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조선교구의 설정

손드러 2010. 1. 6. 09:03

조선교구의 설정

 

 1) 설정 과정
   당시 조선은 교황청 포교성(布敎省, 지금의 인류복음화성)의 감독과 후원을 받는 포교지(布敎地)로, 1792년 이래 북경 주교 개인에게 그 지도가 위임되어 있었다. 따라서 구베아 주교가 사망한 뒤에는 그 위임권이 소멸되었지만, 후임자인 수자 사라이바 주교는 교황청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때까지 조선 신자들을 돕기로 결심하였다. 또 그의 총대리 리베이로눈 신부도 1826년에는 조선의 젊은이를 중국으로 데려와 사제로 양성하거나 새로 선교사를 선발하여 조선에 보내고자 하였다. 바로 이 해에 리베이로 신부는 사망하였고, 조선 포교지 문제는 북경에 거주하던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 Pir곩s-Perei ra,  畢學源) 주교가 맡게 되었다.

앞서 1821년에 포교성 장관 루이지 폰타나(F. Luigi Fontana) 추기경은 나폴리 성가정신학교(聖家庭神學校)에 입학한 4명의 중국 신학생들로부터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는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다시 한 번 전해받게 되었다. 이에 포교성에서는 1822년에 다시 한 번 사라이바 북경 주교에게 조선 선교를 요청하였고, 1824년에는 남경을 통해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페레이라 주교는 선임자들처럼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를 위한 항구적인 대책도 마련하려고 한 것 같지 않다. 

아마도 그 이유는 포르투갈의 보호권(保護權) 교구인 북경교구에 위임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는 조선 포교지를 다른 선교 단체에 위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북경에는 프랑스 라자리스트회 선교사들이 북당에, 포교성에서 파견한 이탈리아 선교사들이 서당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남당과 동당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호권을 내세운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직예(直隸)와 산동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이탈리아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여기에 반발하여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처럼 보호권 아래에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조선 교회를 맡긴다는 것은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마카오 주재 포교성 경리부의 대표인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 신자들의 1824년 말 서한을 교황청에 보내면서 1827년 2월 7일자로 작성한 자신의 의견서를 첨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우선 포르투갈 사람들로서는 조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산서(山西) 신학교나 나폴리의 성가정신학교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는 방법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의견도 제시하였다.

조선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것을 맡아볼 수도 단체입니다. 조선을 중국인 사제에게 맡긴다면 결국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또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예수회 회원들이 조선을 맡으려 한다면, 처음에는 사천교구장(四川敎區長)이나 마카오의 경리부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회 회원을 대목(代牧)으로 임명할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7〉

〈7〉당시 사천교구는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예수회는 1814년에 부활된 이래 다시 해외 선교 활동을 시작한 상태였다.

1827년에 이 서한을 받게 된 포교성 장관은 카펠라리(Cappellari) 추기경은 조선 포교지의 독립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였다. 이때 포교성 회의에서는 움피에레스 신부의 권고를 감안하여 이 포교지의 사목을 것로마 예수회겄나 것파리 외방전교회겄(Soci곩t곩 des Missions 곉trang골res de Paris, M. E. P)〈8〉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8〉것파리 외방전교회겄는 팔뤼(F. Pallu) 신부가 극동 지방에 선교사를 파견할 목적 으로 1658년 파리에서 설립한 해외 전교회로, 교구사제들을 선교사로 양성하기 위해 파리의 뒤박(du Bac)거리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 이 전교회는 1664년에 교황 알렉산델 7세로에 위임하기로 결정하였다.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1659년부터는 포교성의 위임 아래 샴(지금의 태국), 통킹(지금의 북부 베트남), 코칭 차이나(지금의 남부 베트남) 등지로 진출하였다. 이들의 인도지나 진출은 곧 교황청에서 보호권에 개입하는 기원이 되었다.

 그런 다음 1827년 9월 1일자로 예수회 신학교 총장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랑글로와(Langlois)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의중을 타진하였으나, 예수회에서는 선교사의 부족을 이유로 거절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지도자들은 전교회의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저하였다. 동시에 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의 실상을 좀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이를 동양 선교사들에게 문의하는 한편 조선 포교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전교회에는 현재 기금이 없다.
둘째, 해외에 파견할 선교사가 부족하다.
셋째, 다른 포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
넷째, 조선 포교지로 선교사가 들어가기 어렵다.
다섯째,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바로 그 무렵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 샴(지금의 태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뤼기애르(B. Brugui골re, 蘇) 신부는 조선 포교지의 상황이 매우 어렵고, 그 곳 신자들이 선교사의 요청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파리 본부로부터 조선 포교지에 대해 묻는 서한을 받게 되자 1829년 5월 19일자의 서한을 통해 먼저 전교회 본부에서 내세운 다섯 가지 이유들을 반박하고, 가능한 한 빨리 지원자를 선발하여 조선으로 파견하되 지원자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포교성에서는 보다 진진하게 조선교구의 설정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2) 교구 설정

