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교자들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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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들어가는 말
- 올해로 병인박해가 있은 지도 벌써 130주년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순교하신 지는 150년, 최양업 신부님께서 탄생하신 지는 175년이 되었다. 숫자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그간 우리의 일상에서 까맣게 잊혀졌던 우리의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높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물론 아주 鼓舞的인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우려가 되는 것은 現今의 이러한 현상 역시 지난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러했던 것처럼 一時的인 것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 한국교회는 교회사 초기부터 많은 위대한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교회의 자랑거리라는 次元을 벗어나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순교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오늘날의 우리들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하는 하나의 커다란 課題인 것이다. 더욱이 現時代는 그 동안 많은 세월동안 잊혀졌던 우리 순교자들의 신앙과 그분들의 순교정신이 더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現世代에게, 신앙생활을 단순히 취미생활로 밖에 여기지 않는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을 未開한 神話속의 인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순교자들은 아직까지도 온몸으로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 그러나 그간 우리가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보인 관심은 실로 미흡하다. 그저 신자들의 일상과 유리된 교회사적인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아니면 일시적인 공경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순교자들에 관계된 어떤 역사적 사실자체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시적이며 외적인 공경이나 현양의 표현양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러한 노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깊이 깨달아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본고는 이러한 취지에 입각해서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본고의 주제가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한 것이 사실이며 강연회의 일관된 주제와도 다소 벗어나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 순교영성에 대한 명확한 의미규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또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신앙과 영성 역시 본고의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포함되는 것이기에 좀 더 포괄적이며 근본적인 주제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 먼저 2장에서는 순교영성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볼 것이고, 3장에서는 한국 순교영성의 사상적 바탕에 대해서 고찰할 것이며, 4장에서는 그러한 고찰들을 기초로 하여 한국 순교영성의 특성들과 그 현대적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5장에서 순교영성의 전망과 우리들의 과제에 대해 몇 가지를 제시하는 것으로 본고를 마치려고 한다.
- 2. 순교영성이란
- 1) 殉敎
- 순교영성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순교'라는 단어의 명확한 의미규정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순교란 말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행동"1), "신앙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는 일"2)을 의미하며 '증인'을 뜻하는 희랍어 'μαρτυ?'에서 유래한 말이다. 본래 '순교'와 '순교자'의 원어인 'μαρτυριον'과 'μαρτυ?'는 단순히 증언과 증거자를 의미했지만 이 단어들이 그리스도교에 수용되면서 그 의미가 본질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증거, 증언만을 뜻함이 아니라 피흘림을 통한 신앙의 증거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엄밀히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하여 초래되어야 하며,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自發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3)
- 그러나 이처럼 순교가 단순히 외적인 피흘림을 통한 신앙의 증거만을 뜻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교부시대부터 광의적 의미의 순교, 다시 말해서 주의 계명과 복음적 삶을 철저히 사는 것 자체도 순교로 보았던 것이다.4) 비록 피흘림의 순교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셨던 분들, 바로 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이미 순교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성모님을 순교자들의 모후라고 칭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무혈의 순교자, 혹은 하얀 순교자라고 부르고 있는 많은 성인성녀들, 모두 넓은 의미의 순교자들인 것이다.
- 결국 순교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물리적이며 협의적인 순교와 비록 피는 흘리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복음적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영적이며 광의적인 순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2) 순교영성(순교정신)이란?
- 그렇다면 순교영성이란 무엇인가? 순교영성에 대해 정확한 의미규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순교영성이란 말은 흔히 순교정신이란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곧 순교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모든 신앙과 신념과 모범적 삶 모두를 총칭하는 것이다. 즉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생명까지도 포기하며 사는 삶,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와 닮은 삶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순교영성, 순교정신인 것이다.
- a)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고린 10,31)
- 순교영성의 가장 根底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 순교자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고 그분을 위해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그분에게 모든 것을 바칠 원의 중에 살았던 것이다. 다만 극도의 시련인 물리적 죽음은 순교자들의 그러한,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뿐인 것이다. 사실 박해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지 않고 이 세상을 오랫동안 살다가 떠났을지라도 그분들의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증거적 삶은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삶이야말로 순교영성의 가장 근본인 것이다.
-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읍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5)
- b) 포기함 :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 어떤 것을 포기하든지 간에 포기함 없이 순교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많은 순교자들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심지어는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포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그것을 뛰어 넘어 순교하고자 하는 자신의 원의까지도 포기했던 것이다.
- "나는 순명으로 이렇게 얽매어 있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지금은 조선의 내 전교지방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천국의 빨마 가지 위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읍니다."6)
- 꼭 외적으로 목숨을 버리지 않더라도 하느님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이,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자세가 바로 순교영성의 특성인 것이다.
