무서운 굶주림을 겪고, 그

    참혹(慘酷)한 옥중의 가난과 고초(苦草)를 모두 함께 당해야만 하였는데, 어머니보다

    며칠 앞서 천국(天國)에 올라간 것이다. 이 어린아이의 본명(本名)은 알 수가 없다.


⑫ 마침내 조정(朝廷)에서 새로운 명이 내려와, 이 증거자(證據者)들의 처형(處刑)이 결정

    (決定)되었다. 그들이 순교(殉敎)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우리는 자세히 알지를 못

    한다. 그 당시에 약술(略述)된 것을 근거(根據)로 하여, 그 읍내(邑內)의 증인(證人)들

    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그들이 형장(刑場)에 이르자,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指導者)로 지목(指目)되었던 김

    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제일 먼저 칼을 받아야 했다. 아직 초심자(初心者)였던 사형

    집행인(死刑執行人)은, 그때 기운이 빠져나가고 팔이 말을 잘 듣지 않게 되어, 순교자

    (殉敎者)의 머리는 칼을 두 번 맞고서여 땅에 떨어졌다. 이 광경(光景)을 지켜보고 있

    던 사람들은 모두,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그 말할 수 없는 형벌(刑罰)을 아주 조

    용히 당하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이 처참(悽慘)한 광경을 본 고성운(高聖云) 요셉

    은 사형집행인에게

   ꡒ조심해서 내 머리는 단번에 자르도록 하라.ꡓ

    고 일렀다. 그의 원은 채워져 단번에 머리가 떨어졌다. 그다음에 다른 남자(男子) 3명

    도 역시 참수(斬首)되었다.

       그런 다음 관장(官長)이 직접 두 여교우(女敎友)의 마음을 흔들어 보려고 이렇게 말

    하였다.

    ꡒ이제 저 남자들이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너희들 여자야 무엇 때문에 죽으

     려 하느냐? 저들의 죄에 비하면 너희의 죄는 가볍다. 자, 아직 때는 늦지

     않았으니, 한마디만 하면 너희들을 놓아주마.ꡓ

    이 말을 듣고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대답하였다.

    ꡒ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치(理致)를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관장님 말씀대로 한다면,

        남자들은 천상의 아버지이신 천주를 공경해야 하지만 여자들은 천주를 공경하면

        될 것입니다. 여러 말이 소용없습니다. 저는 법대로만 다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입니

        다.ꡓ

    그리고는 두 여인이 한 소리로 크게 외쳤다.

     ꡒ 예수와 마리아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그들과 같이 곧 천국으로 올라가자 하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배교(背敎)를 할 수가 있으며, 이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존(保存)

         하려고, 참된 생명(生命)과 영원한 행복(幸福)을 잃을 수가 있겠습니까?ꡓ

     이리하여 곧 명령이 내려져 이들 두 여인(女人)도 참수(斬首)를 당하였다. 이 사정(事

     情)을 약술(略述)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ꡒ이로 미루어 볼 때 이들 두 여인이 비록 약한 여성이었으면서도 아주 씩씩

    한 용기를 보여 주었고, 자기 목숨을 바침으로써, 천주의 영광을 더욱 찬란

    하게 증거할 줄을 알았다.ꡓ

       이 빛나는 순교자(殉敎者)들의 기나긴 순교(殉敎)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그것은 병

     자(丙子, 1816)년 11월 1일이었고, 처형장소(處刑場所)는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

     이 있는 대구(大邱)였다.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는 52세,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35세, 최성열(崔性悅) 바

     르바라는 40세였으며, 그 나머지는 나이를 알 수 가 없다.


⑬ 관장(官長)의 명령으로 순교자(殉敎者)들의 시신(屍身)은 형장(刑場) 근체에 정성스럽

    게 매장(埋葬)되었고, 그 위에는 흙이 얇게 한 켜 입혀졌으며, 무덤마다 묘비(墓碑)가

    세워졌다. 거기에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친척(親戚)과 교우(敎友)들은 서로 의논하여,

    이 시신(屍身)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묻기로 하고, 그 이듬해 3월 4일(*3월2일), 그 중 10

    명가량이 시신(屍身)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시신(屍身) 옮기는 일을 해가 떨어진 뒤에 하고자 하였으나, 인근 주민(住民)들에게

    들킬까봐 걱정들을 하였다. 그때 천주의 특별한 보호(保護)로, 시신(屍身)들이 묻혀있

    는 읍내 쪽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다. 하늘이 내려앉은 듯 하였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등불을 켜도 그저 일꾼들이 일 할만 한 빛을 낼 뿐, 거기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드디어 시신(屍身)을 찾아내고 보니, 최성열(崔性悅) 바르바라의 시신은 어떤 짐승

    이 파내어 먹은 모양인지 없었고, 나머지 6명의 시신(屍身)은 온전하게 남아 조금도 썩

    지 않아, 숨을 거둔지가 얼마 안 되는 것 같이 보였다. 무덤을 파헤쳤을 때에 시신(屍

    身)에서 나던 약간의 냄새도, 땅 밖에 나오자 이내 가시었다. 옷까지도 잘 보존(保存)되

    어 있었고, 습기(濕氣)가 차지를 않았었다. 이것을 보고 모든 교우(敎友)들이 감탄(感

    歎)을 하였다. 이 귀중(貴重)한 유해(遺骸)들은 적당한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함

    께 묻혔다.

