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교구 설정의 배경
교구 설정의 배경 : 성직자 영입 운동의 재개
1) 새 밀사의 파견 신유박해를 겪고 난 뒤 한국 천주교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물론 새 지도층이 즉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박해로 신자들이 흩어지면서 어느 신자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자진해서 성직자 영입을 후원해 줄 만한 신자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교회 밀사를 자임한다는 것은 여전히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며, 일찍이 겪은 것처럼 북경 교회에서 성직자를 파견해 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1〉다블뤼 주교는 정약용(요한)도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온 힘을 기울여 이 성직자 영입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설명하였다(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곩e, Vol. 4, p. 219).
이때 이여진이 북경 왕래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의 신심과 평소의 행동은 다른 신자들로부터 신임을 얻기에 충분하였으나, 그 자신은 양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김으로 써 얻어야 할 모멸과 박대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이여진이 북경에서 돌아온 뒤 조선 신자들은 그 곳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중국 교회는 박해를 받고 있었고,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에서의 원조가 크게 줄어들었으며,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교황청이 교황령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다. 〈2〉이 사라이바 주교의 답신은 1813년 겨울에 작성되었는데, 그것이 조선에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답신의 한문 전사본은 위에서 말한 서가회본 안 에 포함되어 있다.
리베이로 총대리 신부에게 선교사 파견 방법을 계속 모색해 보도록 지시하고, 포르투갈 왕에게 서한을 보내 통상을 위한 상선 혹은 왕실 선박을 조선에 보낼 수 있는지를 물었으나 회답을 받지는 못하였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1811년의 서한을 받은 후 조선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그런 다음 우선 마카오의 포교성 대표인 마르키니(Marchini)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북경에서 추방된 4명의 선교사 중에서 한 명을 조선으로 파견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였다. 또 1817년 3월에는 남경 주교와 마르키니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에 적절한 선교사를 선발하여 북경 주교에게 소개하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은 중국 교회의 사정으로 인해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1812년(혹은 1813년) 말에 조선 신자들은 다시 이여진을 북경으로 보내 서한을 전달하였다. 이 서한에서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북경 교회를 위로하고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3〉
〈3〉이 서한은 위에서 말한 서가회 전사본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발신자의 성명은 것유사정겄(兪斯定, 즉 유스티노)으로 되어 있다. 이 유스티노는 1801년에 무산(혹은 종성)으로 유배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유배 후 회두하여 교회 일을 도왔으며, 1811년의 밀사 파견에도 이바지하였고, 1830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이번에도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지적인 박해가 일어나 1813년에는 공주에서 원 베드로가 옥사하고 황 바오로와 장대원(마티아)이 참수를 당하였다. 또 권기인은 성직자 영입이 결실을 맺을 수 없게 된 것을 슬퍼하다가 1814년에 병사하였고, 오랫동안 해미 진영에 갇혀 있던 김진후(金震厚, 비오)가 옥사하였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은 끊임없이 북경 교회와의 연락에 노력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또 다른 밀사가 북경에 파견되었다.
2) 교우촌의 형성과 을해박해 신자들의 신앙 공동체 즉 교우촌(敎友村)은 이미 신해박해 직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진산 이웃의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 남부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의 위협을 느끼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조부인 최인주(崔仁柱)가 고향을 떠나 다락골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산곡으로 이주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 홍주의 신자 황일광(黃日光, 알렉시오)은 1798년에 아우와 함께 경상도로 이주했고,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도 경상도 북부 산곡으로 이주하였다.
교우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 이후였다. 이처럼 비밀 교회(Crypto Church)로서의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조정에서도 점차 이를 눈여겨 보게 되었으나, 그 곳 신자들의 생활이 원래 비밀에 부쳐진 까닭에 생각처럼 용이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고자나 배교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발각됨으로써 전 신자가 체포되고 교우촌 자체가 폐허가 된 경우도 있었다.
