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초기교회의 교리논쟁
교리 논쟁(Ⅰ)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기초로 삼으려고 결심하였을 때, 이 교회가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하나로 단결되어 있지 못하고 극심한 내부 투쟁으로 분열되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당시 여러가지 이단(異端)으로 인해 교회는 단일성을 상실하였고 많은 신학적 문제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는 324년에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자 즉시 교회의 내적 일치를 회복하고 여러 가지 난관을 제국의 종교회의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세 가지였다. 즉 성삼론(聖三論), 그리스도론, 의화론(義化論, 또는 구원론)이었다. 이 문제들은 300년 동안 교회의 신학적 쟁점이 되었다.
성삼론
1. 신의 단일론적 학파
천주성삼에 대한 교리 문제에 있어서 필요한 사항은 성부와 성자의 내적 관계를 자세하게 정리하고 이를 계시(啓示)의 입장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이 성삼의 신비를 구체적이 아닌 일반적 용어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문제는 2세기 말까지는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靈知主義者)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단적으로 설명하였을 때, 즉 그리스도를 하나의 창조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을 때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神)의 단일성을 조화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 여기서 2세기말에 두 가지의 이단적인 ‘신의 단일론적 학파’ 가 생겨났다. 하나는 성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부의 양자(養子)라는 양자설(養子說, Adoptianism)이며 다른 하나는 삼위(三位)라는 하나의 신의 세 형태에 불과하다는 양식론(樣式論, Modalism)이다.
양자론 : 이 학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순수한 인간으로 보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어느 한 순간에 ―아마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중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이 있었을 때에― 신의 능력으로 신격화(神格化)되어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본래의 참된 신은 오직 성부뿐이며, 그리스도는 양자 관계에 의한 신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식론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신(唯一神)의 한 형태만을 보았다. 그 유일신은 때에 따라 성부로 나타나기도 하고 성자나 성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론자들은 성부께서 인간을 위해 수난을 받으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성부수난주창자라고 불려지기도 하였다.
이 극단적인 단일론자들은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모두 로마에서 배격되었다. 190년경에 빅톨 교황(189-198/199)은 로마에서 양자설을 전파하려던 테오도투스를 파문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양식론을 주창한 프락세스에 대해서는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후시대에 사벨리우스가 양식론을 주장하였을 때에 갈리스투스 교황(217-222)이 이 학설을 단죄하였다. 그 후 이 이단은 로마의 신학자인 노바씨아누스에 의해 250년경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었다.
2. 아리우스 사상
로고스(말씀) 그리스도론 (Logos Christology) : 이 교리는 오리제네스에 의해 연구,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는 성삼의 내적 순서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 비록 이 그리스도론이 성서를 따라서 ‘로고스 그리스도’ 의 신성(神性)을 주장하고 있지만, 성삼에 있어 서열상으로 성자인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시켰고 성령을 성자의 아래 위치에 놓았다. 따라서 성령과 성자는 성부와 같은 신성을 갖고 있지만, 이 신성은 성부에게서 유래된 하급의 것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하나의 다신론적 일신론(多神論的 一神論)의 주장을 내세운 셈이다.
오리제네스의 이러한 견해는 상반된 두 신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의 출발점이 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부와 성자의 공동본체론(共同本體論)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단일성을 주장하였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로고스 그리스도는 다만 제2의 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구별된다고 강조하였다. 3세기 중엽에 안티오키아 학파의 루치아누스는 성삼교리에 있어서 성자의 성부종속설(聖父從屬說)을 주창하여 아리우스 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아리우스(260-336) : 313년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교회의 목자가 된 아리우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며 웅변가였다. 그는 318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알렉산델과 충돌하였다. 그 이유는 아리우스가 그의 설교, 편지, 저서 등에서 엄격한 성자의 성부종속론을 주장함으로써 신의 단일론적 경향을 갖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로고스를 신에서 분리시켜, 로고스는 참된 신이 아니며, 신성과 다른 본성과 속성을 갖고 있으며, 창조물 중에서 인간보다 높은 첫 창조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에서 축출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그의 가르침은 이단으로 단죄되어 그는 파문을 받았다.
