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첫 세례자 이승훈과 이벽, 권철신의 활약

손드러 2010. 1. 18. 22:36
 

<첫 세례자 이승훈과 이벽, 권철신의 활약 ①>   


2) 첫 세례자 이승훈(李承薰(베드로)과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활약



① 이승훈(李承薰)은 평창(平昌) 李氏의 양반집에서 丙子(1756)년에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문관(文官)으로 요직(要職)을 많이 지냈고, 그의 집은 높은 평판(評判)을 누리고 있었다. 10세 때부터 그의 조숙(早熟)한 능력(能力)이 드러났고, 20세 때에는 선비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자기 나라 성현(聖賢)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여 덕행(德行)으로 가장 이름난 인물들과 교제(交際)를 하였으며, 문학(文學)과 과학(科學)을 완성하는 것만큼 품행(品行)을 조절하는 데에도 힘썼다. 庚子(1780)년 24세 때 진사(進士)를 하였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다.


② 천진암(天眞菴) 강학회(講學會)를 통하여 맺어진 한국 초대 교회의 선구자(李檗, 權哲辛, 李承薰) 중에서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벽(李檗)은  이승훈(李承薰)이 사절단(使節團)의 일원인 아버지를 따라 北京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즉시 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다고 문헌(文獻)은 전한다.

  ꡒ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으로 참된 교리(敎理)를 알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주시는 훌륭한 기회일세. 참 성인(聖人)들의 교리(敎理)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天主)를 공경(恭敬)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서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그 도리(道理)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本 分)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이 없으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規則)도 없네. 그것이 아니면 천지창조(天地創造)며 남북극(南北極)의 원리며, 천체(天體)의 규칙적 운행(運行)을 우리는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天使)와 악신(惡神)들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始作)과 종말(終末)이며, 영혼(靈魂)과 육신(肉身)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성자(天主聖子)의 강생(降生)이며, 선인(善人)은 천당(天堂)에서 상(賞)을 받고 악인(惡人)은 지옥(地獄)에서 벌(閥)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네.ꡓ


③ 종교서적을 아직 모르고 있던 이승훈(李承薰)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감탄하면서, 그 책을  몇 권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벽(梨檗)이 가지고 있던 책들을 대강 읽어보고 나서 기쁨이 넘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벽(이檗)은 대답하였다.

  ꡒ자네가 북경에 가게 된 것은  천주께서 우리나라를 불상히 여기사 구원코자 하시는 표적일세. 북경에 가거든 즉시 천주당을 찾아가서 서양인 학자들과 상의하며, 모든 것을 물어보고, 그들과 교리를 깊이 파고들어, 그 종교의 모든 예배행위를 자세히 알아보고, 필요한 서적들을 가져오게.  삶과 죽음의 큰 문제와 영원의 큰 문제가 자네의 손에 달려 있으니, 가서 무엇보다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게.ꡓ    

   이벽(李檗)의 이 말은 학문(學問)의 갈증(渴症)보다도 종교(宗敎)의 갈증이 그에게 더욱 절실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마음을 준비한 것이니, 그에게는 구령대사(救靈大事)가 점점 더 유일한 중대사(重大事)로 되어 갔던 것이다.

   이벽(梨檗)의 이 말은 이승훈(李承薰)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그것을 스승의 말처럼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공통된 소원(所願)의 실현(實現)을 위하여 모든 노력(努力)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約束)하였다.


④ 이승훈(李承薰)은 드디어 1783년 말 경에 북경(北京)을 향하여 떠났다. 그는 북경에 도착하여 북당성당(北堂聖堂)을 찾아가 탕(湯) 알렉산델 주교를 방문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 탕(湯) 주교는 곧 유명한 알레산델 데 고베아 주교였다. 포르투갈인이요 성프란치스꼬 수도회원으로서, 매우 박학(博學)하고 중국천주교회(中國天主敎會)가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주교 중의 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는 중국천주교인들로 하여금 의식(儀式)에 관한 교황성좌(敎皇聖座)의 교서(敎書)를 충실히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가장 많이 노력한 이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조선기록에 의하면, 이승훈(李承薰)은  북경에서 나이가 90여세나 되지만 근력이 좋아 외양(外樣)이 지극히 인자한 서양사람 색덕초(索德超)를 마났고, 또 양(梁)이라는 젊은 사람도 만나보았다고 한다. 북경시내(北京市內)의 네 군데 성당(聖堂)에는 약 60 여명의 사람이 있었다.

  

⑤ 이승훈(李承薰)은 열심히 천주교교리(天主敎敎理)를 배우기 시작하여 미구에 성세(聖洗)를 받을 준비 가 다 되었다. 귀국길에 오르기 전에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받았는데, 그가 조선천주교회(朝鮮天主敎會)의 주춧돌이 되리라는 희망으로 베드로란 세례명(洗禮名)을 받았다. 그때 북경에 있던 선교사 방따봉(de Vantavon)神父가 1784년 11월 25일자로 서양의 자기 친구에게 이 기쁜 사실을  적어 보냈다.

   甲辰(1784)년 봄에 李(承薰) 베드로는, 북경에서 얻은 많은 서적(書籍)과 십자가상(十字架像)과 상본(像本)과 몇 가지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에게 제일 급한 것은 이벽(李檗)에게 자기 보물(寶物)의 일부를 보내는 것이었

다. 이벽(李檗)은 그동안 날을 세어가며 사신(使臣)들의 귀국(歸國)을 몹시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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