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신유박해후기의 양상 -1-3
* 혈세(血洗)로 빛나는 김백순(金伯淳)
①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 여럿이 그의 승리(勝 利)를 나누어 가졌다. 그들 중 가장 알려진 사람은 김백순(金伯淳)이었는데, 그는 아직 예비신자(豫備信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기록에 본명(本名)이 없다. 그는 몇 촌간인지는 모르지만,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종형(從兄)인데, 서울에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을 모면하고 영예(榮譽)를 얻으려고 공직(公職)의 길을 헤쳐 나갈 생각밖에는 없었다.
② 1636년에 정승(政丞)이었던 그의 조상(祖上) 중의 한 사람이, 만주인들이 조선 (朝鮮)과 중국(中國)을 갈라놓는 강 근처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들에게 굴복(屈伏)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나라와 임금께 바친 이 충성(忠誠)으로 인하여, 그에게는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그 후손(後孫)들에게도 정문(旌門)을 세울 허가(許可)를 주었는데, 이 두 가지 영예(榮譽)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후손(後孫)들에게 빨리 출세(出世)할수 있는 칭호(稱號)가 된다.
그러므로 김백순(金伯淳)은 순전히 야심적(야심적)인 견지에서 글공부에 전념(專念)하였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자비(慈悲)의 계획(計劃)을 가지고 계시던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차차 참된 영광(榮光)과 참된 행복(幸福)을 원하는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다.
③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성현(聖賢)들의 철학서(哲學書)를 읽기 시작하였으나, 그것들이 모호하고 모순(矛盾)되어 그의 마음에 의심(疑心)이 나게 되었고, 그것들을 전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노자(老子)의 글과 다른 글들에서 사람이 죽어도 아주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서, 그는 새로운 도리(道理)와 새로운 학설(學說)을 만들어, 곧 몇몇 친구들에게 설명(說明)하였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자네의 말은 매우 이상한데. 자네는 아마 그 모든 것을 서교(西敎)에서 따왔지?ꡓ
이 지적(指摘)은 김백순(金伯淳)에게 큰 충격(衝擊)을 주었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ꡒ우리의 지능을 초월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가 그것이 서교(西敎)에서 왔다고 말을 하니, 그 종교에는 무엇인가 아주 위대하고 비상한 것이 틀림없다.ꡓ
따라서 그는 곧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상종(相從)하기 시작했고, 2년 동안 그들의 교리(敎理)를 검토(檢討)하고 토론(討論)하며, 깊이 연구(硏究)한 후에, 확신(確信)을 가졌다고 굳게 믿고, 온 마음을 바쳐 천주교(天主敎)가 명하는 모든 본분(本分)을 충실히 지켰다.
④ 그에게서 배우고 권고(勸告)를 받은 그의 어머니도 천주교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속이 좁고 뻣뻣하고 (野心)이 많아, 자기 남편의 영예(榮譽)를 항상 갈망(渴望)하여 오던 그의 아내는, 저기의 희망(希望)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여 온갖 비난(非難)과 욕설(辱說)을 퍼부었다.
⑤ 김백순(金伯淳)은 자기가 입교(入敎)한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친척(親戚) 중의 한 사람이 어느 날 천주교(天主敎)에 대해서 질문(質問)을 하자 그는 큰소리로,
ꡒ이것은 침 도리이고, 위대한 도리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따라야 하니, 나 와 같이 하시오.ꡓ
하고 대답하였다.
또 하루는 외숙부(外叔父)가 그를 보러 와서, 온갖 방법(方法)을 써서 그를 유혹(誘惑)하려다가 말을 듣도록 할 수가 없게 되자,
ꡒ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ꡓ
하고 말하였다. 이에 김백순(金伯淳)은
ꡒ숙부와 의절(의절)을 할지언정 저는 내 천주와 의절은 못하겠습니다.ꡓ
하고 조용히 대답하였다.