       이 나라에서 아마도 둘째로 큰 대구(大邱)와 같은 도시에서, 이 7명의 순교자(殉敎

    者)가 처형(處刑)된 것은, 이웃의 도(道)에 크나큰 반향(反響)을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

    의 이름을 많은 우상숭배(偶像崇拜)자들에게 알리는 데에 적잖이 이바지하였다.



3.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와 을해박해(乙亥迫害, 1815년)의 차이


    여기에서 1815년의 이번 박해(迫害)와 1801년의 대 박해(大迫害) 사이에 있는 여러 가

    지 중요한 차이점(差異點)을 말해야 하겠다.

       1801년의 박해(迫害)는 전반적(全般的)인 것이어서, 신자(信者)들이 다소간 많이 있

    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 비해서 1815년의 박해(迫害)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慶尙道)에 새로 생긴 신자집단(信者集團)을

    훨씬 포악(暴惡)하게 엄습(掩襲)하였다.

       첫 번 박해(迫害) 때에는 정치적(政治的) 갈등(葛藤)과 당쟁(黨爭)이 큰 구실을 하였

    으나, 이번에는 그런 것이 도무지 없었고, 신입교우들은 단순히 신자(信者)이기 때문에

    옥에 갇혔고, 신자(信者)이기 때문에 사형(死刑)을 당한 것이었다.

       첫 번 박해(迫害)는 공식적(公式的)인 칙령(勅令)으로 시작되었고, 일이 모두 끝났다

    는 것을 모든 이에게 알리는 왕명(王命)으로 끝났지만, 이번에는 이전에 내렸던 금교령

    (禁敎令)이 현행령(現行令)으로 있었고, 아직도 그 효력(效力)을 갖고 있었으니, 새로

    운 칙령(勅令)은 필요하지가 않았다. 또한 공식적(公式的)인 종말(終末)도 없었으니,

    이 박해(迫害)는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중이며, 다만 관장(官長)들의 변덕과, 지방(地

    方)마다의 사정(事情)과, 주민(住民)들의 편견(偏見)에 따라 더 심하기도 하고 덜 심하

    기도 할 뿐이다.

       끝으로 1801년의 박해(迫害) 때에는 여교우(女敎友)는 몇 명밖에 붙잡히지 않았고,

    그것도 아주 훌륭한 집안, 그러니까 조정(朝廷)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위험시(危險視)

    되던 가문(家門)에서만 붙잡혔었다. 다른 여인들은 대부분 체포(逮捕)되지 않았었고,

    박해(迫害)도 당하지 않았었다. 다만 박해(迫害)의 여파(餘波)만은 당해야 했으니, 가

    산(家産)의 몰수(沒收)와 약탈(掠奪)로, 파산(破産)을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여교우

    (女敎友)들은 거의 모두가 아이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살 수 있었다.

       여기에 비해 1815년의 박해(迫害) 때에는 포졸(捕卒)들이 제멋대로 할 수가 있어, 흔

    히는 닥치는 대로 분간도 없이 붙잡았다. 그래서 옥에 갇히고, 사형(사刑)을 당한 여교

    우(女敎友)의 숫자가 비교적 많았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은 지옥(地獄)의 직접적인 영향

    (影響)을 잘 드러내는 것이니, 여자(女子)들은 소송(訴訟)에 관련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남자(男子)들이 범하면 엄중한 처벌(處罰)을 받을 폭력(暴力)이나 부정(不正), 비슷

    한 다른 잘못을, 여인(女人)들이 범하면 벌을 받지 않기까지 하는 이 나라의 정신(精

    神)과 관습(慣習)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어긋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 관련(關聯)될 때에는 이미 법률(法律)이나 풍속(風俗)도, 관

    습(慣習)까지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은 저주(咀呪)받은 족속(族屬)이니, 그들을 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허락(許諾)되었으며, 그들을 완전히 섬멸(殲滅)하는 데 힘쓰

    는 것은 국가(國家)에 봉사(奉事)하는 일로 되어 있었다.

                                                      (이상 제 중권 84쪽 까지)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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