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신유박해 후기의 양상2

손드러 2010. 1. 18. 23:00
 

⑦ 그때까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천주교에 대하여 극히 간접적(間接的)으로 밖에는

    듣지 못하여, 거기에 대한 정확(正確)한 개념(槪念)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강이천(姜彛天)을 포함한 몇몇 친구와 협력(協力)하여,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魔術)

    의 비밀(秘密)과 비상(非常)한 비방(秘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서 그것을 연구(硏究)

    하기 시작하였다.

       이 강이천(姜彛天)이란 사람은 마음씨가 고약하고, 꾀가 많은 소복(小北)의 이름있는

    선비였다. 그는 머지않아 왕조(王朝)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하고서, 기묘한 비방(秘方)

    을 탐구(探求)하고 마술(魔術)을 연구(硏究)하였다가, 때가 되면 이것을 이용(利用)하

    여 성공(成功)의 길을 개척(開拓)하고자 하였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 사람과 교제(交際)하면서 그의 깊은 생각은 까맣게 모르

    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로서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하는 타고난 호기심(好奇心)외

    에, 실제로 복음(福音)의 도리(道理)를 깊이 연구(硏究)하고자 하는 원(願)을 가지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집안이 속해있는 노론(老論)에는 고명(高名)한 천주교인

    (天主敎人)을 볼 수 없어, 남인(南人)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決心)을 하고, 권

    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에게 사람을 보내어 종교문제(宗敎問題)에 관하여 그와 몇 번

    토론(討論)을 하자고 청하였다.


⑧ 이 양반 교우(兩班敎友)는 거기에 기꺼이 동의(同意)하였다. 그러나 두 집안은 세습적

    (世襲的)인 적대관계(敵對關係)로 공공연하게 만날 수가 없으므로, 김건순(金健淳) 요

    사팟은 밤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를 찾아갔다.

       처음 몇 범 만나보자, 그는 하느님의 존재(存在)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현의(玄義)

    를 어렵지 않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강생(降生)의 현의(玄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그

    의 모든 생각을 뒤엎어 놓아, 그는 근심하고 낙담하였다. 그는 그런말을 한 사람은 벼락

    을 맞거나 다른 어떤 처벌(處罰)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서, 여러 날 동안을

    거기에 가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다시 연구(硏究)를 시작했는데, 성령(聖

    靈)의 은총(恩寵)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으므로, 그는 졌다고 자백하며 자기의 이성(理

    性)을 신앙(信仰)에 굴복(屈伏)시키고, 굳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마음이 바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에게 편지(便紙)를 보내어 복음(福音)의 참된 정신을 알리고, 신기(新奇)한 물건이나

    마술적(魔術的)인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고자하였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

    은 감격(感激)하여 기꺼이 항복(降伏)하고 그가 몰두(沒頭)하였던 연구를 결정적(決定

    的)으로 포기(抛棄)하고, 구원(救援)의 길로 올바르게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⑨ 그의 친구 중 거의모두가 그의 본을 따랐다. 여주읍(驪州邑)에서 참수(斬首)당하는 것

    을 본 바 있는 영광스러운 순교자(殉敎者)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도(元景道) 요

    한도 그 중에 있었다. 강이천(姜彛天)만이 믿지 않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깊숙이 자

    기의 야심적(野心的)인 꿈과 환상(幻想)적인 연구에 빠져 들어갔다.

      두 달이 겨우 지났을까 말까 한데, 이자와 그의 동료들의 계획(計劃)이 드러났고, 정

    부(政府)는 그들의 행동에서ꡐ반역(叛逆)의 경향(傾向)과 백성들 가운데 소요(騷擾)를

    일으킬 위험(危險)이 발견된다ꡑ고 생각하고서 그들을 체포(逮捕)하여 법정(法廷)에 서

    게 하였다. 때는 1797년이었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도 강이천(姜彛天)과 전에 교제(交際)를 하였던 탓으로 자연

    히 관련(關聯)이 있게 되었다. 다행이 그의 훌륭한 자질(資質)과 정직(正直)이 이미 왕

    에게 알려져 있어서, 왕은 그를 전적으로 존중하여 그를 보호(保護)한 덕으로 그가 이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조금 후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신부(神父)에게서 성세(聖洗)를 받았고,  그로 인