이제 아리우스는 그의 안티오키아 학파 친구들에게 가서 니코메디아의 주교인 에우세비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그 후에 아리우스의 친구들이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도록 도와주었을 때에 거기에서 데모, 야간집회 등 난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회 내정에 간섭하는 비극이 초래되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들을 니체아에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니체아 공의회(325) : 여기에 참석한 주교들은 5명의 서방교회의 주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 로마 제국의 주교들이었다. 교황 실베스텔 1세(314-335)는 연로하여 참석치 못하고 대신 두 장로를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자신의 교리를 변호하고 17명의 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랜 격론 끝에 정통파가 승리하여 니체아 신경(信經)속에 정통 교리가 정의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의 본체에서 탄생한 창조물이 아닌 신의 외아들이며 성부와 ꡐ같은ꡑ본체를 지닌 참된 신이다. 이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모든 교회에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앙의 적으로 교회에서 축출되었다고 알리면서 이들의 저서들을 불태울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공의회의 결정은 불변의 교리였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의 태도를 바꾸어 328년에 추방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복직시켰다. 이에 대해 328년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우스가 자기 성직자단에 아리우스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아리우스 문제는 계속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는 아리우스 논쟁을 끝맺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플에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때에 신학자들은 신 안에서의 위격(位格)과 본성의 의미를 정의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신격(神格)은 다만 세 신성의 내적 관계에서만 존재하고 이 세 신격안에 하나의 신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325년, 니체아 공의회 신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첨가되었다. '주님이시여,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이 신경은 예절의 한 부분이 되어 처음에는 성세성사와 관련시켜 사용되었고 미사예절에 들어온 것은 6세기부터이며, 로마에서는 1014년에 황제 헨리 2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 성삼의 교리는 가톨릭교회에서 확실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신학 문제는 그리스도론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스도론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있어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계되는 성서 구절의 해석에 있어서 두 신학파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오직 신성에서만 이루어지며, 두 본성은 모두 그 자체로 존재하며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역설하면서 인성을 신성과 독립하여놓고 두 본성의 일치는 외면적인 것으로 보았다.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치릴루슨느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아주 밀접하며 실제적인 것으로 보고, 이 일치 후에는 하나의 본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때에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모친’ (Theotovkos)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인성인 예수만을 낳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모친’(Christovkos)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임을 반대하였지만, 아리우스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완전함을 살리기 위해서 신성에서 인성을 분리하여 두 본성이 모두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완전한 분리는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불가분의 합일을 인정치 않는 이원론(二元論)에 이르게 되었다. 이 두 신학파의 대립은 상반되는 신학적 견해 외에 두 총대교구인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사이에 있었던 라이벌 의식이 직접 개입되어 있었다.
치릴루스는 429년에 에집트의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첼레스티누스 1세(422-432)의 지지를 보장받아 네스토리우스를 강경하게 반박하고, 12항의 파문조문(破門條文)을 작성하여 교황의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반박하는 12항의 파문조문을 발표하였고, 동 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자기 편으로 하여 서 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425-455)와 함께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권하였다.
에페소 공의회 : 에페소에서 431년 6월 22일에 공의회가 열리었다. 개회식에 네스토리우스 파의 지지자인 주교들이 도착하지 않자 치릴루스는 그가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 일치를 언급한 교리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 선언문은 198명의 참석주교들에 의해 인준되었고, 이들은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주장에 대한 단죄에 서명하였다. 따라서 이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교리가 정식으로 공표되어 밖에서 기다리던 군중은 환호로 받아들였다.
며칠 후에 안티오키아로부터 44명의 주교가 도착하여 즉시 네스토리우스 편을 들어 에페소 공의회에 반대하는 공의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이제 상호간에 악의에 찬 공격과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황제는 이 소동에 개입하여 두 지도자인 치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연금하였다. 나중에 치릴루스는 그의 지방인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도록 허락되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에집트의 북부지방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451년경에 사망하였다. 네소토리우스 사건에 있어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어느 정도까지 이단이며, 그는 오해의 희생물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성론(단성론 : Monophysitism) :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지나친 반박에서 새로운 이단이 발생하였다. 수도원 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네스토리우스의 강경한 반대자이며 동시에 치릴루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인성은 신성에 의해서 완전히 소멸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의 존재를 부인함으로 해서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강생(降生)의 신비와 그의 구원자로서의 전제조건이 없어져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가, 에우티케스를 한 종교회의에 소환하여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이에 불응함으로써 이단자로 단죄되었다. 그러나 치릴루스의 후계자이며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디오스크루스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 총대주교의 요구에 의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9년에 에페소에 다시 한번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에우티케스는 명예 회복되었고, 따라서 교황 레오 1세(440-461)는 이 회의를 강도 행위의 모임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에 대한 교리를 천명하였다. 이는 최초의 ‘교황의 무류권(無謬權)’ 행사였다. 교황이 황제에게 새로운 공의회의 소집을 요구하여, 테오도시우스 2세의 계승자인 마르치아누스(450-457)가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451년) : 이 공의회에는 약 35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고 교황의 특사가 사회를 맡았다. 이 회의에서 디오스크루스는 이단자로 단죄되었고, 그리스도 안의 한 본성의 단성론적 교리가 거부되었다. 그리고 공의회는 신조로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개의 본성은 혼합되거나 구분되지 않으면서 한 위격 안에서 일치된다.’
이에 레오 1세는 그리스도 문제에 있어서 테르툴리아누스 이후의 서방교회의 신학적 설명을 토대로 하여 위격적 일치(Hypotastic Union)의 교리를 선언하였다. 즉 치릴루스와 에우티케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어떠한 혼동이나 구분이 없이 그 주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네스토리우스 주장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천주 성자의 위격 안에서 일치되어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치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리를 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러한 결정은 구원론의 기초가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개념적이고 언어학적인 해명은 서방 신학 발전에 있어 견고한 바탕을 마련하였지만,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미 공의회 회기 중에 서방과 동방 교회의 신학자들간에 긴장 상태가 일어났고 이로써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라이벌 의식에 의해 가중되었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도 계속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단성론적이었다. 이러한 단일성의 개념은 신학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면까지 연장되어 종교와 정치, 교회와 국가를 흡수, 융합시키는 동방 교회의 제국 신학을 발달케 하였다.
이 단성론에 대한 교리는 정치적 개입으로 몇 차례의 종교 회의를 거치면서 교회의 혼란을 초래했으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에서 다시 한 번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이 재확인되면서 이 문제는 교회 안에서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