그때부터 그의 친구들은 그와는 상종(相從)을 끊자고 서로논의(論議)하였고, 그의 친척(親戚)들은 그를 집안에서 내쫓기로 결정(決定)하였다.
이 용감(勇敢)한 신입교우(新入敎友)는 이 모든 것을 무관심(無關心)하게 지켜보며,
ꡒ내가 천주를 안 뒤로는 내 마음의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으니, 내 마음은 마치 산과 같다.ꡓ
하고만 말하였다.
⑤ 1801년 봄에 그는 한 배교자(背敎者)의 밀고(密告)로 붙잡혀 옥에 갇혔다. 그의 신문내용(訊問內容)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결안(結案)을 믿는다면, 형벌(刑罰)로 인하여 그는 잠시 심약(心弱)한 말을 몇 마디 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말을 철회(撤回)하고, 보기 드문 용기(勇氣)와 굳건함을 끝까지 나타냈다.
그의 종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동시에 사형(死刑)이 언도(言渡)되어 처형(處刑)되었는데,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그가 옥에서 성세(聖洗)를 받았다는 말은 없다. 그러니까 혈세(血洗)가 그를 교우로 만들었고, 그에게 개선(凱旋)의 교회(敎會)로 들어갈 권리(權利)를 준 것이다.
⑥ 역시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이지만, 서족(庶族)인 김이백(金履白)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겠다. 그의 결안(結案)이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결안에 첨부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는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같이 죽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 문서(文書)에는 천주교(天主敎)의 이야기가 없고, 또 한편 다른 어떤 문서
(文書)에서도 그가 천주교인(天主敎人)이라는 말이 없으므로, 그가 교우(敎友)인 듯하지만, 그에게 감히 순교자(殉敎者)의 칭호를 주지는 못하겠다.
※ 이희영(李喜英) 루카는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절친한 친구(親舊)로, 그도 김건순(金健淳) 요사팟과 함께 같은 신앙고백(信仰告白)을 하였고, 그와 함께 순교 (殉敎)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여주읍(驪州邑)에서 살았었는데, 거기에서 천주교(天主敎)를 배워 신봉(信奉)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移徙)를 왔는데, 거기서 그의 신앙(信仰)과 열심(熱心)은 더해 가기만 했다.
젊어서 그림 그리는 일을 배웠으므로 그는 많은 종교화(宗敎畵)를 그렸는데, 그것이 그에 대한 결안(結案)의 핑계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결안(結案)은 김백순(金伯淳)의 결안(結案)에 첨부되어 있으며, 3월 29일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집행(執行)은 6월 1일로 연기(延期)되어, 방금 말한 다른 증거자(證據者)들과 같이 참수(斬首)당한 것 같다.
※ 그날 다른 희생자(犧牲者)들이 아마 또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한 수기(手記)에 의하면,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찬척과 친구들 중에서 약 20여 명이 붙잡혔는데,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충성(忠誠)을 보였고, 어떤 사람들이 나약(懦弱)하게 되는 불행(不幸)을 가졌었는지를 정획(正確)히 알 수 없었다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자세한 기록(記錄)을 얻기란 불가능(不可能)하였다. 그러나 그 집안에 천주교인(天主敎人)의 수가 얼마가 되었었더라도, 지금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그 집안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신(情神)은 천주교(天主敎)에 대해서 적의(敵意)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1875년에 승하(昇遐)한 순조(원문에는 純宗)의 왕비(王妃)도 이 집안 출신(出身)이었는데, 이 왕비는 감히 드러내놓고 천주교인(天主敎人)의 편을 들지는 못하면서도, 그들에게 항상 호의(好意)를 베풀었다.
지금의 왕비(王妃)도 같은 집안 출신(出身)인데, 오늘날까지도 교우(敎友)들에게 많은 귀찮음을 피하게 해준, 중요한 감사(監司)들이 대부분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친척(親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