    하여 그의 열심은 훨씬 더하여졌다. 그는 자기가 천주교인(天主敎人)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찬척(親戚)과 찬구들을 가르 치고 그들에게 선행(善

    行)을 하라고 권고(勸告)하였으며, 온갖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복음(福音)을 전파(傳

    播)하기를 마지않았다. 여주(驪州)고을과 그 근방에서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이 신앙

    (信仰)의 은혜(恩惠)를 얻은 것은 하느님 다음으로 그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천주교(天主敎)를 신봉(信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

    며, 온갖 노력(努力)을 기울여 거기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김건

    순(金健淳) 요사팟은 매우 괴로운 가정(家庭)의 박해(迫害)를 줄곧 당해야 했다. 그러

    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本分)을 충실(忠實)히 지켜나갔다.

       그는 정약용(丁若鏞) 요한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ꡐ배교문에(背敎文) 서명(書名)

    을 하여 배반하였다ꡑ는 소식(消息)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苦

    痛)을 나타냈으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출생(出生)과 사회적 지위(社會的地位)로 인하여 세속(世俗)과 조정(朝

    廷)의 많은 일에 관련되었던 탓이었을까,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이 천주교의 일을 지도

    (指導)하는데 큰 몫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권력자(權力者)들의 변동

    (變動)으로, 자기 당파의 양반들이 법석을 떨며 박해(迫害)를 준비(準備)하고 예고(豫

    告)할 때, 그가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약간 소원(疏遠)하였음을 볼 수도 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와 협력하여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완전(完全)하고 체

    계적(體系的)인 저서(著書)를 편찬(編纂)하는 일을 한 것이 아마 그 때인 것 같다. 그들

    이 그 저서를 완성(完成)하지 못하였고, 또 교우들이 그중 한 부분(部分)도 건지지 못하

    였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本稿     쪽 참조).


⑩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행동은 그가 영세(領洗)한 뒤로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

    데 없었다. 그의 겸손(謙遜)은 그의 공로(功勞)와 맞먹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敎

    友)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덕의 광채(光彩)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迫害)

    의 희생자(犧牲者)로 지목하였다.

      이런 환경(環境)에서 그의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이 그가 추적(追跡)되지 않도록 하여

   줄 심약(心弱)한 말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얼마나 노력(努力)을 기울였는지를 상상(想

   像)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용사(勇士)가 자기의 의무(義

   務)를 저버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과연 체포영장(逮捕令狀)이 그에게 내려졌으나, 그

   것은 아마 3월 중의 일이었으리라.

      포졸(捕卒)들은 그를 잡으러 서울에 있는 그의 생부(生父)의 집으로 갔다. 그의 아버

   지는 그때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밥 먹기를 계속하며 금부나졸(禁府邏卒)들에게 말

   하였다.

  ꡒ내 아들은 오늘 과거를 보러 갔네. 걔가 이러저러한 나무 밑에 앉아있을 터

   인데, 이러저러한 표로 그 애를 알아볼 수 가 있을 걸세. 아무런 의심도 일으

   키지 말고 자네들의 의무를 다하게나.ꡓ

   이 말을 하며 그는 목소리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체포(逮捕)되어 옥에 갇혔다.


⑪ 그의 유죄판결(有罪判決)을 막기 위하여 모든 수단(手段)이 동원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집안 식구 한 사람의 형사재판(刑事裁判)으로 인하여, 집안의 명예(名譽)와 안위(安危)

    가 위태(危殆)롭게 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도 권력(權力)있는 그의 집안은, 정식

    으로 배교(背敎)를 하지 않고서, 또한 그 자체(自體)만으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조그마한 표시를 함으로써, 이 양반죄수(兩班罪囚)가 석방(釋放)되어 나오도록 모든 것

    을 마련하였다.

       필연적으로 그와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를 대질(對質)시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신부를 모른다고 주장(主張)하려고만 한다면, 즉시 석방(釋放)이 되도록 관원(官

    員)들과 합의가 되었었다.

