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세계교회사

[스크랩] .역대공의회 주요내용 - 공의회 정립기 1123-1517년 까지-

손드러 2010. 1. 6. 08:13

 

역대 공의회의 주요 내용(2)

 

 

 

 

- 교계 제도의 정립기(1123-1517) -

 

 

 

 

 

○ 세계 공의회는 모두 21차에 걸쳐 열렸는데, 제1회부터 제8회까지는 동방 교회 지역에서, 제9회부터는 서방 교회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동방 교회 지역(총 8번): 니케아(2번), 콘스탄티노플(4번), 에페소(1번), 칼체돈(1번)

서방 교회 지역: 라테란(5번), 리용(2번), 비엔나(1번), 콘스탄츠(1번), 바젤-페라라-플로렌스(1번), 트리엔트(1번), 바티칸(2번). ○

 

 

 

 

제9차 세계 공의회: 제1차 라테란 공의회

 

 

(Concilium Lateranense, Council of Lateran)

 

 

 

개최 시기

1123. 3. 18 - 4. 6

소집자

갈리스도 2세 교황

소집 목적 및 결과

보름스 정교 조약(1122, 9)을 재확인하여 승인하고 임직권(서임권) 논쟁을 종식시킴

 

 

 

주요 내용:

 

 

300여 명의 주교 및 대주교 그리고 600여 명의 서방 대수도원장이 참석하였으며, 이 회의에서 임직권(서임권), 영성적 임무, 성직자, 교회와 재산, 사람, 장소 등의 보호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교회 개혁을 위한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보름스 정교 조약(Concordatum Wormatiense): 교황 갈리스도 2세와 독일 황제 하인리히 5세가 1122년 보름스에서 맺은 조약으로 그동안의 서임권 논쟁을 종식시켰다. 그 이전에는 황제와 교황이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싸웠는데 이 조약을 통해 양측은 이중 임직(二重任職)에 합의했다. 즉 주교의 선출권을 주교좌 성당의 성직자(13세기에는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에게 줌으로써 주교 선출의 자유와 교회의 임직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황제도 주교에게 세속적인 임직을 수여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즉 주교에게 세속적인 영주로 임명하여 그에게 봉토(封土)를 수여하였다. 이로써 주교는 두 가지 지위, 즉 주교로서의 영적인 지위와 영주로서의 세속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제10차 세계 공의회: 제2차 라테란 공의회

 

 

(Concilium Lateranense II, The 2nd Council of Lateran)

 

 

개최 시기

1139. 4 (3차례 회의)

소집자

인노첸시오 2세 교황(재위: 1130-1143)

소집 목적 및 결과

아나클레토 이단을 탄핵하고 단죄함

 

 

 

주요 내용:

 

1130년 교황 선거에서 인노첸시오(Innocentius) 2세와 아나클레토(Anacletus) 2세가 동시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된 두 교황은 분열하고 대립하였으나, 아나클레토 2세가 1138년 죽게 되자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은 교리와 규율을 논의하기 위해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500-1000명에 달하는 주교, 대주교, 대수도원장이 참석하고 동방 교회에서는 약간 명이 참석하였다. 교황은 개회 연설에서 아나클레토 추종자들의 성직을 박탈하고 이단자들을 파문하였다. 교회 개혁의 차원에서 교리, 권위, 주교, 성직자, 수도자, 교회들의 권리 문제를 다루고 30여 개의 법규를 공표하였다.

 

 

 

제11차 세계 공의회: 제3차 라테란 공의회

 

(Concilium Lateranense III, The 3rd Council of Lateran)

 

 

 

개최 시기

1179. 3. 5 - 3. 19 (3차례 회의)

소집자

알렉산데르 3세 교황(재위: 1159-1181)

 

 

 

주요 내용:

 

교황권의 상승과 교회 개혁, 교황 선거법 재정: 추기경의 3분의 2 다수결 채택, 추기경 하한 연령 30세. 모든 주교좌 성당에 성직자 학교 설립. 발도파와 알비파(카타리파)를 단죄함. 이 공의회에서 단죄된 발도파와 알비파, 카타리파 이단1)에 대해 살펴본다.