- c) 그리스도를 닮음
-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 안에서 나타나는 순교의 특성 중 첫째이며 근본적인 측면은 스승이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며 따름'이다. 즉 예수 친히 하느님의 탁월한 순교자이시며, 순교자들의 원형7)이시기 때문이다.
-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당하신 스승을 본받고 닮아 피를 흘리는 제자의 순교는 교회에서 최상의 은혜요 사랑의 최고 증명이라고 여기는 것이다.8)
-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와 가장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며 그분을 가장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을 따랐으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길을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순교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순교자의 고통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類似한 점을 가졌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순교자의 자세가 그분의 자세 즉 사랑을 닮았기 때문이다.9)
- "그러다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고 길을 가셨는데 내가 왜 이 길을 걷기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아니, 나는 예수를 한발 한발 따라 가겠다.' 이렇게 결심하니 기운이 솟아났습니다."10)
- 3. 한국 순교영성의 바탕
- 한국 순교영성의 특성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국교회에 나름대로의 순교영성이 있었겠느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혹시 파리외방전교회의 영성이나 아니면 당시 유럽에 만연하고 있던 교회내의 사조들을 그냥 답습한 것은 아닐까?
- 물론 영향을 받기는 하였겠지만 온전히 외부에서 주입된 것만은 아님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선교사가 입국하기 훨씬 전에 이미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또한 가장 소중한 生死의 갈림길에 있어서 아무 신념과 소신없이 단순히 외부에서 流入된 사조나 영성만으로는 순교의 결단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천주교가 비록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기는 하더라도 받아들인 사람은 바로 한국인이었고 그렇기에 한국적인 신념과 신앙에 의해 滋養分을 받고 키워진 순교영성위에서 순교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한국적인 순교영성이, 순교정신이 있었음은 再考의 여지가 없다. 아니 오히려 선교사 없이 단순히 서적에만 의존하여 신앙생활을 한 기간이 길기에 나름대로의 한국적인 영성이, 특히 순교영성이 정착할 수 있는 土臺가 마련되었다고 본다.
- 그러므로 이제 우리 순교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순교영성을 어떠한 토양 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순교영성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절대적 가치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그 바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1) 忠孝思想
- 유교에서는 孝에 의해 그 사람됨을 평가하여 孝道하지 않는 자는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11) 不孝를 가장 큰 죄로 간주하였다.12) 유교적 孝의 근본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삶을 조건없이 주시고 극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의 응답을 하는 報本과 報恩에 있다.13)
- 이처럼 조선의 유교사회는 가족질서라는 기본구조로 되어있고 그 중에서도 부자관계는 家系의 계승을 통한 가족의 연속적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三綱五倫 안에서도 부자관계의 규범인 孝가 선행적인 윤리척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君臣關係는 父子關係와 더불어 綱常을 이루고 있고 忠도 孝와 같이 기본 도덕규범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다. 부자관계가 親愛의 의미를 지녔다면 군신관계는 義理로 맺어져 엄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보겠다.
-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를 만물의 창조주이며 절대자로 받아들여 왕과 부모의 권위를 초월하는 분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천주는 천지만물의 大君大父로 호칭되었고 君上의 명과 父母의 명을 어기더라도 천주의 명은 어길 수 없다는 천주신앙이 표출되었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이해에 따르면 백성들은 君上의 은덕으로 살고 보호된다는 것이었으나 이제 신도들에게는 모든 생명과 삶이 천주의 은혜와 권능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해되었으므로 忠孝의 대상이 직접 천주께로 바뀌어졌던 것이다. 천주는 대부모이므로 육친의 부모도 오직 천주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14)
- "천주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고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데, 어떻게 그분을 배반하라고 그러십니까. 이 세상에서도 누구든지 부모를 배반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은 더구나 배반해서는 안됩니다."15)
- "그분은 온 세상의 가장 높으신 임금이요 아버지이십니다. 홀로 천주께서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과 그 외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섬기지 않는 자식과 임금님을 섬기지 않는 백성은 불효 불충한 자들입니다. 사람인 이상 어찌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읍니까."16)
- 물론 순교자들의 이러한 대군대부 의식은 당시 박해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無父無君의 무리로 규정짓고 공격하는 데 대한 反論이기도 하다. 즉 군부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무부무군이란 규정은 사회에서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었으며 이에 대해 신자들은 자기 신앙의 최고 대상인 하느님을 대군대부로 규정함으로써 박해자의 이론에 맞서며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려 했던 것이다.17)
- 그러나 이러한 호교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순교자들은 대군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효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며, 대군대부께 대한 不忠不孝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대군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충효를 실천하기 위해 순교까지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 결국 한국의 순교자들은 충효를 존중하던 문화풍토속에서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인식을 심화시켰고 그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는데에도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즉 다소 이국적이고 생소한 천주신앙을 충효라고 하는 자신들의 가치관 위에서 좀더 자연스럽고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 2) 節槪
- 옳은 일을 위하여 뜻을 굽히지 아니하는 기개를 절개, 또는 지조라고 하며 이것 역시 당시의 유교적 사회질서 속에서 중요한 가치관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었다. "충성된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便二夫)라는 말속에 함축되어져 있는 이러한 절개의 정신은 당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중요한 도덕률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그러나 공자나 맹자의 말씀에는 이같은 도덕률이 지적되어 있는 곳이 전혀 없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인즉 이 말은 전국시대 제나라 충신 王燭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말을 인용해서 자기의 뜻을 밝힌 것인데, 이것이 뒷날 왕권과 남자의 가장권이 확립되면서 신하들과 여자들에게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마침내는 꼭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신조처럼 되고 말았다.18)
- 더욱이 후대에 오면서 절개의 정신은 다소 편협하며 맹목적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즉 옳은 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거나 굽히지 않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義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한번 선택한 것이 설사 옳지 않더라도 그 뜻을 굽히거나 변경하지 않고 初志一貫하는 것 자체가 義로써 인식되기도 하였다.
