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을해박해 - 5
4)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와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
㉠ 김계원 안드레아는 종한(宗漢)이라고도 하는데(종한은 관명(冠名), 필시 김진후(金震厚) 비오
의 3남 한현(漢鉉)일 것이다), 면천(沔川) 고을 솔뫼 사람이며, 이 위에서 이야기한 바 가 있
는 김진후(金震厚) 비오의 아들이었다.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어려서부터 하느
님을 섬기고 공경(恭敬)하기를 배웠다.
아버지가 20년 이상이나 끊임없는 박해(迫害)의 대상(對象)이 되었던 까닭으로, 그의
어린 마음은 불행(不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모든 세물(世物)에서 멀어
지게 되었고, 신앙(信仰)이 굳세어지고, 그가 하늘에서 받은 싹이 자라게 되었으며, 그
가 당할 어려운 시련(試鍊)에 준비태세(準備態勢)를 갖추게 되었다.
㉡ 이와 같이 박해(迫害)를 겪고, 추방(追放)을 당하는 가정에 살던 김종한(金宗漢) 안드
레아는 오래지 않아 부모(父母)와 친지(親知)와 조상(祖上)의 산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
다. 그래서 경상도(慶尙道) 안동(安東) 고을 우련발이라는 산골 깊숙히 위치한 낯선 고
장에 가서 살았다. 거기에서 17년 동안을 숨어 살며, 오직 애긍(哀矜)에 힘쓰고, 기도
(祈禱)와 성경(聖經) 읽기와 그 밖의 모든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키는 일에만 부지런
하였다.
사순절(四旬節) 시기에는 다른 보통의 극기행위(克己行爲)는 말할 나위도 없고 대개
는 날마다 대재(大齋)를 지켰다. 그의 일상의 양식(糧食)은 조밥에 소금을 얹어먹는 것
이었고, 그것을 장만하지 못하는 날에는 나뭇잎이나 도토리, 풀뿌리, 산나물 같은 것을
먹고 지내며, 영양(營養)이 더 있고 맛이 더 나은 음식을 구할 생각을 하는 일이 없었
다.
㉢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고 고생스러운 생활 중에서도 늘 거룩한 기쁨이 충만(充滿)하여,
낮에는 주로 천주교서적(書籍)을 베껴 사방에 전파(傳播)하였고, 저녁에는 신자(信者)
들을 가르치는 일에 지극한 열성(熱性)을 보여, 가끔 자정이 지나도록 이야기를 끌어나
가는 일이 있을 지경이었다.
또한 외교인(外敎人)들에게 신앙(信仰)을 전파하는 일에도 열정적(熱情的)이어서 그
들을 가르쳐 많이 입교(入敎)시켰는데, 거기에는 그의 말에 힘입은 경우도 있었으나,
이에 못지않게 기도(祈禱)와 모범(模範)의 효력도 크게 작용(作用)하였다.
㉣ 이러한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였는데, 4월 23일에 안동(安東) 포졸(捕卒)들에게 잡
혀, 그 고장 영장(營將) 앞으로 끌려 나갔다. 영장(營將)은 우선 그에게서 배교(背敎)한
다는 말을 유도(誘導)해 내려고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옥에 가두게 하였다가, 이틀
이 지난 후, 감사(監司)의 명령(命令)으로 다리에 매질을 시킨 뒤에, 대구(大邱)로 이송
하였다.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대구감영(大邱監營) 문전에 이르렀을 때, 그 안에서 나와
혼자 자유롭게 가는 여교우(女敎友) 한 명을 만났다. 이것을 보고 놀란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 여교우(女敎友)는 죽음을 면하려고 배교(背敎)
한 길이라고 대답하였다.
㉤ 이 여교우(女敎友)는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는 그렇게
도 꿋꿋하게 형벌(刑罰)을 참아 받는 것을 우리가 보았는데, 대구(大邱)로 와서는 마침
내 고문(拷問)의 혹독(酷毒)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음이 약해져서 신앙(信仰)을 배반
(背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는 한숨을 쉬며, 그 여교우(女敎友)에게 말하였다.