 

 

 

1) 발도파(발두스파, Waldenses)

13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단이다. 리용의 발두스(Petrus Waldus, ?-1217)2)

 

 

마태복음 10장 5절-15절을 읽으면서청빈이 그리스도교의 이상으로 생각하고, 가난하게 사는 자만이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루치오 3세는 여러 차례 그에게 경고했으나 듣지 않자 1184년 그의 설교 활동을 완전히 금하였다. 발두스가 1217년에 죽자 그를 추종하는 이들이 교황의 권위와 연옥을 부정하고, 평신도에 의한 사죄의 인정, 죄에 빠진 사제가 거행한 미사의 성사성을 부정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이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로 확산되어 종교 개혁의 기초가 되는 원리로 작용하기도 했다.

 

 

2) 카타리파(Cathari, Cathares).

 

자신들을 '순결한 사람'(Cathari)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안에서 마니교적 경향을 따른 최대의 이단으로, 11세기 초부터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카타리파3)는 9세기경 불가리아가 속한 발칸 반도와 그 주변 섬에

 

 

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12세기경에는 상인과 십자군에 참가한 카타리파 사람들에 의해 서유럽에 들어가게 되어 독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교리 사상: 카타리 사람들이 주장하는 교리는 일종의 이원론적 마니교식 그리스도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창조신을 둘로 보았다. 즉, 선의 신과 악의 신이 있는데, 인간이 사는 세상은 악의 신이 지배하는 곳이며, 인간의 순수한 영혼도 악의 창조신에 의해 지배되는 육체와 결합되어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해방 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의 창조신인 하느님께서 그의 천사 중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파견했으며, 천국에 가기 위해서 나쁜 물질과의 접촉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 성교, 육식, 물질, 재산의 소유 등은 물질적인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적인 것을 사용하는 가톨릭의 미사나 성사를 거부하였으며,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통과 의례'를 거쳐야 하며 이 의례를 행한 자는 '완전한 자, 혹은 순결한 자'(Cathari)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당시 성직자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서 존경을 받기도 했으며, 탁발 수도회의 발전에 큰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카타리파의 주장은 당시 청빈하고 복음적 생활을 꿈꾸고 있던 급진적 성향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이들은 별도로 교계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를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으며 가톨릭 교회를 사탄의 회당으로, 사제를 위선적 죄인으로, 성사를 마귀의 산물로,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로, 제후를 사탄의 조수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카타리파의 일부 불란서 세력은  1245년 몽세귀르(Montsegur)의 함락으로 큰 타격을 받고 14세기 말에 완전히 소멸되었다.

 

 

3) 알비파(Albigenses, Albigensianism).

 

카타리(Cathari) 이단을 따르는 불란서 남쪽 툴르즈(Toulouse) 지방의 알비(Albi) 지역 추종자들을 말한다.4) 즉, 카타리 추종자들은 무역로를 따라 발칸 반도,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세력을 떨

 

치고 1145년-1155년 사이에는 툴르즈(Toulouse) 지방의 알비(Albi)에 전파되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알비파의 지나친 엄격주의는 이단으로 판명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교회는 이단 심문 제도를 만들었다. 알비파들은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와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단죄되었다. 알비파들은 프랑스 왕권에 반대하여 알비파 전쟁(1209-1229)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후 14-15세기경에 소멸되었다.

 

 

 

 

제12차 세계 공의회: 제4차 라테란 공의회

 

 

(Concilium Lateranense IV, The 4th Council of Lateran)

 

개최 시기

1215. 11. 11 - 11. 30 (3차례 회의)

소집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재위: 1198-1216)

소집 목적

및 결과

십자군을 새로이 소집하고, 발도파와

알비파 이단을 결정적으로 단죄하고 추방함.