- 이러한 절개의 정신이 우리 순교자들의 순교영성에도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절대적인 진리이며 하느님의 義를 따르고 실천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겼던 우리의 순교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께 대한 절개를 지키려고 했으며 그와 반대되는 행위인 배교는 가장 큰 수치요 죄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생각을 하시겠읍니까. 또는 감히 임금님을 배반하시겠읍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19)
- "순경에 있을 때에는 왕을 섬기다가 역경에 처해서는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에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당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20)
- 따라서 힘겨운 박해 속에서도, 고문의 순간에도, 죽음 앞에서도 결코 하느님께 대한 一片丹心을 굽히지 않고 변호하며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 3) 義를 위한 죽음
- 공자는 "志士와 仁人은 살기 위하여 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여 仁을 이룩하는 일은 있다."21)고 하였으며 맹자는 "生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義도 내가 원하는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으면 生을 버리고 義를 취할 것이다."22)라고 하였다.
- 우리의 선조들은 예로부터 이러한 사고바탕 위에서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 사회의 善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가장 큰 德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실천한 사람들을 세세대대에 걸쳐 본받아야 하고 칭송해야할 사람으로 公的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러한 신념과 가치관, 사회의 善 등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은 물론이며 그 강조점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명을 바쳐 자신의 신조와 신념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다.
- 이러한 例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忠臣들과 부모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자녀들, 여자의 정조를 중시하던 시대에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烈女들, 심지어는 주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즉 義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으며 더욱이 그러한 신념의 행위자체를 義의 완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 이처럼 義를 위한 죽음은 이미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오랜 전통 안에서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가장 고귀한 덕의 실천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참 진리로 받아들였던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사조위에서 하느님의 義를 실천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즉 특정 지역과 특정 시대에 의해 한계 지어졌던 세속적이며 현세적인 상대적 가치를 위해서도 목숨 바치는 것을 중요한 德으로 보았던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보다 더 절대적이며 영원한 가치로 인식되었던 하느님의 義를 위해 순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요 인간된 도리로 여겨졌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순교자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義를 위한 죽음, 곧 순교는 진리의 근원인 하느님으로부터 내세의 영복을 약속받는 것이었기에 더더욱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 4) 浮世思想
- 세상을 헛된 것으로 보는 부세사상은 현세를 중시하는 당시의 유교사회에서는 다소 독특한 사상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으나 한국인의 심성 속에 면면히 내려오는 순환적세계관을 생각할 때 그리 낯선 사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해시기의 이러한 부세사상의 형성 요인은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 먼저 외적인 요소로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요인을 들 수 있겠다.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서민들의 피폐한 삶, 민란과 전염병과 흉년 등은 백성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懷疑를 품게 하였다. 즉 심각한 사회악과 사회적 모순의 확대와 정신적 空虛 등이 백성들에게 세상의 덧없음을 절절히 깨닫게 하였던 것이다.
