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신유박해-7(주문모신부의 순교-3)

손드러 2010. 1. 18. 22:59
 

⑨ 왕족부인(王族婦人)들의 사형언도(死刑言渡)는 그 여파로, 그 아들이 역적모의를(逆賊謀議)했다는 구실로 이미 강화(江華)에 유배(流配)된 송(宋) 마리아의 남편인 왕족(王族) 이인(李인)의 사형선고(死刑宣告)를 초래하였다. 그의 적(敵)들은 왕족부인(王族婦人)들이 신부(神父)와 연락(連絡)을 한 것은, 국가(國家)의 안전(安全)을 해치는 어떤 끔찍한 음모(陰謀)를 꾸미는 것 외에 다른 목적(目的)이 있을 수 없으며, 왕족(王族) 이인(李인) 이 의심 없이 그 음모(陰謀)의 비밀한 주동자(主動者)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가증(可憎)스러운 무함(誣陷)을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에게 제출한 상소문(上疏文)에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內容)은 아래와 같다.


 『역적(逆賊) 인의 처(妻)와 역적(逆賊) 심의 처(妻)는 궁중(宮中) 그윽한 곳에 들어 앉아 악한 종자와 상종(相從)하였습니다. 우선 여러 비루한 여종(女從)들을 통하여 길을 마련한 다음, 매일 밤 왕래(往來)를 하였으며, 죄인(罪人)들과 긴밀한 연락(連絡)을 취하였고, 다음에는 법을 피하여 다니는 자들을 감추고 숨겨, 그들의 거처(居處)를 역적(逆賊)들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의도(意圖)와 비밀한 계획(計劃)은 마침내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極惡無道)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두 여자(女子)만의 일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흉측한 음모(陰謀)의 주동자(主動者)는 분명히 이인(李인) 자신입니다. 인의 처(妻)와 심의 처(妻)를 사형(死刑)하라시는 명령(命令)은 아무 의심할 바 없이 근본원리(根本原理)를 튼튼히 하고, 악인(惡人)들의 음모(陰謀)를 꺾기를 원하시는 성덕(聖德)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을 단 일각(一刻)이라도 천지간에 용납(容納)하여 두면, 역적(逆賊)들의 형편(形便)은 이전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에게도 사약(死藥)을 내리시어 그를 죽게 하시기를 삼가 청합니다.』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는 무함(誣陷)당한 이 불행한 왕족(王族)을 변호(辯護)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얼마 안 있어, 이인(李인)은 비록 선왕(先王)의 동생이면서 천주교(天主敎)를 신봉(信奉)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정(朝廷)에서 공식(公式)으로 내린 독약(毒藥)을 받아 손수 마셔야만 했다.



⑩ 이제 다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재판(裁判)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대신(大臣)들이 최후적(最後的)인 결정(決定)을 내리기 전에, 그에 관하여 여러 번 회의(會議)를 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중국(中國)으로 돌려보내어, 「두 나라 중 한 나라의 어떤 신민이든지 상대방 국토에서 발견되면, 자기 나라 군주에게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국제조약(國際條約)대로, 황제(皇帝)의 손에 넘기기를 주장(主張)하였다.

     이러한 공식(公式) 조문(條文)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그들이 미친 듯이 박해(迫害)하던 종교(宗敎)의 두목을, 벌하지 않고 버려 들 결심을 할 수가 없어, 사형(死刑)에 처할 것을 주장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의 동의(同意)를 얻었다.  대왕대비(大王大妃) 김씨(金氏)가 작성하게 한 결안(結案)의 내용(內容)은 다음과 같다.


   『4월 19일, 흉측한 외국 종자 죄인(罪人) 주문모(周文謨)의 사건(事件).

   자칭 종교(宗敎)의 스승이요 신부(神父)라고 한다. 그는 그의 그림자와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감추며 많은 남녀(男女)의 무리를 기습하고 속여 영세(領洗)를 주는 규칙(規則)을 세워 놓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는 7, 8년 동안 백성(百姓)의 정신(精神)을 그른 길로 이끌었으며, 끊임없이 불어나는 홍수(洪水)와도 같이 그의 도리(道理)는 퍼져서 불안(不安)을 자아내는 재난(災難)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은 반드시 야만(野蠻)과 짐승들의 처지보다도 훨씬 못한 처지(處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 좋게도 하늘이 그를 추격(追擊)하는 일을 맡자 죄인(罪人)은 오늘 자수(自首)하고야 말았다.

