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한국 천주교회사

[스크랩] 제 3장 조숙 동정부부의 순교-정해박해 -3

손드러 2010. 1. 19. 08:10
 

4) 이(李)성삼 요한


   이(李) 성지 세례자요한과 함께 그의 셋째 동생 이(李)성삼 요한도 체포(逮捕)되었었다. 이(李)성삼 요한은 어렸을 때에 부모의 원을 따라, 일을 하는 틈틈이 글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천주교 서적(天主敎書籍)을 많이 베껴, 교우들에게 팔기도 하고 그냥 주기도 하였다.

   그밖에 가난한 교우(敎友)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비록 성질이 팔팔하고 급하였지만, 하도 자기 자신을 억제(抑制)할 줄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말의 부드러움과 사랑스러움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27년에 체포(逮捕)되어, 관장(官長)앞에서 여러 차례 형벌(刑罰)을 당하였는데, 그때에 갇혀있던 교우(敎友) 여럿이, 그들의 집에서 압수(押收)당한 책을 이李)성삼 요한이 베꼈다고 고해바쳤다. 이 새로운 죄목(罪目)은 그로 하여금 많은 곤란(困難)과 괴로움을 당하는 원인(原因)이 되었다. 그 뒤로부터는 교우(敎友)들의 두목(頭目)처럼 다루어져 문초(問招)를 여러 차례 당하고, 하도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을 당하게 되어, 결국 그 여독(餘毒)으로 그해 9월 14일에 옥중(獄中)에서 죽으니, 나이는 33세였다.


   이(李)성삼 요한과 다른 증거자(證據者) 4명이 함께 갇혀 있었는데, 그들의 순교(殉敎)는 이 시기에 시작하여 13년 후에야 끝이 났다. 그들의 이름은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이일언(李日彦) 욥, 김대권(金大權) 베드로, 이태권(李太權) 베드로였으며, 모두 조선천주교회의 요람(搖籃)이며 중심지(中心地)였던 유명한 내포평야(內浦平野) 출신들이었다.


5) 정태봉(鄭太奉) 바오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의 관명(冠名)은 만보이나, 태봉(太奉) 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더욱 알려져 있었는데, 덕산(德山)고을 사람이요, 1801년에 순교(殉敎)한 정(鄭) 베드로(* 본고(本稿) 상권 97~98쪽 참조)의 사촌(四寸)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먼 일가 집에서 자랐는데, 이런 경우에 흔히 있는 것처럼, 순전히 종 대접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온순(溫順)하고 친절하여, 수없이 많은 시련(試鍊)을 인내(忍耐)와 체념(諦念)으로 견디어 낼 수가 있었다. 그후 자립할 수 있게 되자, 내포(內浦)를 떠나 전라도(全羅道)의 용담(龍譚) 고을로 갔다. 거기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때마침 1827년의 박해(迫害)가 일어났다.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항상 열심한 신자로서, 자기의 본분(本分)을 어김없이 지키려고 온갖 노력(努力)을 다하며, 배울 욕심이 하도 강해서, 천주교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책을 덮는 성품(性品)이었다.

   그는 마음속에 순교(殉敎)하고자 하는 큰 원을 품고 있었으며, 가끔 도마를 턱밑에 갖다 대고,

  ꡐ이런 자세로 칼을 받으면 아마 내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거야ꡑ

   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너무 무모(無謀)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하여 처음에는 몸을 숨겼다. 그러나 자주 집으로 돌아온 까닭에, 하루는 배교자(背敎者)의 밀고(密告)로, 관에서 발급한 구속영장을 가지고 온 포졸(捕卒)들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구속영장(拘束令狀)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본인이 원했더라면, 쉽게 모면(謀免)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좋은 기회(機會)를 놓치지 않으려고, 포졸(捕卒)들을 따라 용담관아(龍譚官衙)로 가서 문초(問招)를 받으며, 다리에 매질을 당한 후, 도의 수부(首府)인 전주(全州)로 압송되었다. 거기에서 정태봉(鄭太奉) 바오로는 두 차례에 걸쳐 주뢰(周牢)의 형벌과 뾰죽한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았는데, 관장(官長)은 그에게 배교(背敎)를 시키거나 또는 교우들을 고발(告發)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다음 조치(措置)를 기다리는 동안 옥에 가두었다.