- 내적인 요소로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적 요인을 들 수 있겠다. 인간은 항상 완전하며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있으나 현세에서 그러한 진리를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음을 체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더욱이 죽음에 의해 한계 지워지는 인생을 생각할 때 부세사상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이러한 내외적인 요소들로 인한 부세사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순교자들은 자연스럽게 덧없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더욱 궁극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세상을 希求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요구에 명확한 내세의 영복을 제시하는 그리스도교를 굳은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 "인생이란 사라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인생은 나그네 길이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23)
- "봄과 가을은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고, 세월은 부시로 치는 돌에서 튀어나오는 불똥과 같아서 길지 못합니다."24)
- "간절히 부탁하니 모든 일에 천주 성의를 따르고 지난 모든 일을 뉘우치고 이 세상을 일장춘몽으로 알고 영원한 나라를 당신의 참 본향으로 여기시오, 아아, 나는 어떻게 이렇듯이 허무한 세상을 그리 중하게 여길 수가 있었던고."25)
- 우리의 순교자들이 이러한 부세사상위에서 순교영성을 키워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현세를 비관하는 염세주의를 지향했다거나 내세만을 바라고 현세를 완전히 멸시하지도 않았다. 즉 당시에 만연하던 부세사상을 그리스도교의 내세사상에로 자연스럽게 승화시켰으며 더욱이 현세의 의미를 내세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 4. 한국 순교영성의 특성과 현대적 의의
- 1) 孝悌로서의 愛主愛人
- 한국의 순교자들이 忠孝를 존중하던 문화풍토속에서 어떻게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인식을 심화시켰고 그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는 데에도 자극을 받았는지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제는 좀더 세부적으로 우리의 순교자들이 한국의 전통가치관인 孝와 梯로서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愛主愛人을 실천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가) 하느님 사랑으로서의 孝
- 우리의 순교자들은 하느님 사랑과 孝를 결코 다른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근본적이며 絶對的인 孝로 보았던 것이다. 즉 부모님을 섬기고 부모님의 뜻을 奉養해야함은 자식된 도리이지만, 육신의 부모께 대한 孝보다 더 중요한 것은 天地大君이시며 대부모이신 하느님께 대한 孝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孝의 실행방법으로 儒家에서는 크게 身體保全, 養志, 立身行道 등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 ㄱ) 身體保全의 孝
- 孝經에 '사람의 몸뚱이와 머리카락과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이것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효도의 시작'26)이라 하였다. 즉 자기의 몸은 全的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므로 자식된 자는 제 몸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서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 이는 언뜻 보기에 순교자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인즉 순교자들은 신체를 보존하기는커녕 오히려 목숨까지도 과감히 내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편협한 해석에 불과하다. 신체보전의 孝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가 전적으로 부모님께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에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지 신체의 보전여부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여 부모님께 대한 孝를 실천하는 것을 큰 德으로 생각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 우리의 순교자들 역시 자신의 존재가 대부모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조성된 것이므로 자신의 임의대로 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생명의 소중함도 다른 어느 것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 "그는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격려하였다. '우리는 각각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천주의 뜻이 어떤지를 모르는 만큼 할 수 있으면 박해자들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27)
- 그러나 자신의 생명과 신체는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께 대한 孝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孝의 완성으로 보았다.
- "마음속에 예수의 오상을 깊이 새겨 두십시오. 천주님께 사랑으로 사랑을 갚고 목숨으로 목숨을 갚으십시오."28)
-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음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들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요,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웃지들 마시오."29)
- ㄴ) 養志하는 孝
- 양지의 孝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불편이 없도록 하는 養口體는 물론이요, 기쁜 마음으로 奉養하며 부모의 뜻을 정성으로 받드는 것이다.30) 즉 부모의 뜻을 항시 잊지 않고 부모의 덕행을 실천하고 부모가 생전에 의도하는 바나 그 遺志를 잘 이어가는 것을 말한다.
- 이것은 우리 순교자들에게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吉凶禍福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안에서 이해했으며 그분의 義를 실천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했다.
- "그러는 동안 (金)바오로는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 아버지께서 아무리 이렇게 극단의 일을 하시더라도,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31)
- "우리는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온갖 희생을 당합니다. 우리는 역경이나 순경이거나, 모든 것을 천주의 섭리로 생각합니다."32)
- "무엇때문에 이렇듯 비탄에 잠길 필요가 있오이까. 모든 일이 천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들이 천주님의 자애로우신 섭리를 믿는다면,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슬픈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까."33)
- ㄷ) 立身行道하는 孝
- 입신행도의 孝는 修身하고 道를 행하여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이름을 빛내고 부모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34) 즉 신체를 잘 보존하는 것과 부모의 뜻을 잘 받들고 순종하는 것에 더불어 몸을 세워 道를 행하여 자기의 명예는 물론 그의 부모와 가문까지 빛내야 하는 것이 바로 입신행도의 孝인 것이다.
- 이것 또한 우리의 순교자들에게서 너무나 잘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본고 서두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순교정신, 순교영성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기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비록 목숨을 바칠지언정 하느님의 義를 실천하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던 것이다.