   몇 년 전에 포졸(捕卒)들의 손을 벗어나  그는 그때 이후로 그 주위와 멀리까지 그의 거짓된 도리(道理)를 계속 전파(傳播)하였다. 이제 그가 옥(獄)에 갇혔으니 서울과 지방의 백성(百姓)은 쉽게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그의 신분(身分)을 살펴보면, 그는 낮고 경멸(輕蔑)할 집안의 소생이며, 그의 행실(行實)은 바로 교활(狡猾)하고 간사한 자의 행실이다. 그를 처벌(處罰)하는 데에는 군법(軍法)을 적용(適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를 군사법정(軍事法廷)으로 압송(押送)하여 관례(慣例)의 절차를 밟아 처형(處刑)하고, 그의 처형이 민중(民衆)에게 영향(影響)을 줄 수 있도록 하라!  어영청(御營廳) 대장(大將)에게 그 집행(執行)을 명하노라! 이것이 나의 의향(意向)이다.』


⑪ 무슨 이유(理由)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영청(御營廳) 대장(大將)은 그 같은 사     명(使命)을 맡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병이 들어나갈 수없다는 핑계를 대서, 다른 대장(大將)이 그 대신 임명(任命)되었다. 옥(獄)에서 나올 때에 신부(神父)는, 이런 경우에 늘 하는 관습(慣習)에 따라, 다리에 매를 맞았다. 그런 다음 시내에서 10 리 되는 곳에 있는「노들」 혹은「새남터」라고 불리우는 군(軍)의 사형 집행(死刑執行) 장소로 기꺼이 끌려갔다.

   들것에 실려 가며 그는 둘러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장터를 지나가면서, 구경꾼들의 무리를 조용히 둘러본 다음, 목이 마르다고 술을 청하였다. 군졸(軍卒)들이 술 한 잔을 주니 그것을 다 마셨다.

    그가 처형장(處刑場)에 도착하자, 그의 양쪽 귀에 화살을 꽂고, 그의 재판기록(裁判記錄) 발췌와 결안(結案)을 보여주어, 그 여러 가지 문서(文書)를 읽을 수  있게 하였다. 비록 그 글이 매우 길었으나 신부는 그것을 아주 침착하게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소리를 높여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하여 말하였다.

  ꡒ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 10년 후에 당신네 나라는 커다란 불행을 당할 것인데, 그 때에 내 생각을 하게 될 것이오.ꡓ

  관례(慣例)에 따라, 신부(神父)를 모여 있는 사람들 둘레로 세 바퀴 조리를 돌린 다음, 대장(大將)이 필요한 방향전환(方向轉換)을 명하였으므로, 그는 무릎을 꿇은 다음 합장(合掌)을 하고서 기쁘게 머리를 숙이니, 그 머리는 곧 칼 아래 떨어졌다. 때는 4월 19일(1801년 5월 31일), 성삼주일(聖三主日) 신시(申時)라고 부르는 시각, 즉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였다. 그때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나이는 32세였다

    오랜 시간 사형(死刑)을 준비하는 동안 그 전까지는 맑고 청명(淸明)하던 하늘이 갑자기 두터운 구름으로 덮이고, 형장(刑場)위에 무서운 선풍(旋風)이 일어났다. 맹렬한 바람과, 거듭 울리는 천둥소리와, 억수로 퍼붓는 흙 섞인 비와, 캄캄한 하늘을 사방(四方)에서 갈라놓는 번개 따위가, 모두 이 피비린내 나는 광경(光景)을 만든 자들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거룩한 순교자(殉敎者)의 영혼(靈魂)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마자 무지개가 서며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暴風雨)도 곧 가라앉았다. 태양(太陽)이 망나니들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하여, 얼굴을 가렸다가 그들의 희생자(犧牲者)의 승리(勝利)를 축하(祝賀)하기위하여 그 찬란(燦爛)한 모습을 완전히 다시 드러내는 것 같았다.

   구경하던 외교인(外敎人)들과 천주교인(天主敎人)들이 이 너무나 이상한 우연(偶然)의 일치(一致)에서 선교사(宣敎師)의 성덕(聖德)의 증거(證據)를 보았다.

  ꡒ이렇게 무서운 표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하늘도 이 처형자의 운명에 무관심 하지 않구나!ꡓ

   하고 외교인(外敎人)들은 크게 놀라 말하였다.