  앞서 샴의 교구장 플로랑(Florent) 주교는 1828년 2월 5일자의 교황 소칙서에 따라 브뤼기애르 신부를 갑사(Capsa) 명의의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으나, 본인은 이를 고사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브뤼기애르 신부는 조선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면서 주교 임명을 수락하고, 1829년 6월 29일 방콕에서 갑사 주교 명의로 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그 직전인 1829년 6월 20일에는 플로랑 주교 또한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서한을 포교성으로 보냈으며, 브뤼기애르 주교 자신도 1829년과 1830년에 거듭 포교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을 얻어 주도록 간청하였다.

 

* 보완 : 이때 브뤼기애르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그 내용을 토대로 포교성에 교황의 허락을 얻어 주도록 요청한 것인데, 바로 이것이 주효하였다.
  포교성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브뤼기애르 주교의 의견을 수락하고, 1931년 7월의 추기경 회의에서 조선 포교지를 대목구(代牧區)〈9〉
 
 〈9〉것대목구겄(Vicariatus Apostolicus)란 교황대리감목구(敎皇代理監牧區)의 준말로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 적용되며,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 장상인 주교는 것대목겄(代牧) 또는 것대목구장겄으로 불리는데, 이미 없어진 교구의 명의 주교(名義主敎)로 성성된다. 이 대목은 정식 교구의 교구장과 같은 권한을 갖고 있고, 앞으로 정식 교구로 설정될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대목을 것교구장겄으로, 대목구를 것교구겄로 부른다. 한국 교회는 1962년 3월 10일에 비로소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었다.


 즉 교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그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자로 된 두 개의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조선교구의 설정과 브뤼기애르 주교의 초대 교구장 임명을 공표하였다. 이 교황은 곧 포교성 장관 카페랄리 추기경으로, 1931년 2월에 그레고리오 16세로 선출되었다.

이 교황 교서로서 조선 왕국을 지금 즉시 새 대목구(즉 교구)로 설정하는 바이며, 이 대목구에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대목구장(즉 교구장)을 세울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때 포교성 추기경 회의에서는 위와 같은 결정에 두 가지 단서를 붙였다. 첫째로 브뤼기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에야 조선 교회가 비로소 독립된 대목구로 설정된다는 것,
둘째로 브뤼기애르 주교의 조선 체류가 완전히 보장될 때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이후에도 계속 보호권을 주장하였고, 북경의 남당(南堂)에 거처하고 있던 북경교구의 임시 대리자인 피레스 페레이라 남경교구장은 브뤼기애르 주교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재치권(裁治權)을 고집하게 되었다.

  한편 브뤼기애르 주교는 그때 말레이 반도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페낭(Pennang, 彼南)을 거쳐 샴 교구의 싱가포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32년 7월 25일에서야 그는 자신이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로부터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브뤼기애르 주교는 페낭 신학교 출신인 왕(王) 요셉과 함께 1832년 9월 12일에 배를 타고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샴 교구의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또 이탈리아 나폴리 성가정신학교 출신으로 조선 선교를 희망하고 있던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10〉신부는 마카오에 도착한 뒤 포교성의 명령에 따라 브뤼기애르 주교를 보조하게 되었다.

 〈10〉유방제 신부의 중국 이름은 여항덕(余恒德)이었으며, 것유방제겄는 조선에서 사용 하던 이름이었다.
그는 1821년 나폴리 신학교에 입학한 4명의 중국인 신학생 중의 한 사람으로, 처음부터 조선 선교를 원하고 있었는데, 나폴리 신학교의 갈라톨라(A. Galatola) 학장은 1828년 8월 23일자로 포교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유방제 학생이 조선 선교를 희망해 왔지만, 서품을 받기 위해서는 아직 4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밝혔다. 그가 나폴리를 떠나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1831년 7월 31일이었다.

 1832년 10월 18일, 마카오에 도착한 브뤼기애르 주교는 경리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를 만난 뒤 21일에 교황 친서를 받았다. 그런 다음 12월 말에 사천(四川) 선교사 모방(Maubant, 羅) 신부 등 5명과 함께 그 곳을 출발하여 1833년 3월 1일에 복건(福建)에 도착하였으며, 3월 9일에는 조선 선교를 희망하는 모방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사천 교구장에게 그의 임지 변경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마카오 출발에 앞서 브뤼기애르 주교는 먼저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조선 교우들에게 서한을 전하도록 하였다. 1832년 윤 9월 26일(양력 11월 23일)자로 작성된 이 짧은 서한이 그의 첫 사목 서한이었다. 한문으로 작성된 이 서한에는,
첫째, 교황께서 중국인 사제 1명과 서양 주교인 자신을 조선으로 보낸 사실, 둘째, 북경 주교와 의논하여 빠른 시일 안에 자신을 입국시킬 방도를 찾으라는 당부,
셋째, 자신은 조선 신자들과 함께 살다가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었다.

