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천주교 수용과 교회창립
1.천주신앙의 수용과 교회창립
1) 이승훈의 북경 세례
이벽은 천주교리를 연구하는 동안 스스로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서적이 한정되어 있던 데다가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벽은 북경에 가서 직접 선교사들을 만나 설명을 듣고, 필요한 서적을 얻어 오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거의 닫혀 있었다.
쇄국의 테두리 안에 있던 조선에서는 연행사의 수행원이나, 연행 무역에 참여하는 상인 일행에 들어가는 것만이 북경에 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벽으로서는 북경에 갈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그는 친구인 이승훈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 이동욱의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훈은 기호남인에 속하는 이름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178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의 외가 또한 유명한 남인 집안으로, 실학자 이익의 종손 이가환(1742-1801)아 바로 그이 외숙이다.
이가환은 훗날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면서 “북경이 갈 기회가 오면 직접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겠다. ”고 다짐한 학자 관리 였다.
당시 이승훈의 집은 서부 만석방의 염초교 부근(서울 중구 중림동)에 있었고, 이벽은 고향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여 수표교 인근(서울 중구와 종로구 사이)에서 살고 있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면 천주당으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보도록 부탁했다.
천주교 서적에 있는 영세를 요청해보고, 가능한 많은 교회서적과 서양 물건을 얻어 오도록 하였다.
〈북경에 가면 천주당이 있고, 그 천주당에는 서양 선교사로 천주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네. 자네가 가서 그들을 찾아보고 교회서적과 영세를 요청하면 선교사들이 반듯이 크게 반겨할 것이네.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고 반듯이 그들에게 진기한 물건을 많이 얻어 오도록 하게(황사영,백서)〉
그 무렵 이승훈도 여러 해전부터 서학서를 접수해왔고,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주신앙보다는 서양의 수학에 관심이 컸으며 북경에 가는 기회를 용해 수학에 정통한 선교사를 방문할 생각이었다.
그는 이벽의 부탁이 이루어 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훈은 예정대로 동지사 일행을 따라 1783년 10월말에 서울을 출발하였고, 그 해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북당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을 방문했다.
예수회는 1773년에 이미 해산된 상태이지만, 궁정에 봉사하는 회원들만은 그대로 남았다.
이에 앞서 1782년 12월 15일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재속자제로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인 구베아신부가 북경교구장에 임명되고, 다음에 인도의 고아에서 주교 서품식을 가진 뒤 중국입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북당에서 이승훈을 맞이한 사람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 알메이다 신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원 그라몽 신부와 방타봉 신부였다.
특히 그라몽 신부는 궁정에서 수학자요 통역관으로 활동하고 있어다.
수학을 배우고 싶었던 이승훈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었다.
실제로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에게 수학을 배우고, 틈틈이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많은 교회서적을 주었다. 둘사이 의사 소통은한자를 통한 필담으로 이루어지고 그사이 이승훈을 수학에서 천주교 신앙으로 돌려 놓는데 성공했다.
이승훈은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영세를 청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784년(정조8) 1월말 부친의 동의를 얻어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로 세례명을 받는다.
이렇게 하여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영세입교자가 되었다.
이에 앞서 일부 선교사들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 세례를 주는 것이 너무 이르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이승훈은 배교를 강요받을 경우에는 죽음을 택하고, 첩을 두지 않겠으며, 조선으로 가면 복음을 전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세례를 받는다.
이승훈은 귀국하면서 서양의 과학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
그 중에서도 페르비스트의 교요서론, 연중기도서인 롱고바르디의 天主聖敎日課와 디아즈의 袖珍日課수진일과 등은 그 때까지 조선에 전래되지 않은 것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이벽을 찾아가 그에게 건너 주었다.
그와의 대화 속에서 이벽은 북경교회의 상황과 선교사들을 알게 되고, 이승훈이 받은 세례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2) 이벽의 연구활동
이벽은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으로 연구를 거듭하면서 이 과정에서 성사의 의미와 성인들의 행적, 성서내용과 일상의 기도생활, 그리고 주요 교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제 천주 신앙은 서양에서 건너온 학문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 다가 오고 있으며, 천주는 찬조주요 주재자인 존재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벽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천주교리를 수용해 나가게 되엇고, 자신이 이해한 천주교리를 진지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벽은 1784년 6월 2일 학문 동료인 정약전.약용 형제와 함께 양근 마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천지창조, 삶과 죽음의 이치 등 천주교리를 들려주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정씨 형제에게 〈천주실의.칠극〉 등 각가지 교회서적을 빌려 주었다.
이어 그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양근 한감개로 스승 권철신을 찾아가 천주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때 권철신도 이벽의 설명을 듣고 천주교를 학문이 아니라 신앙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천주신앙에 확신을 가졌던 그의 아우 권일신은 이벽의 뜻에 따르고자 하였다.
한편 광주 덕곡에 거주하던 안정복은 이벽이 책을 가지고 권철신의 집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권철신에게 이벽이 자신의 집 앞을 그냥 지나쳐 권철신의 집으로 간 일을 책망하기도 했다.
이벽의 전교활동은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이가환을 찾아가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벽은 중인 〈최창현.김종교.최인길.김범우〉 등에게도 교리를 전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이승훈, 권일신과 정약전.약용 형제〉들을 다시 만나 북경교회에서 이루어 지는 세레식을 이땅에 갖기로 합의했다.
3) 조선천주교 창설
1784년 겨울, 이승훈.권일신.정약전.약용형제는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을 제외하고는 권일신.이벽.정약용에게 세례를 베푸니 이것이 조선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이때 〈권일신에게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벽은 세례자 요한〉〈정약용은 사도 요한〉을 세례명을 받았다.
이 최초 세례식은 〈조선천주교회의 창설〉을 의미한다. 이승훈을 비롯하여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천주교회는 자발적으로 창설되었다.
동시에 이벽의 집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집회소가 되었으며, 이승훈과 북경 교회를 연결고리로 하여 모자관게가 성립되었다. 더욱이 첫 신자들은 다른 이들에게 이를 전하는 데 노력하니 복음확대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