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증거자(證據者)들
위에서 말한 세 순교자(殉敎者)들이 신자(信者)의 이름을 하나도 실토(實吐)하지 않
았으므로, 그들의 심사(審査)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으며, 그때 서울에서는 다른 신
자(信者)들이 잡히지를 않았다.
그러나 지방(地方)에서는 몇몇 신자(信者)들이 체포(逮捕)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
니, 어떤 기회에 그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1871년 10월에 해미포졸(海美捕卒)들이
갑자기 덕산(德山)고을 배나다리(*지금의 예산군(禮散䐃) 삽교읍(揷橋읍) 용동리(龍洞里) 3구)
에 나타나서, 몇몇 신자(信者)들을 잡아 해미(海美))로 압송(押送)하였다.
인접한 몇 고을 밖에는 파급(波及)되지 않은 이 박해(迫害)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
은 바, 당시의 기록(記錄)에도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言及)이 없고, 얻을 수 있는
증언(證言)도 정확성(正確性)이 없다. 이것은 주로 사형(死刑)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데
에서 기인(起因)하는 것이니, 교우(敎友)들이 기록(記錄)으로 남길 때에는, 흔히 사형집
행인(死刑執行人)의 손에 죽은 순교자(殉敎者)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많이 하고, 옥에
서나 귀양살이 가는 도중에, 그보다 못지않게 영광스러운 죽음을 당한 교우들의 이야기
는 덜 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해미(海美)가 외따로 떨어진 곳에 있었고, 또 이번 신문(訊問)이 별로 중요하
지 않았던 것이, 이 사건(事件)을 망각(妄覺)속에 밀어 넣는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른
다. 이번에 붙잡힌 신자(信者)는 30명가량 밖에 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배
교(背敎)하여 이내 석방(釋放)되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 사람만은 마음이 꿋꿋하여, 죽을 때까지 항구(恒久)하는 은혜(恩
惠)를 받았었다. 이제부터 그 중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에 대하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을 여기에 기록(記錄)하려 한다.
1) 민첨지(閔僉知) 베드로
민첨지(閔僉知) 베드로는 결성(結城) 고을 태생으로, 항상 다른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
려(激勵)하는 것을 중요한 일과(日課)로 삼아왔었다. 목천(木川) 고을 쇠악골에서 몇 해 동안 살다가, 배나다리로 이사하여, 자기가 늘 하던 습관대로 그 마을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애덕(愛德)과 덕행(德行)의 모범(模範)으로 이내 모든 사람들의 존경(尊敬)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10월에 붙잡혀가서, 형벌(刑罰)을 받아도, 같이 잡힌 사람들이 낙오(落伍)되어도, 마음
이 동요(動搖)되지 않았다. 그의 형수(兄嫂) 중의 하나인 안나라는 부인은 얼마 전에 과부
(寡婦)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잡혀 그의 용기(勇氣)를 본받았다.
이 두 사람은 두 달가량 괴로움을 겪은 뒤에 옥중에서 굶어죽었다. 이 두 분은 모두 60
이 넘은 노인(老人)들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안나는 한 손이 육손이었다 한다.
2) 송첨지(宋僉知) 요셉
송(宋)춘화 필립보의 삼촌인 송첨지(宋僉知) 요셉은 체포(逮捕)될 대에 이미 연로(年老)하였었다. 가난한 사람으로 친척(親戚)도 없이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로 목숨을 이어갔는데, 성질이 온순(溫順)하고 순박(淳朴)하며 충직(忠直)하여, 그를 아는 이는 누구나 좋아하였다. 그도 붙잡힌 뒤에 신앙(信仰)을 버리기를 거부(拒否)하고, 해미(海美)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3) 무명(無名)의 증거자
성명(姓名)을 알 수 없는 또 한 분의 산자도 예수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거(證據)한 후, 같은 옥중에서 관장(官長)의 마지막 선고(宣告)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친척 중에 큰 부자(富者)가 한 사람 있었는데, 포졸(捕卒)들은 그의 집을 약탈(掠奪)할 생각으로 그를 밀고(密告)하게 하느라고, 이 신자를 끊임없이 은밀히 고문(拷問)하였다.
이 신자(信者)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졸(捕卒)들의 학대(虐待)를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하루는 사슬에 묶인 손목을 빼가지고, 간수(看守)들의 눈을 피하는데 성공하여 탈옥(脫獄)한 다음, 어떤 교우(敎友)의 집에 숨어살다가 오랜 뒤에 세상을 떠났다.
4) 손(孫)연욱 요셉
홍주(洪州)고을 태생인 손(孫)연욱 요셉은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하는 데에 씩씩하고, 형벌(刑罰)을 참아 받는 데에 항구함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는 양순(良順)하고 겸손(謙遜)하며, 남을 사랑하는 본분(本分), 특히 신자(信者)의 본분(本分)을 지키는 일에 지극히 엄격(嚴格)하였다. 그는 가끔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싶다는 의사(意思)를 표명(表明)하였다.