그 무렵 브뤼기애르 주교는 1832년 11월 9일자로 포교성에 서한을 보내 다시 한 번 조선교구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도록 요청하였고, 포교성에서는 이에 따라 조선교구의 사목을 수락하도록 외방전교회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외방전교회에서도 1833년 8월 26일에는 마침내 이를 수락하고 그 사실을 브뤼기애르 주교에게 통보하였다. 이처럼 외방전교회에서 조선 포교의의 사목 수락을 오랫동안 미루어 온 이유는 포르투갈의 보호권을 꺼려한 때문이었다.

3) 브뤼기애르 주교의 활동과 선종

마카오에서 시작된 브뤼기애르 주교의 조선 입국 행로는 쉽지 않았다. 1805년 이래 계속되어 온 지방의 박해, 보호권을 유지하려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 열악한 여행 조건 등이 모두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대륙을 남에서 북으로 횡단하는 고난을 감수하였고, 1833년 10월 10일에는 이탈리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북서쪽의 산서성(山西省)으로 가서 그곳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동안 왕 요셉은 유방제 신부를 서부 달단(서만주지역)까지 인도한 다음 주교가 있는 곳과 북경을 오가며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경으로 가던 조선의 밀사들이 도중에 유방제 신부를 만나 조선으로 귀국한 터였으므로 왕 요셉은 그들과 만날 수 없었다. 당시 북경에 가던 밀사들은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었으며, 이들이 유방제 신부를 인도하여 의주 성문을 통과한 것은 1834년 1월 3일이었다. 한편 북경의 남당에서 페레이라 주교의 보호를 받고 있던 모방 신부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명을 받고 1834년 6월에 서부 달단으로 향하였고, 샴 교구에 있던 샤스탕 신부도 1833년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조선 국경까지 갔다가 산동성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유방제 신부는 당시 포교성 소속으로 마카오 포교성 경리부의 움피에레스 신부로부터 조선 선교를 위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북경 주교로부터 조선 선교에 필요한 직무와 전교 비용을 제공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브뤼기애르 주교가 아니라 북경 주교의 대리자인 페레이라 주교가 자신의 정당한 장상(長上)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사목에서는 서양인도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만이 적임자라고 주장하면서 브뤼기애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거나 지연시키려고 하였다.

1834년 8월 29일에 브뤼기애르 주교는 처음으로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보낸 1833년 10월 25일자(음력) 서한과 다른 서한 한 통을 받아볼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왕 요셉과 함께 산서 지방을 떠나 밀사의 통로인 봉황성 책문을 탐색한 뒤, 10월에는 서부 달단 즉 요녕성의 서만자(西灣子, 일명 Sivang)에 있던 라자리스트회 신학교로 거처를 옮겨 모방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또 왕 요셉은 1835년 1월에 북경으로 가서 조선의 밀사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등을 만나 브뤼기애를 주교의 서한과 전교 비용을 전하고, 남이관(南履灌, 세바스티아노) 등이 작성한 편지를 가지고 서만자로 돌아왔다. 이후로는 조선에 있던 유방제 신부도 브뤼기애르 주교의 입국 의지를 이해하고, 그의 안전한 입국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로써 브뤼기애르 주교의 조선 입국이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는 얼마 안되어 유진길.조신철.김방제(金方濟) 등이 1834년 12월 23일자와 이듬해 1월 18일자(음)로 보낸 서한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1835년 연말에 주교를 조선으로 맞이해 들이겠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바로 그 해에 주교는 서만자에 거하는 동안 몇 차례나 박해의 위험을 겪어야만 하였다.

 

]브뤼기애르 주교가 중국인 라자리스트 고 신부와 몇몇 보행군들을 데리고 책문으로 가기 위해 서만자 신학교를 떠난 것은 1835년 10월 7일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중국인 신자를 책문으로 보내 미리 거처를 마련해 놓도록 하였다. 주교 일행은 19일에 마가자(馬架子) 즉 펠리구(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의 한 교우촌에 도착하여 머물면서 남경 주교의 편지를 받고 요동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애르 주교가 그 동안의 과로로 인해 10월 20일(음력 8월 29일)에 갑자기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3세였다.

 

주교의 사망 소식은 곧 서만자에 있던 모방 신부에게 전해졌다. 이에 그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뒤를 잇기로 결심하고 즉시 마가자로 출발하였고, 11월 21일에는 주교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 그 시신을 인근의 신자들 묘역에 안장하고 묘비를 세웠다.〈11〉

 

〈11〉마가자에 안장되어 있던 브뤼기애르 주교의 유해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한 1931년에 발굴되어 서울의 용산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그런 다음 길을 재촉하여 조선의 밀사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1836년 1월 13일(음력 1835년 11월 25일)에는 마침내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로써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프랑스 선교사가 되었다.