더 큰 것을 얻을 작정으로 1815년 2월 22일 부활대축일에 포졸들을 이끌고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청송의 노래산 교우촌(현 청송군 안덕면 老萊2동)이 먼저 습격을 당했고, 이어 진보의 머루산 교우촌(현 영양군 포산면 葡山洞), 영양의 곧은정(현 영양군 일월면 소재)과 우련밭(雨蓮田, 현 봉화군 재산면 葛山里)신자들이 체포되었으니, 이것이 을해박해(乙亥迫害)이다. 먼저 노래산 교우촌에서 체포된 신자 40명은 모두 청송의 상부 관청인 경주 진영에 투옥되었으며, 이중 26명이 석방되거나 옥사하고 14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또 진보와 영양에서 체포된 31명의 신자들은 일단 안동 진영에서 문초를 받은 후 그중 19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당시 71명중에서 경상도 출신으로 입교하여 교우촌으로 이주한 신자는 김윤덕(金允德, 아 가다 혹은 막달레나)을 비롯하여 몇 명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은 충청도 내포 지방 출신이었다. 이 사실에서 볼 때 이 곳 교우촌은 앞서 박해가 있었던 지방 신자들이 이주해 건설한 것이며, 이들은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다시 신앙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노래산 출신 중에서는 고성대(高聖大, 베드로).성운(聖云,요셉) 형제를 비롯하여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과 최성열(崔性悅, 바르바라) 부부, 그들의 사위인 최봉한(崔奉漢, 프란치스코), 김화준(야고보), 김윤덕 등이 알려져있는데, 서석봉·김윤덕 등 2명은 훗날 옥사하였고, 고성대·고성운·최성열·김화준 등 4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 1816년 12월 26일(음 11월 8일) 대구 감영(혹은 觀德堂)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또 머루산·곧은정·우련밭 출신 중에서는 앞서 말한 김종한(안드레아)을 비롯하여 이시임(李時任
순교하기 전에 김종한은 형과 동료들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순교를 다짐했고, 옥중에서는 함께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을해박해는 경상도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강원도 울진의 새로 형성된 교우촌에서는 김강이(金綱伊, 시몬)와 타대오 형제 등 5∼6명이 체포되어 안동 진영에 갇혀 있다.
3) 정해박해와 전라도 교우촌 이후 약 10년 동안 교회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1817년에는 충청도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龍洞里) 교우촌이 습격을 받아 손연욱(요셉) 등이 해미 진영에서 옥사하였다.또 1825년에는 내포 지방에서 몇몇 신자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27년 초에는 전라도 북부 지방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후자의 박해는 을해박해 때와 마찬가지로 새로 형성된 교우촌을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의 신입 교우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정해박해(丁亥迫害)였다. 박해는 전라도 곡성 지방에 서 사소한 시비에 연루된 한 신입교우의 밀고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1801년에 체포되어 안의로 유배되었던 이일언(李日彦, 욥)이 임실에서, 1791년과 1802년에 체포된 적이 있던 이태권(李太權, 베드로)도 전라도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이유정은 전주 옥에서 1827년 9월 14일에 장사하였으며, 형 이유진은 오랫동안 옥중 고난을 겪다가 1835년 4월 11일에 사망하였고, 김도명도 1832년경에 옥사하였다.
전라도 감사는 이때 신자들의 신문 과정에서 이름이 밝혀진 다른 도 거주자들도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그 결과 경상도 상주에 있던 신태보(베드로)가, 한양에 거주하던 이경언(李景彦, 바오로)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신태보의 체포로 다시 신자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상주에 거주하던 박보록(朴甫祿, 바오로)과 아들 사의(士儀, 안드레아), 1815년의 순교자 김강이(시몬)의 조카인 김사건(金思健, 안드레아) , 안군심(리카르도), 순흥에서 거주하던 이재행(李在行, 안드레아) 등이 체포되어 상주 진영에 투옥되었고,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은 이 소식을 듣고 안동 진영에 자수하였다. 그러나 다른 3명은 전주 감영에 갇혀 있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1839년에서야 최후 판결을 받게 되었다. 훗날 다블뤼 주교는 순교 사적을 조사하면서 정해박해 때 신자들이 석방되지 않고 12년 동안이나 옥에 갇혀 있던 사실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처럼 정해박해는 을해박해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우선 신유박해 이후 여러 곳에 새 교우촌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곳을중심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있던 사실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시기에 신자들의 타지역 이주가 가장 심했던 지역은 교회 창설 초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충청도 내포 지방이었다.