-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자기 영혼에 영원한 영광을 보증하는 것입니다."35)
- "사람이 무엇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읍니까. 사람의 가장 큰 도리는 천주를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고,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큰 본분을 채우지 않고 세월을 허송한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읍니까."36)
- 나) 兄弟愛로서의 悌
- 유가에서는 孝와 悌를 결코 다른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悌를 孝의 실천 내지 확산으로 보았다.37) 더구나 茶山 또한 孝에 못지 않게 悌를 강조하였다. 즉 형제는 나와 같은 부모의 遺體요 나의 肢體이며 더구나 다른 나인데, 이러한 형제에게 悌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사랑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悌와 孝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효도의 일종으로 보았다.38)
- 우리의 순교자들 역시 사람을 사랑해야 될 이유로서, 모든 이는 천주의 자식이기 때문에 형제같이 지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의 인품이나 재능, 덕행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창조된 동일한 피조물이며 「사람된 위(位)」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해야 됨을 역설하였다. 당시의 신도들은 모든 사람을 천주의 모상으로 보아 자기와 같이 사랑해야하고 사람을 사랑하거나 미워함이 천주를 사랑하고 미워함이 되는 것으로 교육받고 있었던 것이다.39) 즉 순교자들의 형제애와 애덕의 행위들의 중심에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효도의 정신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려운 박해의 상황에서도, 더욱이 감옥생활과 고문의 순간에도 서로를 위로하며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孝와 悌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듯 우리의 순교자들 역시 하느님 사랑과 사람사랑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 위에서 사람들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곧 머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천주를 사랑하면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고, 사람들을 사랑하면 천주를 또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40)
- 이상에서 愛主愛人으로서의 孝悌를 살펴보았다. 당시의 유교사회에서 孝와 悌가 얼마나 엄격하게 준수되었는지는 주지의 사실이다. 오히려 너무 엄격하게 지켜졌기에 오늘날에 와서 허례허식이라는 비판을 면치못하고 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이러한 엄격한 孝悌정신을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적 애주애인의 정신으로 승화시켰으며 그러한 孝悌정신에 의해 하느님 사랑과 사람사랑을 실천하며 사셨다. 즉 하느님께는 지극한 부모님께 대한 사랑을,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들에게는 지극한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며 사셨으며 그것이 바로 증거의 삶이 되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쁘게 서로를 돕고 위로했으며 이러한 모범적인 삶으로 인해 박해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마음놓고 전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數가 줄지 않았던 것이다. 신앙과 삶이 분리된 오늘날의 우리들, 삶으로써가 아니라 입으로만 전교하려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던져 주고 있는 것이다.
- 2) 純眞無垢性
- 孝悌 못지 않게 우리 순교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영성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순진무구성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서간 어디를 보더라도 꾸밈없는 단순소박한 마음을 볼 수 있다.
- "남녀를 막론하고 천성적으로 매우 정열적이고 명랑하며 적극적이다. 나약하거나 비겁하지도 않다. 중국인 못지 않게 거짓말도 잘하지만, 보다 솔직하고 단순하다. 강직하고 근엄한 성격이 그들을 더욱 우수한 민족으로 평가하게 하며, 일단 개종하고 난 후에는 자신의 구령에 절대적이다."41)
- "따로 따로 행해지는 이런 작은 박해로 저희들의 성무집행이 어렵기는 하지만, 저희들에게 첫영성체의 즐거웠던 날들을 회상케 하는 우리 신자들의 열심, 그들의 생생한 신앙, 순박한 신심, 진실한 뉘우침, 영적인 기쁨, 거룩한 묵상, 눈물, 한 마디로 말해서 선교사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저희들에게 풍부한 위로를 안겨 줍니다."42)
- 그리고 이러한 순진무구성은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18,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린이들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따라서 어린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순진무구성의 특징들을 살펴봄으로써 완덕의 길에 순진무구성이 왜 필요하며 또 우리의 순교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며 사셨는지 살펴보겠다.
- 첫째, 어린이들은 특별히 자폐아나 정신적 질환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말이라면 무엇이든 굳게 믿는다. 우리의 순교자들 역시 하느님을 대군대부모로 알고 그분이 명하신 모든 계명과 진리를 현세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게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러한 단순하지만 굳건하며 절대적인 믿음 위에서 기꺼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과감히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둘째, 어린이들은 부모 곁에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순교자들 역시 늘 자신들의 일상안에서 하느님의 現存을 느꼈으며 따라서 늘 인간을 善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 곁에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빈궁하고 고통스러운 현세의 삶에서도, 고문을 받는 중에도,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에도, 더욱이 치명의 순간에도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그분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 "형제들, 용기를 내시오. 주의 천사가 손에 금으로 된 자를 쥐고 당신들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세고 하는 것을 보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들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오."43)
- "모든 것을 아시는 천주 앞에서 왜 불안해 할 필요가 있겠읍니까."44)
- 셋째, 어린이들은 항상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기뻐한다. 대군대부이신 하느님의 약속을 그분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고 따랐기에 우리의 순교자들은 늘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현세의 가치나 판단으로 볼 때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께 감사하며 일상을 기쁘게 사실 수 있었던 것이다.