 

주요 내용: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에 개최된 중세 공의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의회이다. 교황권의 절정 시기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1204) 실패에 따른 십자군 원정 교령을 발표하였으며, 카타리파(알비파) 이단을 추방하였다.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 및 서구 교회의 대주교, 주교들 4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성체 교리에 있어서 처음으로 '실체 변화'(Transsubstantiatio)라는 말이 공식으로 사용되고 정의되었다. 주교의 교사 임무를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 신자로 하여금 년 1회 이상의 고해 및 영성체를 의무화하였다.

 

 

 

 

 

 

제13차 세계 공의회: 제1차 리용 공의회

 

(Concilium Lugdunense, The Council of Lyon)

 

 

 

개최 시기

1215. 11. 11-30 (3차례 회의)

소집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재위: 1243-1254)

 

 

 

주요 내용: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주교 150여 명이 참석했다. 성직자를 박해한 독일(신성 로마) 황제 프레데릭(Frederick) 2세의 폐위를 결정하였으며, 헝가리를 침략한 몽고 타타르족에 대결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제국을 위협하는 그리스에 대항하여 라틴 제국을 지원할 것을 결의했다. 빼앗긴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지원책을 강구하고,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한 교회 개혁안 칙서를 공표했다.

 

 

 

 

제14차 세계 공의회: 제2차 리용 공의회

 

 

(Concilium Lugdunense, The 2nd Council of Lyon)

 

 

개최 시기

1274. 5. 7 - 7. 17 (6차례 회의)

소집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재위 : 1271-1276)

 

 

 

주요 내용:

 

500여 명의 주교, 60여 명의 대수도원장, 1000여 명의 고위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 성지 해방, 도덕의 개혁을 위해 소집되었다. 미카엘 8세 황제가 파견한 동방 교회 대표들은 필리오케(Filioque), 교황의 우위성, 연옥, 칠성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이로써 잠정적이나마(1274-1289) 동·서방 교회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극동 지방에 대한 선교가 제안되었고, 성직자 수입의 십일조를 부과하여 십자군 원정을 돕는 법안을 마련하였다. 또한 콘클라베(Conclave)라고 불리는 교황 선거법이 마련되었다.

 

 

 

 

제15차 세계 공의회: 비엔나 공의회

 

 

(Concilium Viennense, Council of Vienne)

 

 

 

개최 시기

1311. 10. 16 - 1312. 5. 6 (3차례 회의)

소집자

클레멘스 5세 교황(재위 : 1305-1314)

 

 

 

주요 내용:

 

이단과 부도덕성으로 단죄된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산했으며, 성지 수복을 위한 지원 및 교회 개혁의 문제를 논의했다. 프란치스코회의 청빈 문제를 논의하고 엄격한 측을 옹호했으며 교회 개혁령을 반포했다.

 

 

 

 

 

제16차 세계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

 

 

(Concilium Constantiense, Council of Constance)

 

 

 

개최 시기

1414. 11. 5 - 1418. 4. 22 (45차례 회의)

소집자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재위: 1406-1415)

마르티노 5세 교황(재위: 1417-1431)

 

 

주요 내용:

 

독일 콘스탄츠에서 3년 5개월 간 열린 공의회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그문트(Siegmund)가 제안했다. 서구 대이교(1378-1417)를 종식시키고 이단을 추방했으며,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공의회는 위클리프(Wycliffe)의 명제 200개 안과 후스(J. Huss)의 명제 30개 안을 이단으로 단죄한 후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415년). 공의회 우위설(Haec Sancta)을 주장했다.

 

·서구 대이교: 서구 대이교5)란 교황들의 대립으로 야기된 교회 분열을 말한

 

 

다.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계 교황 베네딕토 13세, 공의회파 교황 요한 23세가 서로 대립하여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린 공의회였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이들 모두를 퇴위시켜야만 교회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되자 요한 23세는 샤프하우젠으로 도주하여 공의회를 비난하였다. 황제 지그문트는 교황 없이도 공의회는 속개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요한 23세를 소환하였다. 그리고 공의회에서도 "Haec Sancta"라는 교령을 반포하여, '공의회가 분열된 전교회를 대표하며, 그 권능은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공의회 우의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황 없이 공의회를 계속 진행하면서 1415년 5월 29일에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를 설득하여 자진 퇴위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4일에 요한 23세를 폐위시키고, 그후 2년 뒤 1417년에 아비뇽계 교황 베네딕토 13세도 폐위시켰다. 이로써 세 계열의 교황으로 난립되던 서구 대이교가 종식되었으며 그후 1417년 11월 11일 새로운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선출되었다.