6) 이일언(李日彦) 욥


㉠ 이일언(李日彦) 욥은 태문(太文)이라고도 하나, 흔히는 안의이씨(安義李氏)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홍주(洪州) 고을 대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父母)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1801년 박해(迫害) 전부터 수계(守誡)를 하였는데, 그 시절에 붙잡혀, 얼마 동안이나 또한 어떠한 환경 속에서인지는 모르나, 옥에 갇혀 있다가, 경상도(慶尙道) 안의(安義)로 귀양을 갔었다.

   유배지(流配地)에 이르러 그곳 관장(官長)과 관원(官員)들에게 잘못 보여 다시 옥에 갇혔는데, 이러한 일은 보통은 귀양을 간 사람들에게는 적용(適用)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에 한 끼 밖에는 음식(飮食)을 주지 않고, 어떤 때에는 이틀에 한 번만 먹이며, 심지어 불과 물까지 주지 않는 일이 있었다.


㉡ 이일언(李日彦) 욥은 이렇게 10년 동안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갖가지 모욕(侮辱)과 학대(虐待)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참다운 신자로서, 욕설(辱說)을 귀담아 듣지 않고, 모욕(侮辱)을 느끼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변함없는 그의 인종(忍從)은, 마침내 편견(偏見)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으니, 간수(看守)들이 차차 덜 포악(暴惡)하게 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개인 집에 연금(軟禁)시키기로 하였다.


㉢ 1815년에는 그의 아내가 비로소 남편을 찾아올 수가 있어서, 그때부터 1826년 5월까지 안의(安義)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다가 이일언(李日彦) 욥은 석방(釋放)되어, 전라도(全羅道) 임실(任實)고을 대판(* 임실군(任實郡) 임실면(任實面) 오류리(五柳里)와 동군(東郡) 성수면(聖水面) 왕방리(枉訪里) 두곳에「대판이」라는 마을이 있음) 이라는 마을에 가서 살려고 했는데, 그곳에 가서 자리를 잡자마자 박해(迫害)가 일어났다. 그의 아내는 피신(避身)하라고 하였으나, 이일언(李日彦) 욥은      아내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은밀(隱密)한 곳에 피해 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있었다. 찾아간 사람들이 왜 우느냐고 물으니,  이일언(李日彦) 욥은

  ꡒ전에 순교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귀양을 간 것이 분해 죽겠다. 지금은 외딴

   곳에 와서 살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없으니, 기막힌 일

   이 아니냐?ꡓ

   고 대답하였다.


㉣ 아마도 그의 한숨이 하늘까지 올라갔음이리라. 그날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 전주포졸(全州捕卒)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그를 체포(逮捕)하였다. 이일언(李日彦) 욥은 기쁨을 걷잡지 못하며 포졸(捕卒)들을 따라갔다.

   첫 번 문초(問招) 때부터 관장(官長)이 그의 전력(前歷)을 알게 되자, 보통 때보다 더욱 심하게 매질을 시켰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 이일언(李日彦) 욥의 마음이 요지부동(搖之不動)인 것을 보고는 마침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내렸다.

   이일언(李日彦) 욥은 키가 자그마하고, 몸집도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형벌(刑罰)을 당하는 중에 그가 보여준 끈기와 결기(決起)는 이내 감영(監營)의 관원(官員)들 전체의 주목(注目)을 끌게 되어, 이들은

  ꡒ우리가 외모만 보고 잘못 판단을 했었구먼. 이 사람은 정말 천주교인들의 두목 일세.ꡓ

하고들 주고받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일언(李日彦) 욥은 옥에 갇혀, 처형(處刑)의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출처 : 가톨릭 교리신학원 총동문회
글쓴이 : 가브리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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