⑫ 순교자(殉敎者)의 머리는 매달려 있었고, 그의 시신(屍身)은 처형장(處刑場)에 다섯 날과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놓아두었었다. 그동안 사람들이 그리로 가까이 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고,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허가(許可)를 받지 못하였다. 매일 밤 무지개가 또는 찬란(燦爛)한 빛이 그 시신(屍身) 위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한 사실(事實)은 여하 간에, 그때에 이상한 현상(現像)이 일어나 많은 외교인(外敎人)들이 크게 감명(感銘)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確實)하며, 이러한 사실(事實)은 당시의 여러 수기(手記)에 기록(記錄)된 천주교인(天主敎人)들과 외교인(外敎人)들의 일치(一致)된 구전(口傳)이다. 또한 여러 교우(敎友)들이 오늘날까지도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

   마침내 어영대장(御營大將)은 시신(屍身)을 묻으라고 명하고, 그것을 전과 같이 계속 지키게 했다. 교우(敎友)들은 순교자(殉敎者)의 유해(遺骸)를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생각으로 자리를 잘 보아 두었었다. 그러나 파수꾼들은 계속하여 지키기가 귀찮아, 몰래 다른 곳으로 옮겨 묻었다. 그 후 교우(敎友)들이 백방(百方)으로 찾아보았으나, 조선(朝鮮)의 맨 처음 선교사(宣敎師)의 보배로운 유해(遺骸)가 묻혀있는 자리를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다.


⑬ 주문모(周文謨)(야고보) 신부(神父)의 기억(記憶)은 조선교우(朝鮮敎友)들의 마음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바, 이들은 그의 열성(熱性), 슬기, 극기(克己)의 생활, 업적(業績) 및 죽음에 대하여 깊은 경의(敬意)를 갖고서 말한다.

   북경주교(北京主敎)는 그를 보내면서 자기의 가장 훌륭한 인물(人物)을 잃는다고 말하였었는데, 과연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는 훌륭한 재질(才質)과 박학(博學)한 한문지식(漢文知識)과 아울러 비범(非凡)한 종교지식(宗敎知識)과 덕행(德行)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에서나 또 언제나 이 나라 천주교(天主敎)의 자랑이 되었다. 그의  점잖은 외모(外貌), 고상한 태도(態度) 및 크나큰 친절(親切)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끌었었다. 처음 여러 해 동안은 완전히 은거(隱居)해야만 했고, 마지막에는 극히 조심스럽게 자기의 모든 행동(行動)을 숨겨야만 했던 그는, 하느님 앞에 수많은 공로(功勞)를 세울 기회(機會)를 가졌었고, 자기의 충성(忠誠)으로 순교(洵敎)의 은총(恩寵)을 받을 기회(機會)를 얻었다.

 

⑭ 교우(敎友)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죽을 때, 30년 뒤에는 조선(朝鮮)에 신부(神父)들이 다시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豫言)하였다 한다. 과연 교우(敎友)들은 32년을 기다린 뒤에야 새 선교사(宣敎師)들을 맞아들였다.

   한문(漢文)으로 쓰고 조선(朝鮮)말로 번역된 책이 하나 나와 있는데, 그것을 늘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쓴 것이라고 하였고, 또 사실(事實)로 그가 쓴것 같다. 그 책은「사순절과 부활시기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인데, 거기에는 고백(告白)과 성체성사(聖體聖事)를 받을 때 지녀야 하는 마음의 준비자세(準備姿勢)가 분명(分明)하고도 간결(簡潔)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조선교우(朝鮮敎友)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⑮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의 옷과 갓과 또 그가 지녔던 상본(像本) 두 장이 신입교우(新入敎友)들에 의하여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간직되어 있었다. 신대보(申大甫) 베드로는 그의 수기(手記)에서, 이 유물(遺物)들이 여러 번 기적적(奇蹟的)으로 화재(火災)를 모면하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지난번 박해(迫害)로 인하여 그 유물(遺物)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중국(中國)과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조선정부(朝鮮政府)는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를 처형(處刑)할 때에 그가 제주(濟州) 태생이라는 소문(所聞)을 퍼뜨렸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마는, 그 뒤 황제(皇帝)에게 조선왕(朝鮮王)의 이름으로 보내 편지(便紙)에, 그가 중국인(中國人)이었다는 것을 자백(自白)하고, 그의 출생지(出生地)가 그가 죽은 후 공범자(共犯者)들의 뒤따른 고백(告白)으로 비로소 알려졌다고 주장(主張)하였다. 이 자백(自白)과 더불어, 황제(皇帝)의 분노(忿怒)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많은 은(銀)을 보내기를 잊지 않았는데, 사건(事件)은 그것으로 완전히 매듭이 지어졌다.


                            (이상 상권 456쪽 까지 (원저서로는 제 2권까지)의 내용)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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