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드러 2010. 1. 18. 18:11
 

                                         제  2  장


                     을해박해(乙亥迫害)(1815년)


                1815년의 박해 - 대구(大邱)와 원주(原州)의 순교자


1. 박해(迫害)는 다시 시작되고(노래산(老萊山)의 박해)


① 조선에는 흉년(凶年)이 꽤 자주 드는데, 이 나라는 쇄국(鎖國)이라는 오랜 전통(傳統)

    을 고집하고 있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거의 아무런 교역(交易)도 하지를 않고, 따라서

    외부(外部)의 구원(救援)을 도무지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흉년(凶年)이 들면

    죽는 사람이 많으며, 특히 외교인(外敎人) 중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다.

       특히ꡒ외교인 중에는ꡓ이란 말을 쓴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保護)로 그런지, 혹

    은 신자(信者)들 사이의 박애(博愛)의 정신이 돈독(敦篤)하여서 그런 것인지, 어떻든

    모든 점을 고려(考慮)해 볼 때, 신자 중에 기아(饑餓)로 죽는 이는, 우상(偶像)을 숭배

    (崇拜)하는 동족들보다 그 수가 훨씬 적다는 것은 밝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1814년의 추수는 거의 완전히 허사(虛事)로 돌아가, 일찍이 사람이 겪

    은 기억(記憶)이 없을 만큼 무서운 기근(饑饉)이 전국을 엄습(掩襲)하였다. 추수하였던

    얼마 안 되는 곡식(穀食)은 겨울동안에 이미 소비되었고, 봄이 오자 나라 안 전체(全體)

    가 참혹(慘酷)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또한 곤궁(困窮)으

    로 인하여 막연히 길을 나섰던 많은 사람들도 도중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② 이와 같은 불행(不幸)을 당하는 중에, 전지수(* 전지순,전지순)라는 흉악(凶惡)한 배신자

    (背信者)는 교우(敎友)들의 등을 쳐 먹을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慶尙道)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돈과 옷가지와 양식을 구걸하였다. 교우(敎友)들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동냥을 주었으며, 또 그들의 곤궁(困窮)한 처지(處地)에 비해서,

    아마도 많은 동냥을 주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진 것들이 모두 바닥이 드러나 애긍(哀矜)이 줄어드니, 전지수

    는 구걸로 받는 것에서 별로 만족(滿足)을 느끼지 못하여, 교우들을 밀고(密告)할 생각

    을 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복수(復讐)도 되고, 한편으로는 저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약탈(掠奪)하여, 저들의 그 오죽잖은 재물(財物)을 거침없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

    도록 하자는 심보에서였다.

       기근(饑饉)이 들면 못된 본능(本能)이 더욱 힘차게 발동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벌을 받지 않고도 꽤 많은 노략질을 할 수 있다는 미끼로 탐욕(貪慾)이

    움직일 포고(捕校)들의 지지를 받으리라는 것을 미리부터 확신(確信)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가 밀고(密告)를 하러가니, 관장(官長)과 그 부하(部下)들은 아주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우들이 큰 축일(祝日)은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 풍습(風習)

    을 다들 알고 있었는지라, 첫 번 거사(擧事)를 부활주일(復活主日)에 기습적(奇襲的)으

    로 하기로 결정하니, 그해는 부활축일(復活祝日)이 2월 22일이었다.


③ 이 날이 되어 교우들이 함께 모여 큰 소리로 경문(經文)을 합송하고 있을 때, 배신자(背

    信者)를 앞장세운 한 떼의 포졸(捕卒)이 청송(靑松)고을 노래산(老來山) 마을을 별안간

    습격(襲擊)하였다. 박해(迫害)를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교우들은 너무나도

    의외여서, 처음에는 도둑들이 쳐들어 온 줄로 알고,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센 고성운(高

    聖云)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對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관

    헌(官憲)이 파견한 포졸(捕卒)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곧 모든 저항(抵抗)을 그치고

    고성운(高聖云) 요셉조차도 어린양같이 양순(良順)하여져서 맨 먼저 포승(捕繩)을 받

    았다.