그가 붙잡혀 해미(海美)로 압송되어가자 영장(營將)은 그를 불러다 놓고, 신자들을 밀고(密告)하라고 강박(强迫)하며, 천주교의 책을 갖다 바치고 배교(背敎)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에 대해 손(孫)연욱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軍士)가 마땅히 해야 할 대답(對答)을 하고, 곧 이어 문초(問招)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날 동안 고문(拷問)을 당했으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동요(動搖)치 않았고, 오직 천주께 기도(祈禱)들 드리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은 그의 입술에서는, 남에게 누를 끼칠 만 한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를 않았다.
옥에 함께 갇혀 있는 교우(敎友)들이 많이 낙오(落伍)되었는데도 그는 조금도 마음에
충격(衝擊)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기회(機會)를 타서 자기의 열심(熱心)을 불러일으키고 분발(奮發)하여, 천주를 부당(不當)하게 모욕(侮辱)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충성(忠誠)으로 보상(報償)하려는 것 같았다.
무수한 고문(拷問)을 오랫동안 당하고, 옥중에 버림을 받아, 영영 석방(釋放)될 가망성이 없어지니, 그는 일생(一生)을 거기에서 지내려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6,7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흘러갔지만, 그의 결심(決心)은 덜해지기는 고사하고 날로 더 단단해져 갔다.
마침내 옥 곁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살도록 허락(許諾)을 얻어, 몇 주일 동안을 거기에서 머무르다가 죽으니, 그의 임종(臨終) 때의 사정(事情)은 많은 교우(敎友)들을 감격(感激)시켰다. 그는 아무런 병도 들지 않은 것 같았으므로, 누구도 그가 그렇게 쉽게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하루는 밤새도록 기도(祈禱)를 드리고, 선종경(善終經)까지도 외우고 난 후, 이른 이침에 집을 나가 근처에 있는 샘에서 세수(洗手)를 하고, 샘 옆에 있는 큰 돌에 앉아 마지막 숨을 지었는데,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의 시신(屍身)에서는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풍기고, 여러 날 동안 굳어지지가 않았다. 때는 갑신(甲申, 1824)년이었다.
5) 손(孫)여심
손(孫)연욱 요셉의 아버지 손(孫)여심도 아들이 잡혀 간지 3일 후에 체포(逮捕)되어 해미진영(海美鎭營)으로 압송(押送)되었다. 그는 20여 차례나 혹독(酷毒)한 형벌(刑罰)을 받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마음이 흔들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확실(確實)한 것은 그가 옥에 갇힌 채, 함께 갇혀있던 교우(敎友)들과 같이 10년 동안을 지내다가 중병(重病)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관장(官長)은 그를 집으로 내보내어 병이 나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으나, 그것은 부질없는 명령이 되어 버렸다. 즉 그가 얼마 안 있어 정해(丁亥, 1827)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6) 이용빈의 아름다운 이야기
1817년의 박해(迫害)에는 대부분의 교우(敎友)에게 알려지지 않은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본명(本名)은 알 수 없고, 또 어쩌면 세례(洗禮)도 받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이용빈이라는 사람이 수원(水原)고을 감탕개(*담탕개)에 살고 있었는데, 조한지라는 교우(敎友)의 집에 장가를 들어, 외교인(外敎人)들 틈에 끼어 살며 아내와 둘이서만 수계(守誡)를 하였다.
그 후 상처(喪妻)를 하고, 모두가 외교인(外敎人)인 친척(親戚)들한테 가서 생계(生計)를 이어나가며, 열심(熱心)하고 충실(充實)하게 신자의 본분(本分)을 지켜나갔다. 벌써부터 친척들 중에서 그에 대한 비난(非難)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온갖 힘을 가하여 천주를 섬길 생각만 할 뿐이었다.
사촌형제(四寸兄弟) 중에 마음씨가 친절한 사람이 하나 있어, 천주교에 대한 말을 양순(良順)히 들을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이 영혼(靈魂)을 구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이용빈은 천주교에 대하여 자기가 아는 것을 그에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의 열성(熱性)이 성공(成功)을 거두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용빈을 달가워하지 않던 친척(親戚)들은 그가 여러 식구들을이 사교(邪敎)에 끌어들여, 일가 전체에 크나큰 화를 입히게 하지 않을까 염려한 나머지, 그를 치워버리기로 결정(決定)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배교(背敎)를 시켜보려 하다가, 그가 신앙을 배반(背反)하기를 거부(拒否)하자, 그를 어디론가 몰래 끌고 가서 죽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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