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전통인형으로 빚은 한국 교회사

손드러 2010. 1. 6. 09:11
<12. 최양업 신부의 선교>
작품배경

최양업(1821-1861) 신부가 산골 우물가 무궁화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천주가사 중 사향가를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물동이에 물을 기르러 온 여인, 하루종일 일하다가 우물가에 잠깐 쉬러 온 농부 부부, 친손녀는 거닐고 외손주는 업고 바람쐬러 나온 할머니, 모두 최양업 신부의 전교 대상이다. 최양업 신부는 중치막 차림에 갓망건으로 술띠를 띠고 있다. 무릎 아래는 행전차림이다. 때는 늦은 여름,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했던 것처럼 최양업 신부도 어느 교우촌의 우물가에서 물을 청해 마셨다. 우물가에는 무궁화가 있다. 그 꽃 다섯 송이는 성모마리아에게 드릴 무궁화 화관이다. 무궁화나무의 뿌리로 하느님을, 무궁화 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자 했다. 무궁화 잎 103개는 한국의 순교 성인 103위를 나타낸다. 할머니가 업은 아기는 한국의 아기 예수이다. 농부 부부는 한국의 성모와 요셉, 나무꾼은 목자의 인도를 기다리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최양업의 세례명은 도마였다. 그는 충청도 청양 출신으로 아버지 최경환과 어머니 이성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이미 교회 초기에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으므로 그는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최경환과 이성례는 신앙생활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서 서울로 다시 과천, 시흥으로 옮겨다니며 살던 중 1893년 기해박해를 만나 순교했다. 최경환은 1984년 시성되었다. 최양업은 1836년 서울에서 전교하던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뽑히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유학차 마카오를 향해 떠났다. 최양업이 15세때였다. 만주, 내몽고, 중국을 거쳐 8개월만에 마카오에 도착 그곳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후 그는 전후 4차례에 걸쳐서 귀국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양업은 28세 때였던 1849년 4월 상해에서 강남 교구 마레쓰까 주교의 집전으로 신품성사를 받아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849년 12월 의주의 변문을 통하여 입국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가기 힘든 지역만을 골라 다니면서 산골에서 숨어살던 신자들을 지도했다. 그는 사제생활 12년만에 충청도 진천에서 여독으로 40세의 장년으로 1861년 병사했다. 최향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 다음으로 한국의 두 번째 신부였다. 그는 박해 사실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했고, 교리서를 번역하여 신자들에게 보급했다. 그는 사향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지어서 가사문학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했다 그는 직접 피를 흘려 순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땀을 흘려서 하느님을 증거한 사람이다. 오늘날 청주교구에서는 그의 성덕을 기려서 복자품에 올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
출처 : 하늘 향한 그리움
글쓴이 : 손드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