       이번 출동으로 많은 신자가 붙들려 청송(靑松)의 상부관청(上部官廳)인 경주진영(慶

    州鎭營)으로 압송되었다. 며칠 후에 다른 포졸(포졸)들이 진보(眞寶)고을 머루산(지금의

     영양군(英陽郡) 석포면(石浦面) 포산동(葡山洞)에 해당)마을을 불의에 습격하여 많은 신자를

    잡아 안동진영(安東鎭營)으로 압송하였다.


④ 이 슬픈 소식(消息)은 오래지 않아 사방으로 퍼져나가, 신자들은 다시 공포(恐怖)에 떨

    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는 의례히 그러했듯이, 어떤 교우들은 탈출(脫出)하

    여 다른 도(道)로 피신(避身)을 하였고, 그렇게 할 능력(能力)이 없는 신자들은 마을에

    그냥 처져, 끊임없는 불안(不安)속에서 붙잡힐 때를 기다리며, 낮에는 숲속이나 산중에

    서지내다가 밤이 되면 몰래 마을로 내려와, 음식을 조금 준비해가지고는 이내 맹수(猛

    獸)들이 우글거리는 숲 속으로 다시 찾아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맹수(猛獸)들이 오히려

    포졸(捕卒)들 보다는 덜 무섭게 보였던 것이다. 사방에서 교우(敎友)들이 많이 붙들려

    옥마다 교우(敎友)들로 이내 꽉 차고 말았다.


⑤ 경주(慶州)에서는 고문(拷問)과 굶주림으로 인하여 많은 신입교우들이 배교(背敎)를

    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곧 석방(釋放)되었다. 그러니 이들의 동료(同僚)중에는 좀더 용

    기(勇氣)를 보여주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용감(勇敢)하게 증거(證據)하였다.

       전하여지는 바에 의하면, 저들 중에 7명은 굶주림으로 쓰러졌든지, 고문(拷問)으로

    죽었든지, 어떻든 상급관청으로 이송(移送)되기 전 3월에 옥사(獄死)하였다고 하는바,

    그들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박춘청(* 비망기에는 박춘성으로 나옴)의 아버지 박(朴)바오로와, 박(朴)바오로의 사촌

    (四寸) 박(朴)관서인데 이분은 홀아비였는데, 새로 교(敎)에 들어와 박해(迫害)가 일어

    나자 비로소 영세하였다. 다음은 박(朴)바오로의 외삼촌(外三寸)인 고산(高山) 김 서방

    인데, 고산에서 왔다하여 이렇게 불리었다. 여기에 경상도(慶尙道) 사람 김사일, 그리

    고 나머지 세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경상도(慶尙道)의 이 외딴 지방에서 그때 일어난 일을 목격(目擊)한 증인(證

    人)도 없고, 이에 대한 기록(記錄)도 없는 만큼, 적극적으로 확언(確言)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⑥ 신앙(信仰)을 끝까지 증거(證據)하며, 주림과 고문(拷問)에도 쓰러지지 아니한 신자(信

    者)들은 오래지 않아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이 있는 대구(大邱)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와 그의 아내 최성열(崔性悅) 발바라, 또 그의 사위

    최「여옥」(봉한(奉漢)) 프란치스꼬, 김시우(金時佑) 알렉스, 고성대(高聖大) 베드로와

    그의 아우 고성운(高聖云) 요셉, 그리고 김 아가다 ․ 막달레나이다. 이제 이들 각 사람

    에 대하여 몇 마디씩 적기로 하자.

   (* 경주(慶州)와 안동(安東) 진영(鎭營)에 갇혀 있던 신자 촌 71명 중 20명은 배교하고 즉시 석방되었

     다. 이중 배교하였으나 판결을 못 받은 16명과 병으로 아직 취초(取招)를 못 받은 여교우(女敎友) 2명

     을 뺀 나머지 33명은 대구의 감영(監營)으로 이송(移送)되었다. 여기에는 청송(靑松)에서 붙잡힌 신

     자가 14명, 진보(眞寶)에서 붙잡힌 신자가 13명, 영양(英陽)에서 붙잡힌 신자가 6명 등 도합 33명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