다음으로 이때 밝혀진 신자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여전히 중인층이상의 신자들이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면서 지역 사회에 교리를 전파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신분 구성면에서 본다면 후기에 나타나는 신자 집단처럼 하층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초기 교회의 유형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신문화수용 운동과는 거리가 먼 종교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는 곳곳에서 비밀 신앙 공동체가 발견된 사실을 중시하여
4) 정하상과 동료들의 활동 신유박해 이후 어렵게 재개된 성직자 영입 운동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지도층 신자들의 활동은 일시 주춤하였다. 이 운동이 재개된 것은 전적으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에 의해서였다. 그는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 입국한 이듬해에 광주 분원(현 광주군 남종면 分院里)에서 순교자 정약종과 후처인 유소사(세실리아)의 아들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곱 살 때 부친과 형이 순교하면서 모친을 따라 양근 마재의 본가로 내려가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어려서부터 정하상과 동생 정정혜(엘리사벳)는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몸에 익혔고, 모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며 하느님의 종으로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집안 때문에 신앙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교우 집으로 가서 생활하는 동안, 성직자의 필요성을 간절히 느끼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문과 교리를 더 알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되어 있던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여러 달 동안 학문과 교리를 배우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무산에 있는 동안 정하상은 조동섬과 다시 성직자 영입 운동을 협의하였다. 이에 한양으로 올라오자마자 교우들과 접촉하여 북경까지 왕래할 비용을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결국 그의 호소는 교우들로부터 호응을 얻었고, 마침내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정하상이 처음으로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1816년 겨울로,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이듬해 초 그가 남당으로 리베이로 신부를 찾아갔을 때, 그 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다시 한 번 조선 교우들의 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여진이 북경을 다녀간 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리베이로 신부는 정하상에게 성사를 준 뒤, 그 소식을 즉시 마카오에 있는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하였다. 이때 사라이바 주교는 조선 신자들을 위해 1817년 초에 남경(南京)의 두 선교사를 파견하였으나 모두 조선 땅을 밟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 정하상을 도와 주던 교우 중에는 동정 부부로 유명한 조숙(趙淑, 베드로)과 권(權) 데레사가 있었다. 조숙은 조동섬의 인척으로 양근 출신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딸이었다. 그들은 한양에 거주하면서 정하상을 자신의 집에 거처하도록 하는 한편 북경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해주었다. 그러다가 정하상이 한양에 도착하기 직전에 체포 되고 말았다. 이때 그 집에 거처하던 재령 출신 고(高) 바르바라(혹은 막달레나)도 체포되어 세명이 함께 1819년 6월 13일(혹은 5월 21일)에 순교하였다.〈6〉 〈6〉정하상의 숙부인 정약용(요한)은 1818년에 해배되었다. 그러나 이후 회두하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다블뤼 주교는 그가 해배된 지 2∼3년 뒤부터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훗날 조선에 입국하는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에게 대세를 받고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Daveluy, op. cit., pp. 339∼441).
사실 정하상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탓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교회기록에서는 이를 가리켜 하느님의 섭리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성직자를 파견해주도록 요청하였으며,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이끌어 갈 만한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교회 일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1824년과 1826년에 정하상은 훌륭한 동행자를 만나게 되었다. 조정의 역관 출신으로 사신 행차에 들어가기가 용이했던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과 마부 조신철(趙信喆, 가롤로)이 그들이었다. 유진길은 정하상을 만나자마자 의기 투합하여 1824년 말에는 교황에게 보내는 조선 신자들의 서한을 가지고 함께 북경으로 가서 성사를 받았으며, 조신철은 1826년에 유진길과 함께 북경을 다녀왔다. 이때 조선 신자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