       그의 끈기를 흔들게 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친척(親戚)과 나라의 대관(大官)들로 하

     여금 일부러 옥안을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어, 그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ꡐ최소한의

     자기 집안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온 집안의 멸망을 피하도록 하라ꡑ 고 간청(懇請)하는

     그들을 보았을 때,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마음속에서는 얼마마한 싸움이 벌어졌었

     겠는가?

        아마도 거기에 약간의 감동(感動)을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를 신부 앞으로 데려

      가, ꡐ이 사람을 아는가?ꡑ하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대답(對答)을 주저(躊躇)하였기

      때문이다.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그가 유혹(誘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를 자극

      (刺戟)하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ꡒ아, 그대도 소국의 소인임을 보이려 하는구려!ꡓ

     조선 양반의 자존심(自尊心)은 이 비난(非難)으로 자극(刺戟)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를 위하여 쇠고랑을 차고 있는 사도(使徒)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은총(恩寵)이함으

     로써, 증거자(證據者)는 다시 용기(勇氣)를 내어 자기의 신앙(信仰)을 과감하게 고백

     (告白)하였다.


⑫ 신문(訊問)을 당할 때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여러 번 천주교(天主敎)를 웅변적

    (雄辯的)으로 변호(辯護)하고 그것을 확증(確證)하기 위하여, 이 나라의 경서(經書)에

    서 뽑은 많은 구절(句節)들을 인용(引用)하였다. 관리(官吏)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ꡒ어떻게 그렇게도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

   할수가 있느냐? 너는 사도(邪道)를 증명(證明)하기 위하여 우리의 경서(經書)

   를 사용하고자 하니 죽어 마땅하다.ꡓ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나는 온 조정과 나라의 대신들이 백성의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임금께 장수

   (長壽)를 확실히 하여드리기 위하여, 이 종교를 신봉하기를 바랍니다.ꡓ

    모든 방편(방편)이 다 쓰여졌는데도, 증거자(證據者)의 끈기는 이무런 희망(希望)도

    남겨주지 않았으므로, 결국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4월 20일(6월 1일) 그는 서

    소문(西小門) 밖에 있는 형장(刑場)으로 끌려갔다.

      그의 고귀(高貴)함과 그의 덕행(德行)과 명성(名聲)으로 인하여, 형장(刑場)으로 가는

    길에는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형장(刑場)으로 가는 동안

    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침착과 위엄(威嚴)을 보존(保存)하였고, 형장(刑場)에 도

    착하자마자 그는 모여있는 군중(群衆)에게 말하였다.

  ꡒ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오. 나도 약간의 명성이 있

   고, 높은 벼슬도 얻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헛되고 거짓됨을 알고서 원치를

   않은 것이오. 천주교만이 진리요. 그래서 내가 천주교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

   워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 모두 그것을 잘 생각하고 내 본을 따르시오.ꡓ

    그리고는 그의 복된 불사(不死)를 보증(保證)하여 주는 칼을 머리 숙여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 밖에 되지 않았다.


⑬ 서울에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법(法)과 관습(慣習)

    에 의하면,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그들의 지위를 잃어야만 했고, 또 이렇게 위태롭게 된

    사람의 수효가 나라의 가장 높은 벼슬아치들 중에까지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죽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집안은 거의 만능(萬能)이었기 때문에, ꡐ각자

   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부모 친척은 거의 필요가 없다ꡑ는 이 원칙(原則)을

    이번에는 승인(承認)하게 할 수가 있었고, 그로써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

    들은 모두가 그들의 지위(地位)를 보존(保存)할 수가 있었다.

      이 죽음이 김씨(金氏)집안 문중(門中)의 종가(宗家)를 더럽히는 치욕(恥辱)의 오점(汚

   點)을, 할 수 있는 대로 없애기 위하여, 그의 집안에서는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파양

   (罷養)을 정부에 청원(請願)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거기에 동의(同

   意)하였고, 결국 다른 사람이 갈음하여 정식으로 종가(宗家)의 후손(後孫)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메모 :

⑦ 그때까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천주교에 대하여 극히 간접적(間接的)으로 밖에는  듣지 못하여, 거기에 대한 정확(正確)한 개념(槪念)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강이천(姜彛天)을 포함한 몇몇 친구와 협력(協力)하여, 그는 천주교에서 마술(魔術)    의 비밀(秘密)과 비상(非常)한 비방(秘方)을 얻을 줄로 생각하고서 그것을 연구(硏究)

기 시작하였다.