ꡒ이거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치십니다. 그래 무슨 기대를 가지고 더 살 것 같습
니까? 지금 여기서 나가지만은 그래 몇 해나 더 살 것 같습니까?ꡓ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대답하였다.
ꡒ하긴 내가 지금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만, 오늘이나 내일 죽지 말라는
법이 없지요.ꡓ
ꡒ그렇다면 지금 착하게 죽는 것이 천만 번 낫지 않습니까?ꡓ
하고 말하며, 아주 힘 있는 말로 그 여교우를 권면(勸勉)하여 마지않았다.
㉥ 이에 여교우(女敎友)는 은총(恩寵)의 힘을 입어 눈이 뜨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와
같이 이내 진영(鎭營)으로 도로 들어갔다. 포졸(捕卒)들이 욕설을 퍼붓고, 때리고, 밀치
고 하면서, 전력을 다하여 그 여교우가 관장(官長) 앞에까지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
나 허사(虛事)였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틈을 엿보아 살짝 빠져 들어가 관장(官長)앞에 주저 앉았
다. 관장은 그녀를 알아보고서
ꡒ놔 주었는데 왜 또 왔느냐?ꡓ
고 물었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대답하였다.
ꡒ아까는 혹형(酷刑)을 견디기가 힘에 겨워서 천주를 배반했는데, 이건 크나큰 죄었
습니다.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왔습니다. 만일 원하시면 저를 죽
여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ꡓ
관장(官長)은 김(金) 아가다 ․ 막달레나를 미친년으로 몰아 내쫓게 하였으나, 그녀
는 어떻게 하여 다시 관장(官長)앞으로 오게 되었고, 배교(背敎)한 것을 다시한 번 큰소
리로 취소(取消)하였다.
㉦ 관장(官長)은 성이 발끈 나서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를 결박(結縛) 짓게 한 다음, 어떻
게나 몹시 매질을 시켰던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오래지 않아 뼈가 모두 허옇게 드러
났다. 김(金) 아가다 막달레나는 의식(意識)을 잃은 후 옥으로 옮겨졌는데, 옥에 들어가
면서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5월 초였으며, 그녀의 나이는 50이 가까웠었다.
㉧ 이번에는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문초(問招)를 받을 차례였는데, 그는 조용하고 꿋
꿋하게 대답하였다. 관장(官長)이 아무리 신문(訊問)을 계속하고 모진 매를 치게 하여
도, 순교자(殉敎者)의 항구심은 변함이 없었다.
관장(官長)은 공연히 시간과 정력만 허비(虛費)한다는 것을 느끼고, 조정(朝廷)에 보
고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굴복(屈伏)을 시키라는 회시(回示)를 보내왔
으나,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가 다시 거부를 하자, 세 번째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결심(決心)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드디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도 자기가 권고(勸告)하여, 김(金) 아가다 막달레
나에게 순교(殉敎)의 월계관(月桂冠)을 얻게 해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이리하여 처음에 있었던 7명이라는 수효가 다시 채워졌다. 이 용감한 증거자(證據者)들
은 모두 사형선고(死刑宣告)의 무거운 짐을 지고, 매일 같이 처형(處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비밀스러운 계획(計劃)으로, 무슨 까닭에서인지는 모르
지만, 사형집행(死刑執行)이 무기연기(無期延期)되기를 허락하셨다. 그래서 이들은 이
때부터 옥중(獄中)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사형(死刑)이 확정(確定)되었으
므로, 다시는 고문(拷問)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대신 궁핍(窮乏)과 굶주림과 갖은 압제(壓制)를 당해야만 했다. 아직도 2
년 동안을, 그들은 이렇게 날마다 당하는 긴 순교(殉敎) 가운데서, 그 죽음과도 같은
삶을 이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