- "모든 특은이 나 한사람 위에만 무더기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내 온 몸이 입술로 변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천주의 찬미를 넉넉히 부를 수 있겠읍니까. 여러분 교우들은 내 대신으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주기 바랍니다."45)
- 그 옥에는 여러 외교인 죄수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金이라는 선비도 있었는데 黃石之 베드로의 거동과 얼굴에 거룩한 기쁨이 넘쳐흐름을 보고 모두 놀라 말하였다. "누구나 다 갚아야 할 잘못이 있는데 어째서 이 노인은 죽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죽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가."46)
- 결국 어린이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대군대부모이신 하느님은 우리 순교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든든한 보루요 안식처이며 온갖 애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즉 어린이와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전적으로 의탁하여 기쁨의 삶을 사셨기에 그리스도교 완덕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순교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 복잡하고 세분화되고 다원적인 현시대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 단순한 믿음은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신학은 발달했지만 신앙은 쇠퇴해 가고 있는 현시대에서 혹자는 그러한 믿음을 맹목적이며 광신적인 믿음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가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무엇인가? 우리 신앙의 대상이 확실히 하느님인가?
-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항상 절대적이며 전적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로운 의사로 그리스도교에 입교함으로 해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를 것을 고백했다. 우리의 순교자들이 고백한 신앙의 내용과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은 결코 다르지 않다. 한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분들은 고백한 신앙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실제로 믿고 따랐으며 오늘날 우리는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되 실제로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편한 것만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선별하여, 아니면 우리 식으로 해석하여 하느님의 계시진리가 아닌 우리의 계시진리로 뒤바꿔서 믿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 고백한 신앙을 실제로도 믿는 것이 과연 맹목적이며 광신적인 믿음인가?
- 어린이와 같은 단순하며 소박한 마음이 없이는, 순진무구성이 없이는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순진무구한 마음이 있을 때에만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참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순진무구한 마음을 가질 때에만 하느님의 섭리에 기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위안과 위로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순진무구한 마음이 없이는 겸손, 온유 등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덕목들도 가능하지 않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며 또한 순진무구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 3) 하느님 나라의 渴望
- 우리 순교자들의 순교영성 중 또 한가지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다. 그리고 순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도 사실은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현세는 지나가는 주막, 인간은 언젠가 떠나야할 나그네이므로 더 영원한 천국을 바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와 육체의 의미는 내세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단계로서만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 "저는 다시 같은 모양으로 죄를 짓기 보다는 추위로 얼고 굶주림으로 고생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괴로움을 잘 참아 받음으로 저는 죽은 뒤에 하늘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47)
- 물론 本鄕이라고 불리는 내세에서의 천국과 잠세라고 칭해지는 現世, 영생하는 영혼과 소멸되고 마는 육신이라고 하는 우리 순교자들의 二分法的인 사고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결코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고 자체가 유해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우리 순교자들 역시 현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내세를 지향했던 것만도 아니며 육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영혼만을 고집했던 것도 아니다. 당시 서구의 시대적 사조는 차치해 두고라도 단지 더욱 영원한 것을 더욱 근본적인 것을 찾았기에 내세와 영혼에 강조점을 두었던 것뿐이다. 즉 현세의 삶도 또한 육체도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는 유한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필연적으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영원한 삶을 더욱 갈망하였던 것이다.
-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내세지향적인 순교자들의 이러한 사고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국을 희망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처럼, 다소 고루하고 진부한 영성사의 잔재처럼 치부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종말론에 대한 활발한 현대신학적 해석 또한 대단한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장소적이며 시간적인 개념이 아닌 것, 그리고 "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등의 표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새로운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종말론에 대한 이러한 현대적 해석이 결코 내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에 새로운 해석을 가함으로 해서 더욱 포괄적이며 적극적인 종말론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시대의 신앙인들은 이러한 현대신학적 해석에 자신들의 해석까지 가미하여 내세를 불신하고 있으며 또 실제로도 많은 신앙인들이 내세의 천국은 무시한채 마음의 천국, 현세의 천국만을 지향하고 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신앙인들 과연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내세지향적인 終末的 영성과 현세에 더욱 강조점을 두는 肉化的 영성이 그것이다. 시대에 따라 다소 강세의 차이는 있지만 두 영성은 항상 존재해 왔다. 그리고 강조된 영성에 따라 구원관 역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즉 종말적 영성을 강조하는 시기에는 개인적 구원이 중시되었으며 육화적 영성을 강조하는 시기에는 공동체적 구원이 강조됨을 영성사와 교의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종말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은 결코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상대를 완전히 배제하고 한가지의 영성만이 존립했던 시기는 있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오히려 현세적 사고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하여 종말적 영성은 뒤로 한 채 육화적 영성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 육화적 영성만으로는 부족함을 잘 알면서도 우리의 목적을 우리의 천국을 잃어 가고 있다. 천국과 지옥이 믿을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단정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내세지향적일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현세는 다만 내세와의 관계하에서만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사고를 뒷받침해 준다. "인간적인 것은 신적인 것을 지향하고 또 거기에 종속하며, 볼 수 있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활동은 관상을, 현세의 것은 우리가 찾는 내세의 도시를 지향한다."48) 다시말해서 우리 순교자들의 종말사상과 오늘날 교회의 그것과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천국을 본향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들인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주는 고향은 잃어버린 채 현세의 것에만 마음을 쓰며 영원히 살 것처럼 현세에 안주하려고 한다. 천국을 바라는 삶과 바라지 않는 삶과는 그 삶의 질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천국을 바라고 살았기에 어려운 처지에서도, 끌려가면서도, 감옥에서도, 고문중에도, 그리고 처형당하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을 굳게 믿으셨기에, 삶 자체가 그곳으로 향해가는 여정에 있음을 깨달으셨기에 현세에 초연하실 수 있었으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미 천국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국을 바라고 사셨기에 늘 깨어 준비하며 사실 수 있었던 것이다. 천국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우리들 대체 무엇을 희망하며 사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 4) 영성의 土着化