이 강이천(姜彛天)이란 사람은 마음씨가 고약하고, 꾀가 많은 소복(小北)의 이름있는    선비였다. 그는 머지않아 왕조(王朝)가 바뀌리라는 생각을 하고서, 기묘한 비방(秘方) 탐구(探求)하고 마술(魔術)을 연구(硏究)하였다가, 때가 되면 이것을 이용(利用)하여 성공(成功)의 길을 개척(開拓)하고자 하였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 사람과 교제(交際)하면서 그의 깊은 생각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로서는 모르는 것을 배우고자하는 타고난 호기심(好奇心)외    에, 실제로 복음(福音)의 도리(道理)를 깊이 연구(硏究)하고자 하는 원(願)을 가지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집안이 속해있는 노론(老論)에는 고명(高名)한 천주교인  (天主敎人)을 볼 수 없어, 남인(南人) 사람들의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決心)을 하고, 권   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에게 사람을 보내어 종교문제(宗敎問題)에 관하여 그와 몇 번 토론(討論)을 하자고 청하였다.


⑧ 이 양반 교우(兩班敎友)는 거기에 기꺼이 동의(同意)하였다. 그러나 두 집안은 세습적(世襲的)인 적대관계(敵對關係)로 공공연하게 만날 수가 없으므로, 김건순(金健淳) 요 사팟은 밤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를 찾아갔다.    처음 몇 범 만나보자, 그는 하느님의 존재(存在)와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현의(玄義)를 어렵지 않게 믿게 되었다. 그러나 강생(降生)의 현의(玄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그 의 모든 생각을 뒤엎어 놓아, 그는 근심하고 낙담하였다. 그는 그런말을 한 사람은 벼락을 맞거나 다른 어떤 처벌(處罰)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서, 여러 날 동안을 거기에 가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그를 죽이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다시 연구(硏究)를 시작했는데, 성령(聖  靈)의 은총(恩寵)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으므로, 그는 졌다고 자백하며 자기의 이성(理  性)을 신앙(信仰)에 굴복(屈伏)시키고, 굳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마음이 바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편지(便紙)를 보내어 복음(福音)의 참된 정신을 알리고, 신기(新奇)한 물건이나  마술적(魔術的)인 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고자하였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 은 감격(感激)하여 기꺼이 항복(降伏)하고 그가 몰두(沒頭)하였던 연구를 결정적(決定 的)으로 포기(抛棄)하고, 구원(救援)의 길로 올바르게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⑨ 그의 친구 중 거의모두가 그의 본을 따랐다. 여주읍(驪州邑)에서 참수(斬首)당하는 것을 본 바 있는 영광스러운 순교자(殉敎者)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도(元景道) 요한도 그 중에 있었다. 강이천(姜彛天)만이 믿지 않고,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깊숙이 자

    기의 야심적(野心的)인 꿈과 환상(幻想)적인 연구에 빠져 들어갔다. 

 달이 겨우 지났을까 말까 한데, 이자와 그의 동료들의 계획(計劃)이 드러났고, 정부(政府)는 그들의 행동에서ꡐ반역(叛逆)의 경향(傾向)과 백성들 가운데 소요(騷擾)를  일으킬 위험(危險)이 발견된다ꡑ고 생각하고서 그들을 체포(逮捕)하여 법정(法廷)에 서게 하였다. 때는 1797년이었다.  김건순(金健淳) 요사팟도 강이천(姜彛天)과 전에 교제(交際)를 하였던 탓으로 자연히 관련(關聯)이 있게 되었다. 다행이 그의 훌륭한 자질(資質)과 정직(正直)이 이미 왕에게 알려져 있어서, 왕은 그를 전적으로 존중하여 그를 보호(保護)한 덕으로 그가 이 사건(事件)에 연루(連累)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조금 후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신부(神父)에게서 성세(聖洗)를 받았고,  그로 인하여 그의 열심은 훨씬 더하여졌다. 그는 자기가 천주교인(天主敎人)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찬척(親戚)과 찬구들을 가르 치고 그들에게 선행(善  行)을 하라고 권고(勸告)하였으며, 온갖 기회(機會)를 이용하여 복음(福音)을 전파(傳  播)하기를 마지않았다. 여주(驪州)고을과 그 근방에서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이 신앙   (信仰)의 은혜(恩惠)를 얻은 것은 하느님 다음으로 그의 덕택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천주교(天主敎)를 신봉(信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 며, 온갖 노력(努力)을 기울여 거기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매우 괴로운 가정(家庭)의 박해(迫害)를 줄곧 당해야 했다. 그러