 

이처럼 브뤼기애르 주교는 끝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함으로써 초대 교구장으로서의 사목을 실행에 옮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의지는 입국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니, 실제로 것그는 비록 키가 작은 편이고 몸은 약해 보였을지라도 의지와 독립심이 강한 데다가 극기 생활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 바탕이 있었다겄고 한다. 또 1829년에 그가 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을 보면, 포교지의 불우한 신자들을 생각하는 애덕(愛德)과 스스로 간직해 온 신덕(信德)·망덕(望德)이 잘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殉敎) 정신도 강하게 배어 있었다. 마카오에 도착한 1832년 10월부터 1835년 10월까지 3년 여 동안 갖은 고난과 위험을 극복하면서 조선을 향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신.망.애 삼덕과 순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선교열 덕택이었다.

 

 

 4) 교구 설정과 외방전교회 진출의 의미

브뤼기애르 주교는 사망하기 전에 조선교구를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이것이 훗날 큰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먼저 그는 1834년 9월 20일자로 포교성에 서한을 보내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요동 지역을 북경교구에서 분리하여 조선교구에 예속시키거나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북경교구에 속해 있던 요동 지역의 신자들이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고는 주교에게 숙소조차 제공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동 지역의 분리는 일찍이 구베아 주교가 조선 포교지의 관리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미 우려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1838년에 요동 대목구(훗날의 만주 대목구)로 설정되었으며, 1840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 베롤(E. Verolles) 주교가 초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다음으로 브뤼기애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 일본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견에 접한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도 포교성에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사들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할 경우 유구(琉球)로 가서 기회를 엿볼 수 있게 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1836년 4월 26일자로 유구 포교지를 조선교구장에게 위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교황청에서는 브뤼기애르 주교의 사망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세 번째로 브뤼기애르 주교는 서만자를 출발하기 이전에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모방 신부에게 조선 선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브뤼기애르 주교는 사망하였을지라도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에는 포교성이 조선교구 설정시에 붙였던 단서 조항들이 유효화되기 시작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목권이 분명해지게 되었다. 한편 파리 외방전교회의 랑글로와 신학교 교장은 1835년 7월 28일자로 사천 신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던 앵베르(Imbert, 范世亨) 신부를 브뤼기애르 주교의 후계자로 추천하였으며, 그는 1835년 12월 3일에 계승권을 가진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러므로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애르가 사망하는 즉시 제2대 조선교구장이 되었고, 그 또한 조선 입국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교구는 조선 교회 밀사들의 오랜 선교사 영입 노력, 교황청과 포교성의 조치, 브뤼기애르 주교의 자원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사목 수락 등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 탄생은,
첫째로 조선 포교지가 북경 주교, 즉 포르투갈의 보호권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로마 교회나 세계 교회와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둘째로 해외 선교 단체인 파리 외방전교회가 그 사목을 맡게 되면서 선교사 파견의 확실한 보장을 얻을 수 있었다.
셋째로 미구에 조선 신자들 중에서 방인(邦人) 성직자가 탄생하고, 정식 교구로 설정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첫 번째 창립 정신이 겁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하루 빨리 그 곳 교회를 현지인에게 넘겨 준다겂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진출에서 오는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동서 문화 교류상에서 본다면, 이 전교회가 순수한 선교 활동만을 고집하였던 탓에 예수회 회원들이 중국에서 했던 것처럼 서양의 문화를 동양에 이식하는 일은 등한시될 수 밖에 없었다. 동 전교회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창립 정신은 오직 신입 교우들의 사목에 전념하고, 외교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처음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혁명 이후 전교회가 해산과 부활을 겪는 와중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였으므로 일반적으로 지적(知的) 빈곤이 심하였다. 따라서 교회 창설을 전후하여 예수회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서학서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던 조선 교회의 신문화 운동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순교 정신과 교리 중심의 선교열은 조선 신자들이나 방인 성직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세 지향적인 종말론적(終末論的) 영성이 강조되면서 현실에 필요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은 내세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이 조선의 현실과 점점 멀어지게 된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음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교구 사제 출신이었기 때문에 조선교구 또한 교구 사제 중심의 교회가 되어 장차 수도회 활동과 수도자적 영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는 1815년에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법적 인정을 받은 이래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으며, 제국주의의 동점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 또한 선교사들의 극동 지역 진출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 결과 파리 외방전교회 또한 프랑스의 제국주의 정책과 전혀 무관할 수 없었으며, 실제로 그러한 관계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 보장이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다.
 
  
 
 
   
 
 
 

 

출처 : 하늘 향한 그리움
글쓴이 : 손드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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