- 바티칸 공의회이후 모든 나라들에서는 각국의 전통과 실정에 맞게 그리스도교를 토착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교회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여러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모든 백성들에게 널리 설교하며 설명하고,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여 깨닫고, 전례와 여러 계층의 신자 공동체 생활 가운데서 더 잘 표현하기 위하여 문화의 소산을 이용하여 왔다.49)
-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록 그 역사와 노력의 정도는 다르다 할지라도 각계 각층에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전례의 토착화에 대한 한국교회의 시도는 다소 미약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좋은 호응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어떤 것이 있지는 않을까? 즉 형식적이며 외형적인 토착화에 앞서 내면적이며 영적인 토착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 본고에서 토착화에 대한 명확한 비젼이나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어도 우리 순교자들의 나름대로의 영적인 토착화 노력을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왜 선행되어야 하며 또 그것이 없이는 외적인 토착화 또한 무의미하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만족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 순교자들의 토착화 노력은 실로 미약하다. 당시 교회의 완고한 모습은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도 급급한 박해시기에 토착화는 엄두도 못낼 이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박해시기였기에 그리스도교는 護敎的일 수밖에 없었고 호교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나름대로 토착화의 노력은 계속되었다고 본다. 즉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유럽인이 아닌 한국인들이었고 그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달해야 했기에,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변호해야 했기에 그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우기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기까지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體得하고 소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체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인 토착화라고 생각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공동체적인 토착화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신앙인들 각자 각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토착화의 노력이라고 본다. 그리고 모든 신앙인 안에서 영적인 토착화가 이루어질때 외적인 토착화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 순교자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천주의 호칭 문제나 천주가사등과 같이 교회 선각자들에 의한 토착화의 노력은 둘째 치더라도 우리 순교자들 모두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체득한 분들이다. 비록 외래의 종교이지만 그분들은 그리스도교의 진리 하나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자신의 진리로 받아들였고 또 받아들인 바를 실천하셨던 분들이다. 따라서 그분들의 서간 어디에서나 한국적인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 체득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다.
- "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 대해서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그것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에나 작은 발에나 다 맞는 이 버선과 비슷한 걸세." … 그것은 서양에서 온 버선으로 양털로 만든 것이어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50)
- "저 자신 아무 덕행도 없으면서 대담하게도 다른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참말이지 저는 마치 길가에 놓여져서 길을 가리켜 주면서도 저희들은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저 장승들 같지 않을까요."51)
- "육신이 병들었을 때에 우리 나라 약을 써서 효력이 없으면 중국에서 들어 온 약을 써서 가끔 병을 고치게 됩니다. 사람은 각기 일곱가지 죄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영혼의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종교 없이는 이것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52)
- 또한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우리의 순교자들은 시골의 무식한 아녀자일지라도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당당하게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느 날 양반집의 외인 한 사람이 그에게 '지옥은 대단히 좁다고 말하거늘 어떻게 하여 그 많은 사람을 몰아 넣을 수 있소'라고 물었다. 이에 그는 '당신의 좁은 마음속에는 만권의 책이라도 넣을 수 있지 않겠소. 그러나 그 때문에 좁다고는 생각하지 않지요'라고 말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주교 신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제법 도리에 맞는 말을 한다'라는 말을 하게 하였다."53)
- 물론 오늘날의 토착화 노력과는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순교자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한국적이며 전통적인 몇 가지 표현양식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순교자들의 토착화된 영성을 논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성의 토착화가 교회의 어느 한 계층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온 신자 개개인이 굳은 결단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체득할 때에만이 영적인 토착화는 물론 외형적인 토착화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단이 없이는, 실존적인 신앙에의 투신이 없이는 영성의 토착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토착화는 학문적인 것도, 이론적인 것도 아닌 우리의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 현대의 신앙인들에게 영성의 토착화는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굳은 결단이 없기에, 전적인 신앙에의 투신을 두려워하기에, 신앙의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려고 하기에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온전히 내것으로 소화하고 체득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지는 교리지식을 머리속으로만 외우는데 그치고 만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 체득하지 못한 채 외적이며 부차적인 토착화의 노력에만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느님을 위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의 굳은 결단이 없이 영성의 토착화는 가능하지 않다. 즉 순교영성 없이 한국적인 영성의 토착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순교자들은 개개인의 삶안에서 신앙안에서 영성의 토착화를 이루신 분들이다.