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자기 본분(本分)을 충실(忠實)히 지켜나갔다. 

그는 정약용(丁若鏞) 요한이 죽음을 모면하기 위하여ꡐ배교문에(背敎文) 서명(書名)을 하여 배반하였다ꡑ는 소식(消息)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苦 痛)을 나타냈으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출생(出生)과 사회적 지위(社會的地位)로 인하여 세속(世俗)과 조정(朝 廷)의 많은 일에 관련되었던 탓이었을까,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이 천주교의 일을 지도  (指導)하는데 큰 몫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갑작스러운 권력자(權力者)들의 변동    (變動)으로, 자기 당파의 양반들이 법석을 떨며 박해(迫害)를 준비(準備)하고 예고(豫 告)할 때, 그가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약간 소원(疏遠)하였음을 볼 수도 있다.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와 협력하여 천주교(天主敎)에 대한 완전(完全)하고 체계적(體系的)인 저서(著書)를 편찬(編纂)하는 일을 한 것이 아마 그 때인 것 같다. 그들이 그 저서를 완성(完成)하지 못하였고, 또 교우들이 그중 한 부분(部分)도 건지지 못하였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 있다(本稿     쪽 참조).

⑩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행동은 그가 영세(領洗)한 뒤로 항상 굳건하고 점잖고 나무랄데 없었다. 그의 겸손(謙遜)은 그의 공로(功勞)와 맞먹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교우(敎 友)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덕의 광채(光彩)는 미리부터 그를 박해(迫害) 의 희생자(犧牲者)로 지목하였다. 

이런 환경(環境)에서 그의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이 그가 추적(追跡)되지 않도록 하여 줄 심약(心弱)한 말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얼마나 노력(努力)을 기울였는지를 상상(想像)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용사(勇士)가 자기의 의무(義務)를 저버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 과연 체포영장(逮捕令狀)이 그에게 내려졌으나, 그것은 아마 3월 중의 일이었으리라.  포졸(捕卒)들은 그를 잡으러 서울에 있는 그의 생부(生父)의 집으로 갔다. 그의 아버는 그때 마침 밥을 먹고 있었는데, 밥 먹기를 계속하며 금부나졸(禁府邏卒)들에게 말하였다.

  ꡒ내 아들은 오늘 과거를 보러 갔네. 걔가 이러저러한 나무 밑에 앉아있을 터인데, 이러저러한 표로 그 애를 알아볼 수 가 있을 걸세. 아무런 의심도 일으 키지 말고 자네들의 의무를 다하게나.ꡓ 

이 말을 하며 그는 목소리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체포(逮捕)되어 옥에 갇혔다.

⑪ 그의 유죄판결(有罪判決)을 막기 위하여 모든 수단(手段)이 동원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집안 식구 한 사람의 형사재판(刑事裁判)으로 인하여, 집안의 명예(名譽)와 안위(安危)가 위태(危殆)롭게 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도 권력(權力)있는 그의 집안은, 정식 으로 배교(背敎)를 하지 않고서, 또한 그 자체(自體)만으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어떤  조그마한 표시를 함으로써, 이 양반죄수(兩班罪囚)가 석방(釋放)되어 나오도록 모든 것을 마련하였다. 