 

 

 

 

제17차 세계 공의회: 바젤-페라라-피렌체(플로렌스) 공의회

 

 

 

1) 바젤 공의회(Concilium Basilense, Council of Basel)

 

개최 시기

1431. 7. 23 - 1437. 5. 7 → 페라라

소집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재위: 1198-1216)

소집 목적 및 결과

마르티노 5세 교황(재위: 1417-1431)이 소집 하고, 그 후임 교황 에우제니오(Eugenius) 4세 교황(재위: 1431-1447)에 의해 추인됨.

 

 

주요 내용:

 

원래 교회 개혁을 위해 소집되었으나 교황권과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측과의 대립으로 분쟁에 휘말렸다. 공의회 우위설 측은 교황권을 축소시키기 위해 교황청에 내는 세금을 축소하여 교황청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1437년 동방 교회와 합동 공의회를 어디서 개최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양측 의견이 분열되어 결렬되었다.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겨 개최하려는 교황의 결정에 불복한 공의회측은 대립 교황으로 펠릭스(Felix) 5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1437년 페라라로 이전된 공의회는 1439년에 피렌체로 그리고 1442년에 로마로 이전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바젤공의회 16회기 이후에 결정된 사항들은 보편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도 않으며, 로마 교황이 인정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공의회의 결정 사항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2) 페라라 공의회

 

개최 시기

1437. 9. 18 - 1439. 1. 16 → 피렌체

소집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재위: 1431-1447)

 

주요 내용:

동·서방 교회에서 700여 명의 고위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였다는 교리, 누룩 없는 빵을 면병으로 사용하는 문제, 연옥 교리, 교황 우위설 등이 논의되었다.

 

 

 

 

 

 

3) 피렌체 공의회

 

(Concilium Florentinum, Council of Firente)

 

 

개최 시기

피렌체(1439-1445), 로마(1443-1445)

소집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재위 : 1431-1447)

 

주요 내용:

 

교황 우위론 대칙서(Esti non dubitemus, 1441. 4)를 발표하였다. 신경에 필리오케(Filioque)문제를 첨가하는 문제, 성체와 연옥 교리 확정, 동·서방 교회 사이의 일치 교령의 조인(1439. 6): 다른 전례를 허용하는 신앙의 일치 원칙을 합의하였다. 그리고 아르메니아파와 일치를 촉구하였으며(1439), 자코벵파와 일치를 도모하였다(1442).

 

 

 

 

제18차 세계 공의회: 제5차 라테란 공의회

 

 

(Councilium Lateranense, Council of Lateran)

 

 

개최 시기

1512. 5. 10 - 1517. 3. 16

소집자

교황 율리오 2세(재위: 1503-1513),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

 

주요 내용:

공의회 우위설을 지지하던 피사의 분리공의회(1511-1512)를 비난하고 그 교령들을 무효화시켰다. 교회 개혁에 대한 약간의 교령들이 있었으나 미흡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1) 요셉 후우비/강성위 역, 「가톨릭 사상사」, 158-162쪽, Jean Comby, Pour Lire L'Histoire de L'Eglise, tome 1, pp. 166-170

2) "발두스파", 「한국 가톨릭 대사전」(1985), 450-451쪽.

3) "카타리파", 같은 책, 1162-1163쪽. 요셉 후우비/강성위 역, 「가톨릭 사상사」, 158-162쪽.

4) "알비파", 같은 책, 784쪽.

5) "서구 대이교", 「한국 가톨릭 대사전」(1985), 591쪽. 본서 제20강좌 9번 참조.

 

 

 

 

출처 : 하늘 향한 그리움
글쓴이 : 손드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