- 5. 순교영성을 위한 몇 가지 提言
- 앞에서 간략하게 나마 순교영성의 바탕과 한국 순교영성의 특징 및 현대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그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과제와 그 전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 1) 순교영성의 硏究
-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세기동안 量的 質的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으며 이제는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준비로 교회내의 여러 계층들이 여러 분야에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는 물론 하느님의 나라를 가시적이고 제한적인, 그리고 변화해 가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는 교회로서는 대단히 鼓舞的인 일이며 당연지사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아니 적어도 함께 병행해야 할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
-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사 초기부터 많은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 왔으며 이러한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피로써 증거한 많은 순교자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큰 자랑거리요 유산인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위대함과 모범적인 신앙의 삶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활발한 교회사적 연구, 성지개발, 끊임없는 기도 등으로 결국 1984년 103위 성인 시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모든 노력은 끝난 것처럼 보인다. 즉 오늘날 순교자들은 그저 막연한 교회의 자랑거리요 역사학자들이나 흥미를 가지고 탐구하는 연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신자들의 일상과 유리된 韓國敎會史, 의례적인 순교자 성월과 성지순례 때에만 보여지는 잠시적인 공경 등은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우리의 선조들인 순교자들을 역사의 뒷장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 교회의 모든 학문은 신앙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신앙에 도움이 될 때에만 그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現今까지 교회의 일각에서 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결과들이 신앙과 접목되지 못한 채 학문으로서만 남게 될 때 신자들과의 유리된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즉 교회사적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순교자들의 영성을 심도 있고 세밀하게 연구하여 더 쉽고 더 구체적으로 신자들에게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신자들의 일상과 접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순교자들은 다른 많은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처럼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순교자들의 영성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교회사 연구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한국적 영성의 발전을 위해 순교자들의 영성을 연구하는 전문기관의 설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 순교자들의 위대한 순교정신과 사상을 연구하며 또 그것을 오늘날 우리 교회가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제시하여야 한다. 즉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들에게 맞는,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에게 맞는, 수도자들에게는 수도자들에게 맞는, 그리고 성직자들에게는 성직자들에게 맞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제시하여 교회의 모든 계층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순교정신을 고취시켜야 하는 것이다.
- 2) 日常에서의 殉敎精神
-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박해의 상황이 있지 않다. 그러면 목숨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지킨 우리 신앙의 先祖들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며 또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순교영성, 순교정신을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 물론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박해의 상황은 있지 않다. 그러나 內面的인 박해의 상황은 항상 있어왔음을 알아야 한다. 내 욕망에 의한 박해, 내 의지에 의한 박해, 사회의 불의에 의한 박해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 하느님의 선과 나의 욕망, 죄에로 기울려는 경향등은 우리의 내면속에서 끊임없이 박해의 상황을 야기시켜 왔다. 과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왔는가? 사소한 일이라는 이유로 너무도 자주 우리의 일상에서 배교자들이 되었던 것은 아닌가?
- 이미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교회는 교부시대부터 이미 무혈의 순교, 일상에서의 순교를 높이 평가해왔다. 즉 주의 계명과 복음적 삶을 철저히 사는 것 또한 순교로 보았던 것이다. 순교영성의 중심은 목숨을 바치는 것 자체가 아닌 것이다. 목숨을 바치는 행위가 없더라도 하느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 삶이 바로 순교영성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더더욱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 완덕으로 나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외적인 박해가 있지 않은 오늘날에는 일상에서의 순교, 나의 욕망과 죄악에로 기울려는 경향들에서 순교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다.
- 이제 한국교회에서는 "희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 목적이 생략되어 있는 희생이란 용어 대신 좀 더 적극적이면서도 목적이 분명한 "순교정신"이란 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 의도적으로라도 "순교정신"이란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일상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그릇된 욕망에서 순교한다는 의미에서 "순교정신"이란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우리 모두 순교자들의 후예답게 일상에서의 순교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3) 時代를 超越한 證據者
-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것이다. 물론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표현양식과 인식방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리스도교의 진리 자체는 결코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여년의 세월을 앞서간 우리의 순교자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이며 또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인가? 많은 시간의 흐름과 사회전반의 변화 속에서 과연 아직도 우리의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있어 신앙의 증거자인가?
- 사실 백여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 그때와는 이미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변화되고 발전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순교자들은 단지 역사의 다른 많은 위대한 인물들처럼 막연히 존경해야할 분들로, 혹은 그저 신화 속의 인물들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 1.들어가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