필연적으로 그와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를 대질(對質)시키게 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신부를 모른다고 주장(主張)하려고만 한다면, 즉시 석방(釋放)이 되도록 관원(官員)들과 합의가 되었었다.  그의 끈기를 흔들게 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친척(親戚)과 나라의 대관(大官)들로 하여금 일부러 옥안을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어, 그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ꡐ최소한의 자기 집안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온 집안의 멸망을 피하도록 하라ꡑ 고 간청(懇請)하는 그들을 보았을 때,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마음속에서는 얼마마한 싸움이 벌어졌었겠는가? 

아마도 거기에 약간의 감동(感動)을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를 신부 앞으로 데려가, ꡐ이 사람을 아는가?ꡑ하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대답(對答)을 주저(躊躇)하였기  때문이다.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그가 유혹(誘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를 자극 (刺戟)하려고 이렇게 말하였다.

      ꡒ아, 그대도 소국의 소인임을 보이려 하는구려!ꡓ

조선 양반의 자존심(自尊心)은 이 비난(非難)으로 자극(刺戟)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쇠고랑을 차고 있는 사도(使徒)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은총(恩寵)이함으로써, 증거자(證據者)는 다시 용기(勇氣)를 내어 자기의 신앙(信仰)을 과감하게 고백 (告白)하였다.


⑫ 신문(訊問)을 당할 때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여러 번 천주교(天主敎)를 웅변적 (雄辯的)으로 변호(辯護)하고 그것을 확증(確證)하기 위하여, 이 나라의 경서(經書)에  서 뽑은 많은 구절(句節)들을 인용(引用)하였다. 관리(官吏)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ꡒ어떻게 그렇게도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할수가 있느냐? 너는 사도(邪道)를 증명(證明)하기 위하여 우리의 경서(經書)를 사용하고자 하니 죽어 마땅하다.ꡓ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ꡒ나는 온 조정과 나라의 대신들이 백성의 행복을 만들어 주고, 임금께 장수  (長壽)를 확실히 하여드리기 위하여, 이 종교를 신봉하기를 바랍니다.ꡓ 

모든 방편(방편)이 다 쓰여졌는데도, 증거자(證據者)의 끈기는 이무런 희망(希望)도  남겨주지 않았으므로, 결국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4월 20일(6월 1일) 그는 서소문(西小門) 밖에 있는 형장(刑場)으로 끌려갔다.  그의 고귀(高貴)함과 그의 덕행(德行)과 명성(名聲)으로 인하여, 형장(刑場)으로 가는  길에는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형장(刑場)으로 가는 동안에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침착과 위엄(威嚴)을 보존(保存)하였고, 형장(刑場)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모여있는 군중(群衆)에게 말하였다.

  ꡒ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오. 나도 약간의 명성이 있고, 높은 벼슬도 얻을 수 있었으나, 그것이 헛되고 거짓됨을 알고서 원치를   않은 것이오. 천주교만이 진리요. 그래서 내가 천주교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당신들 모두 그것을 잘 생각하고 내 본을 따르시오.ꡓ

    그리고는 그의 복된 불사(不死)를 보증(保證)하여 주는 칼을 머리 숙여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26세 밖에 되지 않았다.

⑬ 서울에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법(法)과 관습(慣習) 에 의하면,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그들의 지위를 잃어야만 했고, 또 이렇게 위태롭게 된 사람의 수효가 나라의 가장 높은 벼슬아치들 중에까지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죽은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집안은 거의 만능(萬能)이었기 때문에, ꡐ각자의 행동은 개인적인 것이므로 부모 친척은 거의 필요가 없다ꡑ는 이 원칙(原則)을  이번에는 승인(承認)하게 할 수가 있었고, 그로써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의 친척(親戚)들은 모두가 그들의 지위(地位)를 보존(保存)할 수가 있었다.

    이 죽음이 김씨(金氏)집안 문중(門中)의 종가(宗家)를 더럽히는 치욕(恥辱)의 오점(汚點)을, 할 수 있는 대로 없애기 위하여, 그의 집안에서는 김건순(金健淳)요사팟의 파양(罷養)을 정부에 청원(請願)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거기에 동의(同

   意)하였고, 결국 다른 사람이 갈음하여 정식으로 종가(宗家)의 후손(後孫)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